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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55화 (56/1,567)

55화. 하핫, 뭐 대단한 사람 오셨다고. (5)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소이다!"

황종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당황한 종남의 제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황종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슨 설명을 하겠는가?

쿨럭. 끄, 쿠흐윽.

"……."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변명이겠지만, 청명의 입에서 쭉쭉 뿜어져 나오는 피 분수가 그들이 할 변명을 모두 묻어 버리고 있다.

이 상황에서는 제갈량이 아니라 제갈량의 할아버지가 와도 변명거리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황종의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청명을 확인하고는 노성을 내질렀다.

"의원! 당장 의원을 모셔 와라! 외원에 아직 떠나지 않은 의원이 계실 것이다! 뭣들 하느냐!"

"예! 소단주님!"

황종의를 수행하던 하인 중 하나가 부리나케 외원 쪽으로 달려갔다. 황종의는 곧장 바닥에 쓰러져 있는 청명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

종남의 제자들이 주춤주춤 길을 터 준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청명의 상태를 살핀 황종의의 얼굴에 더할 수 없는 노기가 차올랐다.

"그래도 명문이라 자처하는 이들이!"

황종의의 말에 종남의 제자들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아직 어린아이에게 이런 살수를 쓴단 말인가? 내 그래도 종남을 협의지문이라 생각했건만, 내 눈앞에서 이런 짓을 벌이는 이들을 어찌 이해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송백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살수라니.

그는 절대 살수를 쓴 적이 없었다.

'심지어 내력마저 회수했는데!'

이송백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고 망연하게 서 있었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

황종의의 표정과 눈빛을 보건대 변명은 절대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 순간 외원으로 간 하인이 의원과 함께 달려왔다. 의원은 상황을 보자마자 물을 것도 없이 청명에게 달려들어 진맥을 시작했다.

"으으으음!"

의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어서 안으로 옮기시오! 어서! 몸속이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었으니 조심, 또 조심해야 하오!"

그 말을 들은 종남의 제자들이 청명을 안아 들기 위해 엉거주춤 다가왔다.

"물러서시오!"

하나 황종의는 그들이 청명의 몸에 손을 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살기까지 어린 눈으로 그들을 노려본 황종의가 하인들을 불렀다.

"뭣들 하느냐! 의원께서 하신 말씀 못 들었느냐!"

"죄송합니다! 소단주님!"

하인들이 우르르 달려와 조심스레 청명을 안아 들었다. 입에서 흘러나온 피가 가슴을 적시고 바닥으로 길게 떨어진다.

"조심! 조심하시오!"

의원이 청명의 옆에 바짝 붙어 하인들과 함께 안채로 향한다. 황종의와 종남의 제자들만이 그 자리에 남아 안채로 옮겨지는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의 모습이 아주 사라지자 황종의가 고개를 돌린다.

"내 오늘 일은 잊지 않겠소."

"소단주님!"

"상단에서 나가시오."

이송백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은하상단은 종남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곳이다. 그렇기에 종남의 장로가 직접 이곳에 내려와 있는 게 아닌가?

만약 그들의 잘못으로 은하상단과의 관계가 틀어진다면 그 후폭풍은 감히 그들이 감당할 수준이 아닐 것이다.

이송백이 뭔가 말을 하려는 찰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더냐?"

기목승이었다. 그의 눈에 의아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소단주.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저 피는……."

더 말을 하려던 기목승이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바닥에 보이는 흥건한 피와 부서진 담장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짐작케 했다.

'이 멍청한 놈들이!'

기목승의 시선이 이대제자들에게로 향한다. 자신을 마주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리는 이대제자들을 보며 기목승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단주. 아무래도 뭔가 사고가 있었던 듯한데……."

"지금 사고라고 하셨습니까?"

"……소단주."

"아버지를 치료하던 이가 귀문의 제자들에게 시해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걸 사고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사고란 의도치 않게 벌어지는 일을 뜻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기목승이 이송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일을 저지른 것은 이송백이니 수습도 직접 하라는 의미다.

기목승의 의중을 파악한 이송백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앞으로 한 발 나섰다.

"소단주님.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해?"

황종의가 헛웃음을 흘린다.

"차라리 내게 눈이 먼 장님이라고 욕을 하시오. 내 눈으로 보고, 내 귀로 들었거늘 대체 무슨 오해가 있다는 말이오?"

"저는 과하게 손을 쓴 적이 없습니다. 이건 뭔가 착오가……."

"이보시오."

황종의가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이송백을 노려본다.

"과하게 손을 쓴 것만이 문제요? 애초에 왜 종남의 제자인 그대가 화산의 아이에게 검을 휘두른 것이오?"

"그건 정당한 비무였습니다."

"비무?"

황종의가 이를 빠득 간다.

"내 비록 강호의 법도에 밝지는 않으나, 비무라는 것은 서로 대등한 이들이 무학을 나누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들었소. 겨우 귀하의 반 남짓 살았을 법한 어린아이와 비무를 한다는 말씀이시오? 그게 종남의 협의입니까?"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비무가 사고 없이 끝났다면 면피할 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가 이렇게 나와 버린 이상 어떤 말로도 책임을 피할 수가 없다.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제자들을 데리고 상단을 떠나십시오."

"소, 소단주 잠시 내 말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

황종의가 기목승을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그동안 이어 온 종남과의 관계를 생각하여 이 일을 문제 삼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귀 문파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 내로 이곳을 떠나십시오. 이건 은하상단의 소단주이자 단주 대리로서 하는 말입니다."

기목승은 끝내 그 기세에 눌려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내 그리하겠소. 소단주, 불행한 사고가 있었지만 종남이 황 대인의 쾌차를 바라고 있다는 것만은 기억해 주시오."

"그러지요. 누구는 아닌 것 같지만."

황종의가 찬바람이 불도록 몸을 획 돌려 안채로 향했다. 한참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기목승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송백을 쏘아보았다.

"장로님 저는……."

"긴말하지 않겠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 하였으니, 너는 이곳에 남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단주의 용서를 구해 상황을 해결한 뒤 본산으로 돌아오거라.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본산으로 돌아가겠다."

이송백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수로 소단주의 용서를 구하라는 말인가?

이건 명령이라기보다는 징계였다. 하지만 더없이 차가운 기목승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도저히 다른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기목승이 말없이 이송백을 한참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돌아간다."

"예, 장로님."

이대제자들이 이송백의 눈치를 보다가 재빨리 기목승에게 따라붙었다.

그들이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이송백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 *

"상태는 어떤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

"으으음."

총관의 말에 황종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총관이 황종의의 안색을 살짝 살피고는 말을 이었다.

"의원의 말로는 기혈이 완전히 진탕이 되어 위험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일단은 기혈을 다스려 보고 있기는 하지만, 완전한 회복을 장담할 수 없답니다."

"그 말인즉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뜻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로군."

황종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화산의 제자가 은하상단에서 종남의 제자에게 죽는 일이라도 벌어진다?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다.

더구나 청명은 황 대인을 치료하기 위해 은하상단에 온 것이 아닌가. 당연히 그 잘못은 종남에 있겠지만, 은하상단 역시 세간의 손가락질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게다가 황종의 개인적으로도 이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청명은 지금까지 유일하게 황 대인의 병세를 좋아지게 한 사람이다. 어쩌면 황 대인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일지도 몰랐다.

그런 이를 공격하여 의식을 잃게 만들다니……. 은하상단과 황문약에 대한 존중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할 수 없었을 일이다.

'종남은 너무도 오만무도해졌다.'

이번 일만이라면 이해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종남이 보여 온 태도와 기목승의 언행을 떠올려 보면, 더 이상 그들을 신뢰하기 어려웠다.

불편한 기색으로 몇 차례 헛기침을 한 황종의가 고개를 들어 총관을 바라보았다.

"그럼 언제쯤 의식이 돌아올 것 같다고 하는가?"

"적어도 이삼 일은……."

"으음. 그동안 아버님의 상태가 악화되지 않아야 할 텐데."

황종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겨우 아버지를 고칠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다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슬쩍 황종의의 안색을 살핀 총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나, 소단주님."

"으음?"

"정말 그 아이가 단주님의 병을 고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영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믿어서 손해 볼 것은 없지 않은가?"

"그건 그렇지만……."

황종의가 단호하게 말했다.

"수많은 명의들 중 그 누구도 아버님의 병이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했네. 하지만 화산의 소도장은 아버님을 보지도 않고도 병세를 알아내었어. 심지어 아버님께선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차도를 보이시지 않았는가?"

"예."

"근거 없는 막연한 믿음이 아닐세. 하늘이 도우시는 게지. 아무튼 자네는 소도장이 회복하는 데 차질이 없도록 해야 할 걸세. 어떤 지원도 아끼지 말게나."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그러게나."

총관이 깊이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음."

방에서 나가는 총관을 보던 황종의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새애애액.

새애애액.

침상에 누워 있는 청명의 입가에서 낮고 미약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지금 청명의 상태가 얼마나 위태한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호흡이 끊어질 듯 말 듯, 겨우겨우 이어진다. 지금 당장에 숨이 끊겨도 그리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새애애액.

짧고 낮게 이어지는 숨소리만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기묘한 정적이 이어지던 그때.

딸깍.

작은 소리와 함께 문이 아주 살짝 열린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한 식경쯤 지났을까?

끼이이익.

문이 조심스레 열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한 사람이 살금살금 걸어 들어온다. 발소리조차 내지 않는, 신중하기 짝이 없는 움직임이었다. 방 안은 완연한 어둠으로 물들어 있어 들어오는 이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먹이를 노리는 고양이처럼 살그머니 안으로 들어온 이가 침상 머리맡에서 청명을 내려다본다.

새애애액.

새애애애액.

창백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미약한 숨을 이어 가는 청명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한참 동안 청명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이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끝이 먹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짙은 검은색으로 물든다.

"딱히 원한은 없다만, 내 일을 방해한 대가라고 생각해라."

낮게 중얼거린 사내가 청명의 목을 향해 검게 물든 손을 내리친다.

그 순간.

덥썩!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청명이 별안간 이불을 젖히고 튀어 올라 사내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헉!"

파리하게 안색이 질려 있던 청명이 두 눈을 번쩍 떴다.

"……."

이윽고 청명의 입가에 기이한 미소가 걸렸다. 더없이 사악하고 의기양양한.

"잡았다, 요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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