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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63화 (64/1,567)

63화. 장문인! 저놈은 재신(財神)입니다! (3)

"그러니까……."

현종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방에 있는 다른 이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 반응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은 둘뿐이었다.

하나는 현종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황문약.

그리고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은 청명.

"저 아이……. 청명이 황 대인의 병을 치료하고, 상단의 위기를 막아 내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허어."

현종은 청명과 황문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다.

화산의 제자라고는 하지만, 청명은 아직 입문한 지 석 달도 되지 않은 아이이다. 따지자면 이제 겨우 솜털을 벗어난 애송이에 불과한 셈이다.

그런데 그런 아이가 이토록 어마어마한 일을 벌였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정녕 그게 사실입니까?"

의심이 잔뜩 어린 현영의 말에 황문약이 눈을 찌푸렸다.

"재경각주께서는 지금 이 황모가 거짓을 말한다 의심하시는 겁니까?"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현영이 꼬리를 말았다.

황문약과 은하상단의 힘은 지금의 화산으로서는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

더구나 황문약은 과거에도 꾸준히 화산을 후원한 사람이다. 황문약이 없었더라면 화산의 몰락이 배는 빨라졌을 것이다. 그렇기에 전대 장문인도 황문약을 화산의 가장 중요한 객으로 대우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현영이 화산의 재경각주이자 장로라지만, 황문약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이 황모는 그리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현종이 살짝 눈을 찌푸리고 현영을 바라보았다. 현영은 찔끔하여 입을 열었다.

"결코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사과드릴 테니, 황 대인께서는 노여움을 푸시지요."

"음."

하지만 황문약은 쉽사리 불쾌한 얼굴을 거두지 않았다.

물론 정말 기분이 나빠서는 아니다. 거래에 임하는 상인이란 작은 틈도 놓쳐서는 안 되는 법이다. 이걸 호기 삼아 상대를…….

"크흠!"

황문약이 힐끔 헛기침을 나온 곳을 바라보았다. 청명이 대놓고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다.

'거참.'

문파의 장로가 구박받는 것을 도와주려는 삼대제자라니. 이런 광경을 어디서 보겠는가?

청명의 신호를 무시할 수 없었던 황문약이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그때, 운검이 가만히 입을 연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황문약은 잠깐 그의 얼굴을 보다 물었다.

"그쪽은?"

"화산의 운검이라 합니다. 백매관주를 맡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운검도장. 운검도장도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오?"

"그런 게 아니라 근본적인 의문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다른 건 다 그렇다 치고, 청명이 사람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겁니까?"

"……."

합리적인 의문이다.

모두가 두 눈에 의심을 듬뿍 담고 청명과 황문약을 바라본다. 황문약도 할 말이 없어져 슬쩍 청명을 돌아보았다. 이건 그가 아니라 청명이 설명해야 할 일이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설명할 수 있겠느냐?"

"예. 다들 아시다시피 저는 원래 거지였지 않습니까?"

"그렇지."

"거지는 원래 아무거나 주워 먹고,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으니 탈이 나는 경우도 많고 중독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리석은 말! 그 말대로라면 천하 독의 조종은 사천당가가 아니라 개방이 되었겠지."

"특정한 경우에는 그렇습니다. 왜냐면 거지들은 독을 쓸 일은 없지만, 중독을 푸는 방법은 꽤 압니다. 특히나 먹을 수 있는 것과 비슷한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청명이 호흡을 깊게 들이쉬고는 입을 열었다.

"오음초(五陰草)라는 게 있습니다. 겉보기로는 쑥과 거의 똑같이 생겼지만, 극독을 품고 있죠. 눈에 잘 띄지 않아 사고가 나는 경우는 흔치 않지만, 먹을 수 있는 거라면 닥치는 대로 주워 먹는 거지들은 종종 이 오음초를 먹고 중독이 됩니다. 한번 중독이 되면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되지요."

다들 청명의 말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 오음초를 해독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의원에게 데려가도 딱히 방법을 찾지 못하는데, 갈은 무를 먹이면 희한하게도 회복을 합니다."

"그럼 황 대인을 중독시킨 것이 오음초의 독이었다는 말이더냐?"

"예. 증상이 워낙 비슷해서 시험 삼아 한번 써 봤는데, 금세 회복이 되더군요."

"아니……."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무각주 현상이 입을 열었다.

"제가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확실히 개방 쪽에서는 중독에 대한 비전을 꽤나 많이 가지고 있다 하더군요."

"으음, 그런가?"

이걸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이들을 보며 청명이 내심 웃었다.

'물어봐라, 이놈들아.'

당장 개방으로 달려가 진위를 확인한다고 해도 걱정할 게 없었다. 왜냐면 이 말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보급과의 싸움이다. 하지만 어지러운 전선에 제때 보급품이 도착하게 만드는 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전선에 있는 이들은 먹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주워 먹었고, 탈이 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이 오음초에 관한 일도 청명이 전쟁 중에 실제로 겪은 일이었다. 그때 해법을 준 것이 바로 개방의 거지들이다.

황문약을 중독시킨 독은 오음초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이들이 그걸 알 게 뭔가?

'그럴싸하면 되는 거야. 그럴싸하면.'

인생 다 그런 거지 뭐.

"그런 일이 있었다니."

"그럼 확실히 복귀할 수가 없지요. 당장 눈앞에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하루 이틀 늦는 게 대수입니까?"

"큰일을 했습니다. 큰일을 했어!"

다들 더없이 기특하다는 눈으로 청명을 바라본다.

"장문인."

운검이 눈치 좋게 입을 열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벌을 내릴 일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오히려 상을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으음. 과연 그렇다."

현종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하나, 장문인."

운암이 살짝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리 선도를 행했다고는 하나 장문인의 명을 어기고 복귀하지 않은 것은 큰 죄입니다."

"내 명이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하더냐?"

"……그건……."

"죽어 가는 사람을 내버려 두고 제시간에 복귀를 하는 제자를 기특하다 칭찬해야 한다는 말이더냐?"

운암이 입을 다물었다.

"화산은 정도를 추구하는 문파다. 사람을 돕고 살리는 것보다 우선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느냐? 내 하찮은 명령이 협의를 세우는 것보다 중요하더냐?"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운암이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뒤로 뺐다.

그 와중에 운암과 현종이 살짝 눈빛을 교환한다. 운암이 먼저 운을 뗐다가 현종이 노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이걸로 다른 이들도 청명의 죄를 논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의도를 짐작한 현종이 운암에게 살짝 눈길을 주고는 청명을 돌아보았다.

"청명아."

"예, 장문인."

"고생했다."

"예."

청명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대충 상황이 정리된 것 같자 황문약이 운을 떼기 시작했다.

"저와 은하상단은 화산에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는 청명도장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청명도장은 이 모든 것은 화산의 가르침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라며 모든 것을 화산의 공으로 돌리더군요."

"허어!"

"저 아이가."

"도기로다. 참으로 도기로다."

황문약이 살짝 고소를 머금었다.

'챙길 건 다 챙겼지만 말이지.'

하나 사실 그대로 말할 수는 없는 법. 은하상단과 황문약의 입장에서도 화산에서 청명의 입지가 탄탄해지는 쪽이 좋다.

뻔한 거짓말을 뻔뻔한 얼굴로 받아 내는 청명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웃음을 참기가 힘이 든다.

"그렇기에 화산에 대한 은혜도 갚을 겸, 화산에 조금 투자를 해 보고 싶습니다."

"지금 투자라고 하셨소?"

"예. 투자라는 말은 조금 어울리지 않는군요. 후원이라는 말이 조금 더 명확합니다. 투자는 돌려받을 것을 전제로 하지만, 후원은 돌려받지 않아도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이제껏 화산에 주신 것도 감사한데……."

"장문인."

황문약이 가만히 현종을 바라보며 말했다.

"겨우 그 정도로 입을 닦을 생각이었다면 제가 식솔들을 이끌고 이곳까지 직접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화산에 제 모든 것을 걸어 보고 싶습니다."

현종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화, 황 대인?"

놀란 현종의 반문에도 황문약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상단의 실무진들을 데리고 왔으니 천천히 논의해 보십시다. 화산에 무엇이 필요하고 저희가 무엇을 해 드리면 좋을지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황 대인."

"제게 감사하실 일이 아닙니다. 구명지은을 갚기에는 모자랍니다."

황문약과 현종의 시선이 동시에 청명에게로 향했다.

현종이 더없이 흐뭇한 얼굴로 입을 연다.

"네가 화산에 복을 가져오더니 이제는 화산의 귀인을 도와 화산의 이름을 퍼뜨리는구나. 본도가 부끄러울 지경이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가 화산에서 배운 게 아니었다면, 어찌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었겠습니까?"

황문약이 감탄했다.

'연기가 물이 올랐군.'

저 물 흐르는 듯한 언변을 보라. 아주 그냥 기름이 좔좔 흐른다.

"그럼 재경각주와 운암은 자리에 남고, 나머지는 그만 나가 보거라."

"예, 장문인."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청명은 조금 후에 다시 부를 테니, 멀리 가지 말고 기다리거라."

"예."

청명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사람들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무각주 현상이 청명의 어깨를 두드린다.

"고생했다. 정말 고생 많았다."

"에이. 뭐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요, 뭐."

"대단하지. 어찌 그게 대단한 일이 아니더냐. 허허. 사람을 구한 것만으로도 기특하건만, 그게 황 대인이라니! 정말 화산에 복덩이가 굴러들어 왔구나!"

굴러들어 온 건 니들이지.

나는 원래 여기 박힌 돌이었고.

굴러들어 온 주제에 주인임을 주장하는 어린(?) 놈들을 보며 청명이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래. 기분 좋다는데 내가 뭘 어쩌겠냐.

그때, 운검이 조금 딱딱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청명아."

"예, 관주님."

"네가 좋은 일을 했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처리가 서툴렀던 것 역시 사실이다. 특히나 아무런 말도 없이 화산을 빠져나간 것을 확실한 잘못이다."

"제자가 마음이 급해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그럴 수 있지. 다음부터는 조심하거라. 이번 일은 네 생각 이상으로 위험했다."

"예, 주의하겠습니다."

"네가 장문인의 명을 어긴 것 역시 사실이다. 어찌할 수 없다는 변명으론 매번 면피할 수 없다."

"예."

청명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보이지 않게 입술이 불툭 튀어나온다.

'얘는 애가 왜 이렇게 고지식해?'

이렇게까지 해 줬는데! 더 안 해 줬다고 난리라니!

하지만 삐뚤어졌던 청명의 마음은 고개를 들어 운검의 얼굴을 보는 순간 풀렸다.

운검의 입가가 실룩인다. 자꾸만 지어지는 미소를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다.

"크흠, 흠. 항상 정진해야 한다."

'애쓴다.'

다른 이들도 제각기 다가와 청명의 어깨를 두드리고, 그의 공을 치하했다. 청명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황 대인이라는 존재가 화산에 큰 모양이었다.

하기야 돈을 주는데.

원래 돈 주는 사람이 최고인 법이다.

"이제는 화산도 운이 풀리려는 모양이다. 연이어 좋은 일만 이어지는구나."

그게 화산이 운이 풀린 거냐?

내가 화산에 온 거지.

청명이 남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핏덩어리들을 데리고 언제 화산을 일으키나.

'아이고 사형. 나도 이제 허리가 아프오.'

하늘 위에서 청문이 빙그레 웃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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