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소도장은 정말 도사인가? (3)
마기는 마치 의지가 있는 것처럼 황문약의 머리에 뭉쳐 들어 항전을 준비했다.
'이거 함부로 못 건드리는데.'
골치 아픈 일이다.
어설프게 공격해 들어갔다가 머리에서 충돌이라도 벌어진다면 황문약은 깔끔하게 저승사자와 인사를 나눠야 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지금쯤 청명의 등 뒤에서 저승사자가 혀를 차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나면?
'그건 더 망하는 일이지.'
황문약의 머리 아래는 완벽할 정도로 정화되었다. 하지만 그게 꼭 좋은 소식은 아니다. 정화된 육체는 더 빠른 속도로 마기를 받아들일 테니까.
맑은 물에 먹물을 풀면 순식간에 번져 나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진격해도 죽고, 물러나도 죽는다.
사면초가에 빠진 청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잠시간 망설였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성질 같아서는 당장에 돌격해 버리고 싶지만, 성질대로 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가 너무 뻔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청명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렇단 말이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고?
그럼 둘 다 안 해 버리면 그만이지!
청명이 기운을 한쪽으로 몰았다. 쥐는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고, 배수진을 친 군사는 죽는 그 순간까지 결사의 항전을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달아날 틈이 있다면 어떨까? 쥐는 달아나고, 군사는 무기를 버린 채 퇴각한다.
'자, 여기에 달아날 곳이 있다.'
청명이 길을 열었다.
황문약의 몸에는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다. 하지만 한 곳. 딱 한 곳 달아날 구멍이 있다.
바로 청명의 몸.
내력을 한쪽으로 몰고 머리를 슬슬 압박하자 아니나 다를까 마기들이 빈 곳을 찾아 봇물 터지 듯 밀고 나오기 시작한다. 이윽고 황문약의 몸에 닿은 청명의 손을 타고 넘어온다. 황문약에게로 내력을 모두 보내서 청명의 몸은 비어 있으니 도망치기에 더욱 안성맞춤이다.
"으……."
절로 신음이 새어 나온다.
팔을 타고 저릿저릿한 감각이 밀려오더니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끔찍한 고통과 함께 눈이 흐려지고 의식이 멀어져 간다.
"큭!"
청명이 황문약의 몸에서 자신의 내력을 회수했다. 그리고 내력을 자신의 전신으로 퍼뜨리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
몸 안에서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더는 갈 곳을 잃은 마기들이 결사의 항전을 시작한다. 하지만 청명의 내력은 그 정갈함이 무색할 정도로 무자비하게, 점령군처럼 마기들을 진압했다.
육체 곳곳이 전장으로 변한 상황.
쾅! 쾅! 쾅!
몸 안에서 폭음이 울린다. 한 번의 폭음이 터질 때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청명을 괴롭혔다. 하지만 청명은 핏발 선 눈으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여기에서 의식을 잃는다?
'웃기지 마.'
매화검존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청명은 그 자리에 꿋꿋하게 서서 마지막 폭음을 기다렸다. 최후의 최후까지 남은 마기를 청명의 내력이 덮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천붕지음(天崩之音)이 터진다.
시야가 새하얗게 변하고 의식이 아득하게 멀어진다. 청명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마기를 완전히 제압한 내력이 승전보를 울리며 전신을 휘돌기 시작한다.
한 바퀴. 두 바퀴.
순식간에 십이주천을 끝낸 내력이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 단전으로 돌아가 얌전히 똬리를 틀었다.
그 모든 과정을 끝내고서야 청명이 눈을 뜬다.
"끄으으으응. 뒈질 뻔했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위험했다.
본디 이만한 마기는 청명의 수준에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조금만 실수했어도 청명이나 황문약, 둘 중 하나는 죽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진짜 위험했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아야지.'
청명이 자신의 단전 어귀를 슬슬 문질렀다.
"근데 뭔가 좀 늘어난 것 같기도 하고."
딱히 늘어날 이유가 없는데 뭔가 단전이 빵빵한 느낌이 난다.
"……그래 봐야 쥐꼬리지, 뭐."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을 확실하게 실천하고 있는 내력이었지만, 작은 건 작은 거다. 이걸 언제 대하(大河)처럼 채울 수 있을지 까마득하기만 하다.
한숨을 내쉰 청명이 고개를 돌려 황문약을 바라보았다. 독기가 사라져서인지 얼굴에 홍조가 어려 있다. 순식간에 건강을 되찾은 모양이다.
그렇겠지.
단순히 독기만 사라진 게 아니라 벌모세수를 받았으니까. 환골탈태를 한 것에 비할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수명이 십 년은 늘어났을 것이다.
"쯧."
괜히 남 좋은 일만 시켜 줬다는 생각에, 청명은 혀를 차며 황문약에게 다가갔다.
"으으……. 으."
의식을 되찾는 모양이다.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싶더니, 이내 서서히 눈을 떴다.
초점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던 황문약의 눈동자가 청명에게 와 닿는다.
이내 황문약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구요."
청명이 빙그레 웃었다.
"신선."
"……."
"아니, 소신선?"
"……."
황문약이 힘없이 뇌까렸다.
"내가 죽어 지옥에 왔나 보구나."
"……."
뭐 인마?
* * *
황문약이 의식을 찾은 이후, 은하상단은 빠르게 정리가 되었다.
황문약을 시해했던 번자복은, 계획에 성공하면 그다음엔 황종의를, 나아가 자식까지 죽일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황가의 모든 핏줄이 같은 병에 걸려 천천히 죽어 간다면 세인들은 황가가 저주를 받았거나 괴이한 질환에 걸렸다고 믿을 테니, 의심을 피할 수 있다는 계획이라 했다.
실제로 그 계획은 꽤 잘 맞아 떨어졌다. 만일 황문약이 급사했다면 모두가 의심을 했겠지만, 1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시름시름 앓았다 보니 아무도 살인일 거라 짐작하지 못했다.
심지어 당가가 독이 아님을 공증해 주지 않았는가?
청명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총관의 계획대로 황가는 모두 명이 끊기고 총관이 황가의 재산을 꿀꺽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총관 번자복이 예전 황문약과 경쟁했던 상가의 자제라는 사실과 함께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슬픈 이야기를 읊어 댔다지만, 그건 청명이 알 바 아니고.
"죄 지으면 맞아야지.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청명이 유일하게 관심을 가졌던 건 단마수의 출처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상행을 가던 중 깊은 산속에서 맞닥뜨린 시체에서 발견된 비급이라 했다.
청명은 김이 팍 새 버렸다.
'하기야, 마교 놈들이 일을 저질렀으면 이리 허술할 리가 없지.'
아니, 그보다 이리 신중하고 얌전하게 일을 처리했을 리가 없지. 거슬리면 일단 엎어 버리는 게 그놈들 아니던가.
어쨌든 결론적으로 보면 흉수도 잡았고, 황 대인의 병도 치료했으며, 마교가 얽히지 않았다는 것까지 확인했으니 모든 것이 좋게좋게 흘렀다고 할 수 있다.
덕분에 은하상단의 은인이 된 청명은 귀한 손님 대접을 받게 되었다.
아주 귀한 손님 대접 말이다.
"으음."
황문약이 가볍게 자리에 앉았다.
"아버님. 아직 거동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병상을 털고 일어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괜찮다. 내 오래 누워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쓰러지기 전보다 힘이 더 넘치는구나."
"그래도……."
"걱정할 것 없다."
황종의가 미심쩍은 눈으로 황문약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황문약의 꼴은 목내이나 다름없었다. 금방이라도 픽 하고 쓰러져 가야 할 곳으로 홀연히 떠날 것 같은 꼴을 하고는 힘이 넘친다니.
"그보다."
황문약이 고개를 들어 청명을 바라본다.
"……청명 소도장……이시지요?"
"네. 그때 뵙지 않았나요?"
"그때와는 인상이 조금 달라진 듯합니다만."
"아. 워낙 잘 먹어서."
청명이 포동포동한 손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그 광경을 보는 이들의 눈이 다들 미묘하게 흔들렸다.
'사람이 두 배가 됐는데.'
'대체 삼 일 동안 얼마나 잘 먹었기에 옷이 터지려고 하는 거지?'
'얼굴에 기름이 좔좔 흐르는 것이 부처님이 따로 없구나. 불가로 갔으면 대성했을 것을, 왜 도가로 가서는.'
'숙수가 죽는소리를 하더니, 이유가 있었구나.'
단 삼 일 만에 덩치를 두 배나 불려 버린 청명을 보며 다들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그나마 황문약만이 평온한 안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노회한 상인인지를 보여 주는 듯이 말이다.
"먼저 인사를 받으시지요."
황문약이 그 자리에서 넙죽 엎드렸다. 이에 화들짝 놀란 황종의가 그를 일으키려 했지만, 살짝 고개를 든 아버지의 준엄한 눈빛을 받고는 말없이 뒤로 물러섰다.
눈빛만으로 황종의를 물려 버린 황문약이 다시 고개를 숙이고는 입을 열었다.
"소도장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에헤이. 일어나세요, 일어나세요."
갚을 길이 없기는 왜 없어. 너무 많아서 문제지.
청명의 말에 황문약이 천천히 허리를 세우고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간의 이야기는 종의에게 들었습니다. 도장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입니다. 짐승도 저를 구해 준 은혜는 아는 법인데, 사람으로 태어나 은혜를 잊는다면 짐승만도 못한 것이겠지요."
아이쿠. 말 잘한다.
그렇지. 그렇지.
황문약이 가만히 청명을 보며 말했다.
"구명지은을 갚을 방법이 세상에 있겠냐마는, 할 수 있는 한 도리는 다해 보고 싶습니다. 혹여 은인께서 원하는 것이 있으시면 제게 기탄없이 말씀을 해 주십시오."
"아. 원하는 거요."
"예."
"하하. 도인의 몸으로 어찌 사람을 구하고 보답을 받겠습니까. 사문에서 알면 큰일이 납니다."
"보은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 법입니다. 도를 추구하는 분께 구함을 받았다 해서 은혜를 흘려 넘긴다면 세상 사람들이 이 황모를 비웃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마음은 잘 알겠지만……. 사문에서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이곳에 사문의 허가 없이 온 터라."
"……사문의 허가 없이요?"
"예. 워낙 다급한 일이라, 사문의 허가를 받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황문약이 감동한 눈으로 눈앞의 어린 도인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사문의 담을 넘었다는 말일진대,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까지!"
"말씀드렸다시피 워낙 다급한 일이라."
황문약은 감동을 받았고 황종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거 엄청 여유로워 보이던데.'
하지만 감히 아버지 앞에서 입을 열 수가 없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황문약이 흐뭇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문제는 제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도장. 제가 사문에는 알리지 않을 터이니, 원하는 것을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성심성의껏……."
"약속했어요?"
자신의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청명의 목소리에 황문약이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무엇을?"
"사문에는 알리지 않기로 약속한 거예요."
"아……. 물론입니다. 제가 그래도 장사꾼인데, 그런 눈치도……."
이번에도 황문약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청명이 소매에서 서책 한 권을 꺼내더니 펼쳐 들었다.
황문약이 그 서책을 빤히 보고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 서책은?"
"아. 별거 아니에요. 저도 나이를 먹다 보니 기억력이 가물가물해서."
나이를 먹어?
네가?
청명이 씨익 웃으며 서책을 살짝 흔들었다.
"좀 적어 왔어요."
"……뭘?"
"원하는 걸 말하라면서요."
"그랬죠."
"그래서 적어 왔다니까요."
아.
그러니까.
……그 책이? 전부?
손가락에 침을 묻히고 책장을 넘긴 청명이 씨익 하고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자, 그럼 시작하면 되나요?"
"……."
"지금?"
"……."
아무래도 자신이 큰 말실수를 한 것 같다고 생각하는 황문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