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하핫, 뭐 대단한 사람 오셨다고. (2)
"아니 거……."
"어떻습니까?"
"사람이 순서라는 게 있는데."
"이게 가장 급한 일 아닙니까?"
"먼 길 와서 배도 고프고."
"치료가 끝난다면 진수성찬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힘도 없는데."
"보약이라도 한 재 올릴까요?"
청명이 슬쩍 황종의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이 불타오르고 있다.
지금 황종의는 물에 빠진 채 지푸라기를 잡았다. 그리고 그 지푸라기가 바로 청명이다. 황 대인을 고치지 못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두 눈 가득 느껴진다.
청명이 입맛을 다셨다.
"그럼 일단 진맥부터……."
"어서!"
"……알았어요. 재촉하지 마시고."
청명이 고개를 돌려 침상을 바라보았다. 두툼한 비단 이불 안에 한 사람이 누워 있다.
"음."
누운 이의 얼굴을 확인한 청명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확실히 마화의 증상이 맞는 것 같은데.'
확실히 하려면 좀 더 자세히 봐야 한다. 청명은 가까이 다가가 이불을 걷어 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옷을 입고 있지만, 앙상하게 마른 몸을 가릴 도리가 없다.
마치 목내이(木乃伊)처럼 말라 버린 노인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숨을 겨우겨우 이어 가고 있었다.
'상태가 생각보다 더 심각한데.'
청명이 턱을 매만진다.
'마화는 마화인데, 제대로 된 마화는 아니군.'
수준 높은 마공에 당했다면, 일 년이나 버틸 수 있을 리 없다. 평생을 근학고련한 이들조차도 마화가 찾아오면 삼 일을 버티지 못하기 부지기수였으니까.
이런 노인이 버틸 수 있는 증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맥 좀 할게요."
"예."
청명이 손을 뻗어 황 대인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는 살짝 기운을 밀어 넣는다. 청명의 정순한 내력이 황 대인의 몸 안으로 들어가자 가득 차 있던 탁기들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난다.
'어설퍼.'
청명이 미간을 좁혔다.
증상은 마화가 확실하다. 하지만 확실히, 제대로 익힌 마공으로 인한 증상은 아니다.
황 대인의 몸에선 손을 뗀 청명은 턱을 괸 채, 고심에 빠져들었다.
황종의는 그런 청명을 보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진맥을 한 이가 손을 뗀 뒤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면 누구라도 같은 마음이 들 것이다.
결국 참지 못한 황종의가 입을 열었다.
"……어떻습니까?"
"에, 그러니까……."
청명이 뒷머리를 벅벅 긁는다.
"어렵습니까?"
"아뇨. 치료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요."
"역시 그렇지요. 괜찮습니다. 다들……. 네?"
황종의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지금 뭐라고……?"
"치료는 별로 어렵지 않다구요."
"저, 정말이십니까?"
"네. 그런데 지금 당장은 손을 댈 수가 없네요.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해서."
"준비라면 어떤……."
"일단!"
청명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밥부터 먹고 하죠."
"……."
찹찹찹찹찹.
청명의 입이 들어오는 모든 것을 분쇄하고 절삭한다. 황종의는 그 광경을 더없이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도 여러 문파와 관계를 맺으면서 많은 도인들을 보아 왔지만, 단언컨대 이렇게 고기를 잘 뜯는 도사는 생전 처음이다.
지금도 길게 찢어 낸 오리 다리가 청명의 입 안으로 빨려들어 가더니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져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꼴꼴꼴꼴.
값비싼 연태주로 술잔을 채우자마자 다급하게 입 안으로 때려 붓는다.
"크으으으으으으으으으! 이거지! 이거!"
"……."
저렇게 술을 맛나게 먹는 도사도 처음이다.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어도 '오늘 참 호쾌한 도사를 만났다'며 웃어 버렸을 황종의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를 웃지 못하게 만들었다.
"저……. 소도장."
"에? 왜어?"
입 안에 고기를 잔뜩 머금은 청명이 되물어 온다. 황종의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 치료를 위한 준비는?"
"지금 하고 있잖아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 뭐 별건 아니고."
청명이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워낙 체력이 많이 필요한 치료다 보니, 든든하게 먹어 두는 게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여기 숙수가 요리를 참 잘하네요."
잘하겠지.
서안에서 제일가는 숙수니까.
"화산에서 밥 같지도 않은 것들만 먹었더니, 이제야 속이 좀 풀리네요."
청명이 배를 두드렸다.
"다 드셨습니까?"
"아뇨. 이제 시작인데."
"……."
배 속에 아귀가 들어찼나?
화산이 요즘 사정이 어렵다고 하더니, 꽤나 굶주린 모양……. 아니, 보통 굶주린다고 해도 저게 배에 다 들어가나? 사람의 배는 크기가 한정되어 있을 텐데?
여러모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도사였다.
"식사하러 오신 건 아닐 텐데."
"뭐 겸사겸사."
"그래도 본디 목적이 있는 법인데."
"도를 닦는 이는 흘러가는 대로 사는 법이죠."
"너무 막 흘러가는데……."
"적당히 지키고는 있습니다."
어딜 봐서?
황종의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소도장. 먼 길을 온 소도장을 재촉하는 것이 도리에 어긋난다는 걸 내 모르는 바가 아니오. 하지만 소도장도 아버지가 병상에 누워 계시는 아들의 심정을 조금 헤아려 줘야 하지 않겠소?"
"충분히 헤아리고 있어요."
황종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보시오! 소도장! 내 아버님께서는!"
"안 죽어요."
"……지금 뭐라 했소?"
"안 죽는다고요. 앉으세요."
청명이 아무렇지도 않게 술을 따르고는 한 잔 쭉 들이켰다.
황종의의 화난 기색을 보고도 전혀 동요가 없는 얼굴이다.
"조금 전에 조치를 좀 해 놨으니 돌아가실 일은 없어요. 완전히 치료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뿐, 급한 고비는 넘겼거든요."
치료를 했다고?
언제?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죠. 지금 영존을 치료하는 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에요. 진짜 중요한 건 영존이 왜 쓰러졌는가죠."
"……정말 치료를 했소?"
"속고만 사셨나."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의심이 되시면 영존께 가 보세요. 분명 미간의 검은 기운이 많이 사라졌을 테니까요."
황종의가 청명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소도장을 의심하는 건 아니나. 모든 일은 확실한 게 좋다고 생각하니, 지금 바로 확인해 보겠소."
"그러세요."
황종의는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문을 박차고 들어온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청명을 바라본다.
"대, 대체 뭘 한 거요?"
"치료했다니까요."
"대체 언제?"
청명은 대답하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제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안 앉으실 거예요?"
"……."
황종의가 의혹에 가득 찬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상인으로 살면서 수많은 인간 군상들을 보아 왔지만, 단언컨대 이런 사람은 생전 처음이다.
순간순간 어린아이의 치기가 보이면서도, 때때로 아주 노회하고 노련한 이의 느낌이 풍긴다.
'마치 아이의 몸에 노인이 들어가 있는 것 같구나.'
그럴 리는 없을 테니, 이 아이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무언가를 수도 없이 겪었다는 뜻이 된다.
'믿어도 될까?'
하지만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가 확인한 대로라면 황문약은 확연히 차도를 보이고 있었다.
황종의의 복잡한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청명이 잔에 술을 따르며 입을 열었다.
"앉기 싫으면 서서 대답하세요.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황종의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영존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누구죠?"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하셨소?"
"예. 황 대인의 주변을 지키던 사람. 잠자리부터 상행까지 모두 따라다니는 사람. 그게 아니면, 적어도 최소한 무슨 일을 한다 해도 의심받지 않을 사람."
"……그건 왜 묻는 거요?"
"치료하는데 필요하다고 해 두죠."
황종의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한다.
"그건 당연히 나요. 아버님을 모시는 건 내 일이니까."
"그쪽은 빼구요."
"나를 뺀다면……."
깊게 고민을 하던 황종의가 고개를 내저었다.
"잘 모르겠소. 아버님은 워낙 많은 일을 하시던 분이오. 그러니 당연히 아버님을 보필하던 이들의 수도 적지 않소. 소도장이 말하는 기준에 부합하는 이가 적어도 다섯은 있소."
"생각보다 많네요. 흐음. 그렇단 말이죠?"
청명이 곤란하다는 듯이 볼을 긁는다.
하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하고는 피식 웃었다.
"다섯이나 되면 그중에서 찾아내는 건 쉽지 않겠네요."
"대체 뭘 찾아낸다는 말이요?"
"몰라서 물으시는 건 아니시겠죠? 에이. 설마?"
"……."
황종의가 얼굴을 굳혔다.
물론 몰라서 묻는 건 아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흉수가 내부에 있다는 말이오?"
"원래는 밖에서 당한 줄 알았는데, 황 대인의 상세를 살펴보니 밖에서 당한 게 아닌 것 같네요. 제가 볼 때는 내부인의 소행이에요."
황종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말을 삼가시오. 소도장! 은하상단의 식솔들은 모두 가족 같은 이들이오! 평생을 은하상단과 함께했고, 다들 아버지를 존경하는 이들이란 말이외다! 그들이……."
"아니면 말고요."
"……엥?"
청명이 태연하게 배를 두드렸다.
"의심해 보고 아니면 다행인거죠. 아닌가요?"
"……그건 그렇소만."
청명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조사하면 다 나오니까."
황종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황종의를 보면서 청명은 내심 혀를 찼다.
'상인이라는 양반이 순진하기는.'
사람이 얼마나 독해질 수 있는지 청명만큼 잘 아는 이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는 자비를 설파한다는 스님이 사람의 머리를 깨어 놓고 광분하는 모습도 지켜보았고, 도를 닦는 도인이 어떻게 하면 사람의 목을 더 깔끔하게 베어 내는가를 고민하는 것 역시 지켜보았다.
인간은 양면적인 존재다.
누군가에게는 선인이 될 수 있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악인이 될 수도 있는 존재다.
'뭐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
중요한 건 이 은하상단 내에 황문약을 시해한 이가 존재한다는 것.
상태로 봐서는 어설프게 마공을 익힌 이가 지속적으로 황문약에게 마기를 흘려 넣은 게 분명하다. 처음에는 별문제가 없었겠지만, 오랜 시간 꾸준하게 노출된 끝에 마화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마화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이라고 해도 청명처럼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어 보지 않은 이상은 이 증세가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영감님이 착하게 살았나 보네.'
운이 맞아 떨어졌다.
만약 청명이 서찰의 내용을 보지 못했다면……. 아니, 그 전에 황 대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황문약은 이대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을 운명이었다.
'크으. 이게 선행이지.'
사람도 살리고 돈도 벌고.
도랑치고 가재……. 아, 가재는 별로.
"그런데 그 조사라는 걸 어떻게 할 셈이시오?"
"하고 있잖아요."
"……음?"
황종의가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조사를 하고 있다고?"
"네."
"음식을 먹는 게 조사라는 말이오? 혹여 숙수가?"
"에이. 그게 아니죠. 제가 지금 이렇게 소단주와 방 안에서 대화를 하고 있는 게 조사예요."
황종의가 고개를 갸웃했다.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먹을 수가 없다.
"그냥 보고 계세요. 곧 재밌는 일들이 벌어질 테니까요. 소단주께서는 그냥 지켜보고 계시면 됩니다. 아 한 가지 해 주실 일이 있긴 하네요."
"그게 뭐요? 내 성심껏 한번 해 보겠소이다."
청명이 옆에 놓인 술병을 들었다.
"한 병 더."
"……."
"빨리."
"……."
황종의의 마음에 깊은 수심이 찾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