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소도장은 정말 도사인가? (1)
"잡았다. 요놈!"
청명이 씨익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손목을 잡힌 흉수가 당황한 얼굴로 손을 빼려 했지만, 청명이 순순히 그 손을 놓아 줄 리가 없었다.
"이놈!"
흉수가 재빨리 반대 손을 들어 올려 청명을 내리치려 한다. 하지만 그 순간 문이 활짝 열리더니 방 주변이 환하게 밝아졌다.
황종의였다.
저벅. 저벅.
그는 굳은 얼굴로 걸어 들어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떼었다.
"거기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총관?"
"……."
청명에게 손을 잡힌 은하상단의 총관, 번자복(樊子服)이 당혹하여 뒤를 돌아본다.
"소, 소단주님!"
"내 지금 자네가 무엇을 하는 건지 묻고 있네."
번자복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는 그저 소도장의 상태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 말에 대한 대답은 황종의가 아니라 청명에게서 나왔다.
"아, 확인하고 죽이시려고?"
청명이 붙들고 있던 총관의 손을 흔들었다.
"뭔가 오해가……."
"오해? 저도 오해 좋아하죠. 읏차!"
청명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번자복이 대경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본다.
"부, 분명 큰 부상을 입었다고……."
"오해였던 모양이네요. 이렇게나 멀쩡한데."
"……의식이 없었는데."
"아. 최근에 잠을 잘 못 자서요. 간만에 푹 잤네요."
번자복이 이를 갈았다.
"나를 속였구나."
"에이. 그런 말 하시면 안 되죠. 지금 최대한 오해라고 우기셔야지. 그런 말 하면 아저씨가 뭔가 꾸몄다는 게 드러나 버리잖아요."
"이!"
번자복이 잡히지 않은 좌수로 청명을 후려쳤다. 하지만 청명은 깔끔하게 그 손을 피해 내며 번자복의 손을 놓고 침상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종의를 향해 걸어갔다.
"거보세요. 나올 거라고 했죠?"
"……으음."
황종의가 무거운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말을 반신반의하긴 했지만, 결과가 이러니 내 할 말이 없군. 하필이면 가장 아닐 거라 믿었던 총관이 흉수였다니."
번자복을 노려보는 황종의의 눈은 더없이 차가웠다.
그 눈빛을 본 번자복은 어떤 변명도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청명을 노려본다.
"어떻게 나를 의심했지?"
"의심 안 했어요."
"……뭐?"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흉수가 누구일 거라고 짐작한 적 없어요. 내가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걸 알겠어요. 그냥 대충 황 대인을 치료할 줄 아는 척하고 상처 입어 드러누워 있으면 날 죽이러 올 거라 생각했죠."
"……내가 오지 않았다면?"
"올 수밖에 없죠."
청명이 피식 웃는다.
"처음 한 명을 죽이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두 명부턴 별로 어려울 게 없거든요. 그리고 지금 나를 죽이게 되면 종남에 모든 죄를 덮어씌울 수 있는데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있겠어요?"
"종남과도 미리 입을 맞추어 놓은 거로군?"
청명이 뚱한 얼굴로 번자복을 바라본다.
"아닌데요?"
일그러져 있던 번자복의 얼굴이 순간 멍해졌다.
"……아니라고?"
"네. 걔들은 그냥 시비를 건 거예요. 안 그래도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 중이었는데, 딱 상황을 만들어 주더라구요. 고맙게도."
번자복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내상은! 다른 건 몰라도 의원이 분명 기식이 엄엄할 정도로 내상을 입었다고 했다!"
"평범한 의원 하나 속이는 게 어려웠으면 시작도 안 했죠. 거 자꾸 뻔한 것만 물어보시네."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궁금한 게 많은 것 같은데, 아저씨의 궁금함을 푸는 게 중요한 게 아니죠. 중요한 건 아저씨가 함정에 걸렸다는 거고, 나는 황 대인을 시해한 흉수를 찾았다는 거죠."
"하하하하하."
그러자 별안간 번자복이 파안대소하며 고개를 돌려 황종의를 바라본다.
"소단주. 설마 저 어린놈의 말을 믿으시는 건 아니겠지요?"
"……내가 믿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영명하신 소단주답지 않으십니다. 저 아이의 논리에는 중요한 것이 빠져 있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
번자복이 고개를 끄덕인다.
"예. 제가 저 아이를 해치려 했다는 게, 가주 시해의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대체 제가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가주께서 제게 해 주신 게 얼만데. 그러니 소단주께서도 저를 의심하지 않으셨던 것 아닙니까?"
"으음."
황종의가 침음을 흘렸다.
뻔한 변명이기는 하지만, 분명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럼 대체 왜 소도장을 죽이려 했는가? 자네가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은 왜 숨겼고?"
"저 아이가 소단주를 현혹하고 있지 않습니까! 천하의 명의들도 단주님을 고치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저 어린놈이 어찌 단주님을 고친다는 말입니까?"
"그럼 설득했어야지!"
"제가 설득하면 들으셨겠습니까? 혼이 나가 버렸는데? 미혹된 이는 결코 타인의 말을 듣지 않는 법이외다! 저 아이를 죽여 없애는 것이 소단주를 정신 차리게 할 유일한 방법이었소! 그래야 단주님에 대한 치료도 이어 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순간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종의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소란을 듣고 몰려든 하인들이 저마다 숙덕거리며 말을 나누고 있었다. 총관 번자복의 말이 그리 틀리지 않았다는 말을 나누고 있는 듯했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으나 시선과 표정이 그러했다.
그만큼이나 번자복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말 다 했어요?"
하지만 그때 청명이 분위기를 끊으며 앞으로 한 발 나섰다.
"……."
번자복이 청명을 노려본다.
"내가 너를 죽이려 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결코 단주님을 시해한 적이 없다. 너 역시……."
"아아."
청명이 가볍게 손을 내저어 번자복의 말을 끊는다.
"됐어요, 됐어. 이유 같은 건 알고 싶지도 않고, 변명도 별로 듣고 싶지 않아요. 뭐 하러 귀찮게 그런 짓을 해요."
"뭐……?"
"그냥 패면 될 걸!"
누가 미처 말리기도 전에 청명이 재빠른 속도로 번자복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고는 그의 머리를 노리며 우수를 쭉 뻗는다.
비단 폭 가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청명의 손이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날아드는 손에 담긴 힘을 짐작한 번자복이 대경하며 우수를 마주 뻗어 청명의 손을 막아 낸다.
촤아아아악!
두 손이 서로 교차하며 청명이 뒤로 훌쩍 물러난다.
"자, 주목!"
그리고 우수를 위로 번쩍 들어 올린다.
"저, 저거!"
뻗어진 그의 손을 본 이들은 하나같이 제 눈을 의심했다.
청명의 손목 인근에 찍힌 검은 손자국이 너무도 선명하다. 그 손자국은 새하얗게 변하며 사라지나 싶더니 이내 청명의 손목 전체를 붉은색으로 물들어 버렸다.
모두가 숨죽이며 그 광경을 바라보는 가운데, 청명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단마수(丹魔手)라는 거죠."
청명이 살짝 손을 흔든다. 모두 똑바로 보라는 듯이 말이다.
"경지에 오른 단마수에 적중된 이는 한 식경도 버티지 못하고 전신이 검붉게 물든 채 죽어요. 물론 이 양반 건 그 정도는 아니긴 한데, 이 정도 수준으로도 사람을 죽이는 데는 무리가 없죠. 특히나 상대가 무공을 익히지 않은 평범한 노인이라면 식은 죽 먹기보다 쉽겠죠."
"……."
뭔가 어물거리던 번자복이 목에 힘을 주는 순간 청명이 틈을 주지 않고 선수를 쳤다.
"황 대인의 곁에서 누구에게도 의심을 받지 않으며 계속 단마수의 공력을 주입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신 말고 또 있다면, 범인이 아니라는 말을 믿어 드리죠."
그 말이 결정타였다.
지켜보던 이들의 눈에 노기가 어린다. 백문불여일견이라 하지 않는가? 이곳의 그 누구도 번자복의 말을 자신의 눈보다 더 신뢰하지는 않을 것이다.
청명의 오른손에서 드러난 변화는 지금 병상에 누워 있는 황 대인의 증상과 너무도 똑같다.
"저, 저! 은혜도 모르는 개 같은 놈이!"
"감히 단주님을 시해하고도 그 옆에서 뻔뻔스럽게 총관 짓을 했다는 말인가!"
"저 때려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
모두의 분위기가 바뀌었듯 황종의 역시 더는 흔들리지 않았다.
"초옹과아아안!"
분노한 그의 목소리가 은하상단을 쩌렁쩌렁 울렸다.
"지금 당장 총관을 제압하라! 반항한다면 죽여도 좋다!"
황종의의 명령에 하인들이 우르르 방 안으로 밀려든다. 그러자 입술을 질끈 깨문 번자복이 밀려들어 오는 이들에게 장력을 쏘아 댔다.
"아악!"
"어억! 윽!"
방 안으로 들어오던 이들이 번자복의 장력에 격중되어 나가떨어진다.
"빌어먹을, 이제 거의 끝났는데!"
번자복이 원독에 찬 눈으로 청명을 노려본다.
"이 애새끼만 아니었어도!"
"거 듣는 애새끼 기분 나쁘게."
청명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원래 애새끼도 아닌데, 애새끼라는 욕을 먹고 있으니 기분이 두 배로 나쁘다.
"이제 조금만 있었으면 복수가 끝나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진즉에 그 목숨을 끊어 버릴 것을! 저 멍청한 소단주 놈을 구슬릴 생각만 하지 않았……."
"아아."
청명이 손을 내젓는다.
"뭐 당연히 구구절절한 사정이 있겠지만, 그건 나중에 관아에서 이야기하시고. 지금은 빨리 끝내죠. 자다 일어나서 좀 졸리거든요. 아저씨 때려눕혀 놓고 얼른 마저 자야겠어요."
"때려눕혀?"
번자복이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핫! 이 어린놈이 방자하기 이를 데 없구나.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익힌 무학이 단마수라고 네 입으로 말해 놓고도 감히 나를 때려눕힌다는 말을 하는 게냐? 네가 나를?"
"아뇨."
"……어?"
"에이. 제가 어떻게 그런 걸 합니까. 그런 일을 할 분은 따로 계시죠. 저기저기."
청명이 뒤쪽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된다.
"……나?"
뒤쪽에서 멍하니 상황을 바라보던 이송백이 얼떨떨하게 손가락으로 제 얼굴을 가리킨다.
"나?"
"크으. 종남의 영웅께서 마두를 제압하러 오셨군요. 상처 없이 잘 부탁합니다."
"아, 아니 내가?"
"그럼 여기서 누가?"
청명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이송백이 상황을 알아챘다. 그러고 보면 기목승이 제자들을 끌고 돌아가 버린 이상 이곳의 최고수는 당연히 이송백이다.
"내, 내가 왜……."
뭔가 억울한 느낌이 든 이송백이 겸연쩍게 되묻는 순간 청명이 슬쩍 턱짓으로 옆을 가리켰다.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린 이송백은 그제야 자신을 응시하는 황종의를 발견했다.
'아, 그렇지!'
이건 그가 친 사고를 수습할 수 있는 기회다! 이제와 돌이켜 보면 과연 그게 사고였는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여하튼!
"악적은 종남의 검이 상대해 주마!"
이송백이 검을 뽑으며 앞으로 달려들자 청명은 냉큼 옆으로 길을 터 주고는 박수를 쳤다.
"크으. 영웅의 풍모!"
닥치라고 욕을 해 주고 싶었지만, 막 전투에 돌입한 이송백에게 그럴 여유는 없었다.
뒤엉키며 시작된 두 사람의 전투를 뒤로하고 청명이 천천히 황종의의 앞에 다가섰다.
"하나는 해결했네요."
"……아직 끝나지 않았잖은가?"
"금방 잡을 거예요. 그래도 명문의 제자인데,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이에게 당할 리는 없죠."
"제대로 익히지 못하다니? 아까 자네가 분명 이 정도 수준이면……."
그때 청명이 남들 보이지 않게 황종의에게 손을 내민다.
그의 손이 검게 물들었다가 다시 희게 물들고, 이내 붉게 물든다.
"……."
"거짓말은 안 했어요. 저 사람이 단마수를 익힌 건 사실이니까. 나중에 나타날 경지를 좀 미리 보여준 것뿐이죠."
"허……."
헛웃음을 흘린 황종의가 참지 못하여 묻고 만다.
"소도장은 정말 도사인가?"
"물론이죠."
'그것도 세상에서 제일 연륜 있는 도사라니까요.'
응?
진짜라니까?
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