66화. 걱정하지 마! 내가 이기게 해 줄 테니까! (1)
은하상단의 힘은 과연 대단했다.
은하상단의 상단원들은 화산이 모든 제자들을 동원하고도 어찌하지 못했던 화음의 사업장들을 며칠 만에 안정화시키고 깔끔하게 정비해 버리는 기염을 토했다.
덕분에 평소 야차와 흡사하던 재경각주 현영의 얼굴에서 부처 같은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리고 그 부처 같은 미소가 향하는 곳은 대부분…….
"밥은 먹었느냐?"
"예, 사숙조."
"그래그래."
현영이 더없이 자애로운 미소를 띤 채 청명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에서 꿀이 떨어질 것 같다.
"많이 먹어야지. 많이 먹고 또 어디 가서 공을 벌어 오거라."
"……네?"
"아니지. 공을 세워 오거라."
"……."
삼대제자들은 그 아수라 같던 현영 사숙조가 웃을 수 있다는 것에 한 번 놀랐고, 심지어는 누군가의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새파란 후대에게 머리를 내어 주어야 하는 청명의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었지만 말이다.
'조련당하는 기분이야.'
심지어 현종과 현영은 어이없게도 회춘을 하는 중이었다. 새하얀 백발 아래로 검은 머리가 송송 솟아나고, 귀밑머리가 검게 물드는 것을 보고 있으면 황당함이 물밀 듯 밀려온다.
'하기야 과도하게 늙긴 했지.'
나이에 걸맞은 모습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무인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는 너무 호호백발이기도 했다. 그동안 고생을 워낙 많이 해서 겉늙었던 이들이, 마음의 여유를 되찾으면서 제 모습을 찾아 가는 모양이었다.
화음은 안정되었고, 장로들은 웃음을 되찾았다.
그리고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흐르기 시작했다. 화산의 제자들은 몇십 년 만에 화산에 찾아온 안정을 온몸으로 느끼며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모두가 평온한 삶을 즐기는 와중에 삼대제자들은 죽어 나가고 있었다.
"끄으으으으으으으."
"아이고오오오오."
사람 몸만 한 돌덩이들을 짊어진 삼대제자들이 땀을 비처럼 흘리며 몸을 움직였다. 바닥에 닿을 때까지 몸을 굽혔다가 온갖 악을 쓰며 일으킨다.
"끄으으으으응!"
"허, 허리가……."
하지만 하나 달라진 점이 있다면, 쉴 새 없이 튀어나오는 게 당연했을 청명에 대한 욕이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다.
"아이고 죽는다!"
"안 죽어. 안 죽어. 허리 펴."
"아니, 진짜 죽는다니까……!"
"두 번만 더 하면 돼. 자, 이게 마지막이다. 이게 마지막. 읏차. 잘한다. 한 번만 더어?!"
"아아악!"
바닥에 털썩 쓰러진 이가 바윗덩어리를 밀어 내고는 헐떡거린다.
"이, 이러다가 죽는 거 아니냐?"
"안 죽는다니까. 아직 죽은 사람 없잖아."
"……끄응."
처음에는 청명이 시켜서 뭣도 모르고 시작했다. 그냥 맞기 싫어서, 찍히기 싫어서 시작한 수련이다.
하지만 수련을 몇 달 반복하다 보니 깨닫는 게 있었다.
'이거 효과가 있다.'
아니, 효과가 있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효과가 엄청나다. 청명이 먹여 준 영약 덕분에 수련을 버틸 수 있게 된 이후로는 훈련의 효과를 전신으로 체감하는 모두였다.
일단은 하체가 단단해져서 검로가 흔들리지 않고, 체력이 늘어났으며, 무엇보다 전신에 활력이 넘친다.
아무리 별 의욕 없이 살아온 이들이라지만, 기본적으로는 모두 무인이다. 무인이란 강해질 수만 있다면 산 채로 뱀을 씹어 먹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만장단애의 절벽으로 서슴없이 몸을 던질 수 있는 이들이 아니던가.
헉헉대며 돌 좀 들어 올리는 것으로 실력이 늘 수 있는데 누가 수련을 마다하겠는가.
입으로야 우는소리를 늘어놓지만, 짊어지는 돌의 수는 점점 늘어 갔고, 이제는 숫제 바윗덩어리를 들어 올리는 이들도 나타났다.
개중 가장 눈에 띄는 이는 누가 뭐라고 해도 조걸이었다.
"흐아아아아앗!"
조걸이 제 덩치의 두 배는 되는 바위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내공도 안 쓰고 저게 되나?"
"그러게 말이야."
말을 나누는 이들의 모습은 꽤나 변해 있었다. 불과 몇 달이 지났을 뿐인데, 다들 키가 한 뼘은 더 커 있었고 어깨는 쫘악 벌어졌다.
특히나 조걸은 예전의 그를 알던 이라면 눈을 비빌 만큼 많이 변했다. 삼대제자 중 조금 작은 축에 속했던 그가 이제는 오히려 큰 편에 속할 정도로 자랐고, 전신이 탄탄한 근육으로 다져졌다.
윤종이 모두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참 기이한 일이지.'
처음 이 수련을 시작할 때만 해도 윤종은 나름 걱정이 많았다.
기본적으로 화산의 검은 변검이고, 환검이다. 쾌속함을 바탕으로 수많은 변화를 만들어 내고, 그 변화를 통해 상대를 압박하는 것이 화산의 검이 가진 특징이다.
그렇기에 단순히 힘을 키우는 이런 수련법은 화산의 검을 펼치는데 방해가 될 거라 생각했건만.
웬걸, 막상 수련의 효과가 나타나자 검이 두 배는 날카로워졌다.
덕분에 처음부터 다시 배우게 된 육합검도 무리 없이 소화해 냈고, 이제는 낙화검(落花劍)이라는 새로운 검을 익히는 중이었다.
칠성보(七星步)와 함께 익히느라 조금 버겁기는 했지만, 윤종은 이 버거움이 더없이 기꺼웠다.
칠성보와 낙화검은 지금까지 그들이 익히던 무학들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상승의 묘리가 숨어 있다. 이것만 익히면 강해질 수 있다는 확신이 드는 무학이다.
그러니 절로 신이 날 수밖에.
'다만 한 가지.'
"흐으으으으아압!"
"끄으으으으으으!"
"크으, 몸이 커지니 검이 젓가락 같구나!"
"껄껄껄껄. 겨우 이 정도인가! 쇳덩이 하나 더 가져와라!"
여기가 과연 화산인가 화산채인가.
선기와 도기가 흘러야 할 화산이 산적 소굴처럼 변해 가고 있다는 느낌만은 지울 수 없는 윤종이었다.
"사형. 이제 슬슬 밥 먹으러 가야 할 시간입니다."
"음, 그렇지."
예전에는 모두가 수련 시간이 끝나기만을 학수고대했지만, 이제는 자체적으로 수련 계획을 세우다 보니 시간을 넘기는 일이 잦아졌다.
너무 과하게 수련을 하다 하루의 계획이 흐트러지지 않게끔 관리하는 것도 윤종의 역할이다.
"이제 그만 정리하고 들어가자. 씻고 식사하고 아침 수련하러 가야지."
"예, 사형."
"하던 것만 마저 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음. 그러도록 해라."
주위를 둘러보던 윤종이 슬쩍 조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청명은 어디에 있느냐?"
"요즘 수련에 잘 안 나오잖습니까."
"하긴 그렇다만."
삼대제자들의 체력 단련이 자체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이후로 청명은 수련장에 얼굴을 잘 비추지 않았다.
"그렇다고 드러누워 자는 것도 아니고, 항상 제일 먼저 일어나는 것 같던데 대체 어딜 쏘다니는 거지?"
"저희가 알겠습니까? 사실 화산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 바로 청명 아닙니까?"
"그렇지."
빈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일련의 사태 이후로 화산은 활기를 되찾았다. 예전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던 방문객들이 적어도 하루에 몇 명 정도는 찾아올 만큼 흔해졌고, 화음에서 회수한 사업체들은 새로이 단장하여 순조로이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그에 발맞춰 화산의 낡은 전각들의 개보수가 진행되었고, 방문객을 위한 정비 또한 이뤄지는 중이다.
그 와중에 청명은 은하상단과 화산을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사형."
"음?"
"우리는 지금 얼마나 강해진 걸까요?"
"글쎄."
윤종이 고개를 갸웃했다.
강함이란 상대적인 것이다. 스스로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기 위해서는 잣대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잣대가 없다. 강해지고 있는 건 확실한데, 사형제들이 모두 같이 성장하다 보니 얼마나 강해졌는지 체감하기가 힘들다.
"적어도 그놈이 나타나기 전보다 두 배는 강해지지 않았을까?"
"겨우 두 배요?"
"모르지. 두 배라는 말도 좀 추상적이니까. 확실한 건 나는 예전의 나를 셋 정도는 상대할 자신이 있다."
"그거로는 부족합니다."
"응?"
"아시잖습니까. 이제 곧 회가 온다는 것."
'회'라는 말이 나오자 윤종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지."
"더 강해져야 합니다. 훨씬 더요."
"……그렇구나."
윤종이 피식 웃었다.
"그럼 청명 놈에게 조금 더 굴려 달라고 해 볼까."
조걸이 비장한 얼굴로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청명이 터덜터덜 걸어 낙화봉으로 향했다.
무인이 강해지기 위해서는 수련을 해야 한다.
그의 검은 과거의 육체에 완벽하게 맞춰져 있다. 따라서 그럴싸하게 따라할 수야 있지만, 과거처럼 완벽한 신검합일(身劍合一)을 이루지는 못했다.
여기에는 왕도가 없다. 끊임없이 검을 휘둘러 육체와 머리의 부조화를 해결해야 한다.
다만 문제는 청명의 검이라는 게 도무지 남 앞에서 휘두를 만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마음먹고 제대로 수련을 하면 화산이 뒤집어질 테니까.
"끄으응. 앓느니 죽어야지."
결국 남의 눈이 없는 곳에서 수련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요즘은 새벽같이 산을 올라 인적 드문 낙화봉에서 검을 휘두르다 내려가기를 반복하는 중이다.
'이걸 어떻게 하긴 해야 하는데.'
낙화봉까지 오르는 거야 별문제 없지만, 시간이 적잖이 낭비된다는 게 문제였다.
'안 그래도 시간이 부족한데.'
삼대제자들을 손보고, 은하상단과 연계하여 화음의 사업장을 관리하고, 중간중간 이상한 짓을 하는 장문인과 장로들을 살살 달래는 것만 해도 눈이 돌아갈 만큼 바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청명이 강해지는 것이다.
'느긋할 시간이 없어.'
이대로 백 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청명은 언젠가 과거 매화검존의 영역에 발을 들일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과거보다 강해질 수 있다. 청명이 강해지는 만큼 화산도 자연히 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화산을 노리는 이들이 있다면 더 강해지기 전에 무슨 수라도 쓰려 할 것이고, 딱히 노리는 곳이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융성하기 시작한 문파를 반기는 곳은 어디에도 없는 법이니까.
어떻게든 방해가 들어올 것이고, 시비를 거는 이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느긋하게 시간을 잡고 강해지는 와중에 감당할 수 없는 이들과 부딪치게 된다면?
게다가 화산에는 종남이라는, 반드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적이 존재하지 않는가?
청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한시라도 빨리 강해져야 한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해결할 수 있을 만큼.'
그러니 수련을 게을리할 수 없었다. 그저 최대한 빨리 오르는 수밖에. 드러누워 있는다고 알아서 강해지지는 않는다. 이를 악물고 부지런히…….
"어?"
청명이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군가가 있다.
한 달 전부터 청명이 정해 놓고 사용하던 수련장에 불청객이 나타난 것이다.
'누가 이 시간부터 여길……?'
조심스레 낙화봉으로 접근한 청명의 눈에, 달빛 아래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들어왔다.
검 끝이 매끄러운 선을 만들어 낸다.
부드럽지만 힘차게. 그리고 화려하지만 단아하게.
땅을 박찬 검이 하늘을 수놓고, 하늘하늘 떨어지는 꽃잎처럼 천천히 내려앉는다.
검무(劍舞).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두운 새벽. 세상을 비추는 달빛 아래 한 여인이 검무를 추고 있었다.
새하얀 무복과 흑단 같은 머리. 그리고 달빛을 받아 빛나는 검.
"월하가인(月下佳人)이라……."
청명이 멍하니 여인의 검무에 빠져들었다.
검이 달빛 아래 녹아든다.
여리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검. 저 검은 매화와 닮았다. 그렇다. 화산의 옛 검이 저 검무에 녹아 있다.
청명은 기이한 감흥에 빠져들었다.
이제 다른 이들에게서는 볼 수 없으리라 여겼던 화산의 옛 검술이 지금 그의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어떤 검술을 익혔냐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의미로 검을 휘두르느냐의 문제다.
그래, 마치…….
"누구냐!"
그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터지더니, 검무를 추던 여인이 돌연 청명을 향해 쇄도해 왔다.
"어?"
청명의 바로 앞까지 들이닥친 여인이 날카롭게 검을 찔러 온다.
"어?"
매서운 검이 청명의 목에 닿는다.
청명은 자신에 목에 닿은 검을 멍하니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감흥은 얼어 죽을.'
이런 아이에게 기척을 들키다니. 매화검존 다 죽었네.
"너는 누구?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 같은데?"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너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