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소도장은 정말 도사인가? (2)
총관은 오래 지나지 않아…….
아니, 생각보다 오랜 시간 후에 제압되었다.
자신만만하게 뛰어든 이송백과 총관은 나름 합이 맞는 사이였는지, 무려 한 시진을 넘게 필사의 대결을 펼쳤다.
다른 이들에게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 넘치는 대결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청명에게는 지루하다 못해 하품이 나오는 대결이었다.
'그냥 내가 팰 걸 그랬나.'
하지만 초주검이 되어 땀을 뻘뻘 흘리는 이송백을 보고 있자니 차마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총관을 제압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운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은가.
땀이나 좀 닦지…….
"휴, 흉수……. 커흑, 흉수……. 흉수를 제압했습니다."
황종의가 자신의 앞에 와 숨넘어갈 듯 말하는 이송백을 보며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뭐랄까.
한마디 쏘아 주고 싶기는 한데, 후들거리는 다리를 보니 그저 안쓰럽다.
"고생했네. 은하상단은 종남의 도움을 잊지 않을 걸세."
"가, 감사……. 감…… 감사."
"좀 쉬게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송백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평소 같았으면 그래도 최선을 다해 흉수를 제압해 준 이송백에게 조금의 감사함이라도 생겼으리라. 하지만 지금 황종의에게 이송백의 모습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황종의가 연신 청명을 힐끔거렸다.
'대체 이 상황을 뭐라고 해야 할지.'
청명이 이곳에 등장한 지가 이제 겨우 이틀이나 되었는가?
황종의가 일 년 가까이 끌던 문제를 청명은 불과 이틀 만에 더없이 깔끔하게 해결해 버렸다.
'이렇게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던가?'
그럴 리가.
황종의는 알고 있다.
세상 모든 일은 지나고 나서 보아야 별게 아니다. 이 일이 애초부터 그리 간단한 것이었다면, 왜 지금까지 아무도 흉수의 존재조차 알아채지 못했겠는가?
'마치 저 작은 아이의 안에 노회한 노고수가 숨어 있는 것 같군.'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이제 대충 해결된 것 같은데요?"
"대체 왜 총관이 아버님을 노린 건가?"
"저야 모르죠."
"짐작했기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인 게 아닌가?"
"아닌데요?"
"……."
황종의가 조금 멍해졌다.
그런 황종의의 심경을 짐작한다는 듯 청명이 태연하게 말했다.
"이유를 밝히는 건 관아가 할 일이고, 제가 할 일은 문제를 해결하고 보상을 받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하는 말인데, 보상은 충분히 준비되셨겠죠?"
보통은 아무리 공을 세웠다고 해도 이리 당당하게 보상을 요구하지는 못하는 법이다. 사람이란 기본적으로 체면을 따지는 존재이니까.
하지만 청명에게는 더 이상 챙길 체면이 없었다. 매화검존에서 바닥에 떨어진 매화 잎을 비질하는 삼대제자 처지가 됐는데 그에게 챙길 체면이 뭐가 있겠는가?
황당할 만도 하건만 황종의도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네. 하지만 자네도 하나를 잊고 있군. 아직 문제는 하나도 해결이 되지 않았네. 나는 자네에게 흉수를 잡아 달라고 한 적이 없어. 내가 원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일세. 자네가 할 수 있겠는가?"
청명이 살짝 배를 내밀었다.
"그거야 두말하면 잔소리죠."
더없이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황종의가 단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내 상단의 모든 힘을 동원하는 한이 있더라도 화산을 지원할 것을 약속하네."
청명이 감격한 듯 황종의의 손을 꽉 붙잡았다.
황종의가 청명의 마음을 짐작한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그리 감격할 것 없네. 당연한……."
"농담하세요?"
"……응?"
청명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보상은 화산이 아니라 나한테 해 줘야죠!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사람이 버나?"
"……."
황종의의 말문이 막혔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배는 더 미친놈인 것 같았다.
* * *
침상에 누운 황문약 앞에 선 청명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이제 황문약 치료에만 성공한다면 이곳의 일은 모두 해결된다. 그러고 나면 룰루랄라 휘파람을 불며 사문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완벽하게 처리됐다.
딱히 힘든 것도 없었고. 그 과정에서 저 종남 놈들을 골탕 먹였다는 것까지 마음에 든다. 더없이 마음에 든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단 하나의 문제가 있다면…….
'솔직히 자신 없는데.'
여기까지야 어떻게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황문약을 고친다는 건 냉정하게 말해서 가능할지 불가능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의 청명이 아니라 매화검존 청명이었다면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그만큼 마화에 대해 잘 아는 이도 없었고, 그만큼 선기 가득한 내력을 흘러넘칠 만큼 지닌 이도 없었으니까.
아무리 마화가 지독하다고는 해도 결국은 마기로 인해 비롯되는 일. 대해와 같은 청명의 내력으로 마기를 모조리 지워 버리면 그만인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청명은 매화검존이 아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과거보다 더욱 정순해진 대신 이제 겨우 밤톨만 해진, 극소량의 내력뿐이다.
이걸로는 황문약의 몸 안에 퍼진 마화를 모조리 제거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오히려 괜히 어설프게 건드려 마기가 발작이라도 일으키면 쇠약해진 황문약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즉사하고 말 것이다.
"이걸로 될까?"
해 보지 않고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청명은 다시금 입맛을 쩝 다시고는 황문약에게 다가갔다.
결과를 모른다면 해야 할 것은 하나다.
이대로 둔다면 황문약은 죽는다. 아무리 청명이 막가는 인생이라지만 그 근본은 도인(道人)이 아닌가? 능력이 부족하다 해서 죽어 가는 이를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잘못되더라도 원망 마시고."
잘된다면 서로 좋은 거니까.
청명이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황문약의 단전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천천히 황문약의 몸속으로 내력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단전에서 잠자고 있던 청명의 내력이 천천히 흘러나온다.
과거 청명의 내력은 마치 유유히 흐르는 강과도 같았다. 때로는 거센 격랑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세상을 담는 대해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청명의 몸을 타고 오르는 내력은 그때와는 확연히 성질이 다르다.
맑다.
티 없이 맑다. 마치 심산유곡을 흐르는 청정수처럼,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맑음이었다.
그 맑디맑은 기운이 마기에 절어 있는 황문약의 몸으로 밀려들어 갔다.
우우우웅.
황문약의 몸이 미미한 경련을 일으킨다.
음습하기 짝이 없는 마기들은 감히 청명의 내력을 침범하지 못했다. 내력이 닿는 곳마다 화들짝 놀라 물러서기 바쁘다.
'호오?'
청명이 마음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신기하네.'
내력으로 마기를 다스린 경험은 꽤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난생처음이었다.
마기가 왜 마기인가?
흐름을 역행하기 때문에 마기라 불리는 것이다. 타인의 몸에 침투한 마기는 마치 독처럼 육체를 파괴하며, 모든 기운을 적대시하고 밀어낸다.
하지만 지금 황문약의 몸을 채운 마기들은 청명의 내력으로 달려들기는커녕, 불을 본 짐승처럼 달아나기 바빴다.
'이거 잘하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지!
'내가 이거 모은다고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정순함에 집착하지 않고 그냥 평범하게 했더라면, 벌써 십 년 치 이상의 공력을 모으고도 남았을 청명이다. 그는 이미 이 갑자에 가까운 공력을 모은 경험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청명의 단전을 메운 내공의 양은 일 년 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나마도 설매단을 먹었기에 이 정도나마 채울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겨우 일 년 치의 내력이 장판파의 조자룡처럼 단기필마로 마기의 대군을 밀어 내고 있다.
'이건 나도 예상 못 한 일인데.'
처음에는 그저, 지난 생보다 더 뛰어난 경지에 올라 보기 위해 더없이 정순하고 완벽한 토대를 쌓으려 한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그놈의 정순함에 대한 집착이 심해져 진도가 너무 느려졌다.
이제는 슬슬 이 집착을 버려야 하는가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생각해 보면 이건 당연한 건데.'
선기는 기본적으로 마기와 상극이다. 파사(破邪)의 기운을 담은 선기는 세상의 모든 부정한 것을 정화하는 힘을 가졌다. 청명의 기운은 기본적으로 선기(仙氣). 그중에서도 가장 정순한 선기다.
그러니 마기 따위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법.
지독한 마기가 순식간에 중화되기 시작한다.
청명도 어이가 없을 만큼 쉽게 마기가 힘을 잃고 무(無)로 돌아간다.
청명의 내력이 황문약의 마기를 중화해 냄과 동시에 세맥을 씻어 내기 시작한다. 마기뿐 아니라 작은 불순물 하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과격하게 육체를 정화한다.
마치 벌모세수를 하는 것처럼.
'이건 또 뭔 상황이야.'
천고의 영약과 극강의 고수가 몇은 있어야 시도라도 해 볼 수 있는 일이 벌모세수다. 이미 탁기가 쌓여 버린 육체를 갓난아이의 몸처럼 완전히 순수한 상태로 되돌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고수가 너무 많아서 웬만한 화경의 고수는 비질이나 해야 하고, 영약이 너무 많아 옮기던 영약이 굴러떨어져 개가 물어 가도 굳이 찾으려 들지 않는다는 소림에서도 웬만해선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게 바로 벌모세수다.
하지만 지금 청명은 혼자의 힘으로 마기로 쇠약해진 노인을 벌모세수 하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딱히 청명이 의도한 결과는 아니라는 게 문제긴 하지만 말이다.
우우우우우웅.
황문약이 몸이 미세하기 떨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이 새하얀 백색과 시커먼 흑색으로 동시에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청명의 내력이 잠식한 영역은 백색으로 물들어 가고, 마기가 아직 잠식하고 있는 영역은 금방이라도 먹물이 흘러나올 듯 검게 물들어 간다.
마기 역시 영역을 침범한 침입자에게 필사적인 저항을 하는 중이었다.
'버텨!'
순식간에 전쟁터로 화해 버린 황문약의 육체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의식이 없는 게 분명함에도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고 입가로 피가 역류한다.
검붉은 피가 황문약의 앞섶을 적시는 걸 본 청명이 이를 악물었다.
이건 청명과 마기의 싸움이 아니었다.
그가 마기를 모조리 제거하기까지 황문약이 버텨 주냐가 관건인 싸움이었다.
'단번에 끝낸다!'
황문약의 몸 상태를 생각해서 주저하다 보면 부담만 가중될 뿐이다. 차라리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도박을 해 보는 쪽이 낫다.
결심을 굳힌 청명이 기운을 끌어 올렸다.
마지막 한 줌의 내력까지 남김없이 황문약의 몸 안으로 밀어 넣는다. 청명의 이마에서도 굵은 땀방울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황문약의 몸속, 청명의 내력이 마기들을 가열하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걸리는 대로, 닥치는 대로 빨아들여 중화하고 주변의 불순물들까지 녹여 낸다. 그와 동시에 비좁게 막혀 있던 황문약의 세맥들을 대로처럼 확장시킨다.
치열하게 저항하던 마기들이 기세를 잃고 한쪽으로 몰려가기 시작한다. 그 방향을 본 청명이 기겁을 했다.
'아, 안 돼!'
머리.
갈 곳을 잃은 마기가 청명이 내력을 주입하는 단전의 반대 방향으로 밀려난다. 순식간에 황문약의 머리가 새카맣게 물들며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