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하핫, 뭐 대단한 사람 오셨다고. (1)
"혼자?"
"네."
"그러니까 혼자?"
"그렇다니까요."
"그러니까……."
도무지 상황이 정리가 되지 않자 황종의는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다소곳이 그의 뒤를 따른 시비가
'내가 그래서 말하지 않았느냐?'
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진짜 혼자 온 모양이다.
황종의가 다시 고개를 돌려 눈앞의 어린 도사를 바라보았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화산이 은하상단을 무시하는 건가?
아니면 무슨 사정이 있어서 이런 일을 벌이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하하하하핫!"
그 순간 등 뒤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하다하다 별짓을 다 하는군. 소단주, 내가 말하지 않았소. 화산 것들은 만나 볼 필요도 없다고!"
기목승이었다.
황종의를 따라 입구까지 온 기목승이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저 어린아이가 뭘 안다고 저 아이를 보냈겠소? 아는 것은 없는데 한 발 걸치고는 싶고, 그렇다고 직접 오기는 민망하니 어린 것을 보낸 것이지. 쯧쯧쯧. 내 화산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화산 장문인이 군자라고 들었거늘 이런 치졸한 수를 쓰다니."
황종의의 얼굴이 굳어졌다.
기목승의 말에 악감정이 듬뿍 담겼다는 것이야 뻔할 뻔 자지만, 지금은 그의 말대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화산의 현종진인께서 그럴 분이 아니신데?'
그가 기억하는 현종은 도인임에도 군자의 품새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이가 이런 아이 하나만 달랑 보내서 생색을 낼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은가?
"소도장. 정말 소도장 혼자 온 것이오?"
"네."
"……화산에서 소도장을 혼자 보냈다는 말이오?"
어린 도사.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이가 어리니 이런 대접을 받는구나.'
청명이 화산이고, 화산이 곧 청명이던 시절도 있었는데.
'에잉. 앓느니 죽지.'
하지만 저들의 반응도 충분히 이해한다. 약관도 안 된 도사 놈 하나가 찾아와서 천하의 명의들도 어쩌지 못한 병을 고치겠다는데, 바로 믿으면 그놈이 더 이상하지.
그러니 약을 좀 칠 필요가 있다.
"귀하께서 소단주라 하셨습니까?"
"그, 그렇습니다만."
"저는 화산의 삼대제자인 청명이라고 합니다. 소단주께서 화산으로 보내신 서찰은 잘 받아 보았습니다. 서찰에 써진 증세에 대해 제가 짐작 가는 바가 있어 이리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하나 이리 홀로……."
"워낙 급박한 사안이라 다른 분들과 함께 올 여력이 없었습니다. 영존께서 워낙 위독하시지 않습니까?"
그건 그런데…….
도무지 신뢰가 안 간다는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던 황종의가 청명의 말 중 한 부분을 떠올리고는 얼굴을 굳혔다.
"지금 아버님의 병세에 대해 짐작 가는 부분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황종의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이런 말을 한 사람은 처음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명의와 고수들이 다녀갔지만, 황 대인을 직접 보기도 전에 증세에 대해 논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어쩌면?'
그 순간 등 뒤에서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어. 어린놈이 벌써부터 사기를 치는구나. 천하의 명의들도 어쩌지 못한 것을 어린놈이 어찌 안다고! 소단주, 더 들을 것 없소! 들어갑시다. 괜히 시간 낭비할 필요 없소이다."
"하나……."
"소단주는 저 어린놈의 말을 믿으시는 게요?"
황종의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청명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요."
"응?"
"그쪽은 누구신데 아까부터 자꾸 사람한테 놈 운운이세요?"
기목승이 멍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지금 나한테 한 말이더냐?"
"여기 놈놈 한 사람이 그쪽 말고 또 있어요?"
"허어. 이 방자한 놈을 보았나. 화산의 제자라는 놈이 종남의 의복도 구분하지 못한단 말이더냐? 화산이 세가 말이 아닌 것은 내 알고 있었지만, 제자마저도 이리 멍청할 줄은 몰랐구나."
"아, 종남이시구나."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나는 뭐 아는 것처럼 말씀하시기에, 의원인 줄 알았죠. 그래서 그쪽 분은 황 대인의 병세를 고칠 방도가 있는 모양이죠?"
"황 대인은 도를 거슬렀기 때문에 병에 걸린 것이다. 하늘의 화를 푸는 도제를 올린다면 깨끗이 나을 수 있다."
청명이 입꼬리를 싸악 말아 올렸다.
"오. 그럴 수도 있겠네요."
황종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내 이어진 청명의 말은 황종의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그럼 빨리 무당이나 곤륜 사람들을 불러야죠."
"……뭐?"
"그쪽이 전문이잖아요?"
기목승이 살짝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구, 굳이 그럴 필요 없다. 이곳에는 종남이 있지 않느냐?"
"에이. 종남이나 화산이나 그쪽으로는 속가 반쯤 섞어 놓은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제를 올릴 거면 차라리 제대로 된 도사들에게 받는 게 났죠. 저 같으면 무당을 추천하겠네요. 그래도 무당이 도가에서는 제일 먹어 주잖아요."
"……."
황종의의 얼굴이 멍해졌다.
'이 새끼 뭐지?'
심지어 슬쩍 황종의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기까지 한다.
"무당파가 체면을 워낙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적당히 시주 좀 하면 바로 와 줄 겁니다. 이왕 받으려면 좋은 데서 받아야죠. 좋은 데서. 가성비 좋은 곳에서."
"……."
얼굴이 시뻘게진 기목승이 고함을 내질렀다.
"갈! 이놈이 어른을 놀리는구나! 네 사문에서 그렇게 가르치더냐?"
"아, 네네. 죄송합니다."
청명이 귀를 후비적거리고는 입으로 훅 불었다.
대놓고 무시하는 언행이었지만 기목승은 달아오른 얼굴로 부들거릴 뿐 차마 손을 쓰지 못했다.
종남의 장로씩이나 되어 화를 못 참고 화산의 삼대제자를 팬다면 그건 정말 변명도 할 수 없는 망신이다. 천하의 모두가 손가락질을 하고도 남을 만한 일이 아닌가.
그걸 알고 하는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사람의 신경을 제대로 긁는 놈이었다.
"소단주. 당장 이놈을 내쫓으시오!"
기목승의 말에 황종의가 한숨을 내쉬었다.
"장로님. 여기는 종남이 아니라 은하상단입니다. 상단에 찾아온 객을 어찌 대접하는가는 제가 결정할 일입니다."
"내가 저 아이에게 당하는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시오?"
황종의가 기목승의 말을 무시하고는 청명을 바라보았다.
'믿는 구석이 있어 보이는데.'
아무것도 없이 사기를 치러 왔다면, 이리 당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미심쩍었다.
"소도장."
"네."
"내가 소도장을 믿지 못하여 하는 말이 아니라……."
"괜찮아요. 못 믿을 수도 있죠."
"……이해해 줘서 고맙네. 내가 먼저 몇 가지를 물어도 되겠는가?"
황종의의 말이 어느새 짧아졌다. 청명 역시 그 사실을 느꼈지만 의심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니 어깨를 으쓱하며 넘어갔다.
"네. 얼마든지요."
황종의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소도장. 조금 전에 아버님의 병세에 대해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다고 했는데, 혹여 그 부분에 대해 조금 들어 볼 수 있겠는가?"
"그건 말씀드리기 힘들어요."
"헤헹!"
청명이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과장된 기목승의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황종의 역시 황당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대신에 다른 걸 말씀드릴 수 있죠."
"무엇인가?"
청명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황 대인께서는 상행을 자주 다니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죠?"
"그렇네."
"그럼 분명히 와병하시기 전 상행에서 십만대산 쪽에 들르신 적이 있을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청명이 선언하듯 말했다.
그러자 황종의가 눈을 크게 뜨고는 대답한다.
"아닌데?"
"……."
청명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꺾인다.
"네?"
"그런 적 없네. 아버님은 그쪽으로 상행을 가신 적이 없어."
"……아, 그래요?"
청명의 얼굴에 당황이 어린다. 황종의의 표정이 더 뚱해지기 전에 청명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럼 그전 상행에서 분명히 습격을 당하신 적이 있을 겁니다! 그렇죠? 위기를 겪었다거나!"
"최근 몇 년간 아버님이 습격을 당하신 적은 없네. 최소 오 년 전의 일이지."
"어? 그럼 안 되는데? 아씨, 뭐지?"
"……."
황종의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짜요? 그럴 리가 없는데?"
등 뒤에서 기목승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상하네. 그럼 어디서 처맞았지?"
뭘 처맞아, 이 미친놈아!
이놈이 정신이 나갔나?
청명에 대해 미약하게나마 품었던 기대가 깔끔하게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황종의의 눈이 싸늘해졌다.
청명은 황급히 말했다.
"자, 잠깐만요. 진짜라니까요? 제가 그거 고칠 수 있어요."
"……소도장."
황종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목승이 치고 들어왔다.
"그러게 내 굳이 볼 것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화산은 본디 사람을 현혹시키는 무뢰배들의 문파네. 그 칼날 같은 형세만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는 일 아닌가."
"너무 과한 말씀은 삼가 주십시오, 장로님."
기목승을 만류한 황종의가 청명을 보며 입을 연다.
"소도장의 의욕은 이해하나, 아버님은 병세가 깊어 어설픈 자가 보았다가는 악화되기 딱 좋네. 내 입장도 이해해 주기를 바라네. 화산의 장문인께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을 전……."
"몸이 붉게 달아오르고, 전신이 차가워짐. 손으로 누르면 붉은 기운이 살짝 희게 변했다가 금세 다시 붉어짐. 의식을 잃기 전까지는 얼음 굴에 들어가 있는 듯한 오한을 느끼고, 미간뿐 아니라 뒷목과 정수리도 검은 기운이 들어참!"
"……."
"더 해요?"
청명이 씨익 웃었다.
"그, 그걸 어떻게?"
황종의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반명 청명의 얼굴은 이 이상 여유로울 수 없을 만큼 자신만만해졌다.
"아……. 먼 길 왔더니 목이 좀 마른데."
"뭐 하느냐! 당장 냉수! 아니 얼음물을 떠 오거라! 지금 당장!"
시비가 대답도 하지 못하고 전력으로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청명을 향한 황종의의 눈빛과 태도가 대번에 바뀌었다.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드시지요."
"하핫. 뭐 대단한 사람 오셨다고."
"어서! 어서!"
청명이 배를 부풀리고는 황종의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이 상황을 넋 놓고 보던 기목승이 다급하게 외쳤다.
"소단주! 그건 음기에 당한 이들의 전형적인 증상일 뿐이오! 그걸 안다고 뭐가 달라지지 않는단 말이외다!"
황종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음기에 당한 이들이 정수리와 뒷목에 검은 기운이 모인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리 잘 아시는 분이 왜 지금까지 아버님을 치료하지 못하신 겁니까?"
"……그건."
"이건 은하상단의 일입니다. 필요 이상의 간섭은 더는 허락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더 간섭하신다면 저희 역시 종남에 정식으로 항의하겠습니다."
"으으음."
기목승이 탄식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런 그의 눈에 웃음을 참느라 볼이 잔뜩 부푼 청명의 얼굴이 들어왔다.
"저, 저……. 저놈이!"
기목승은 온몸에 열이 확 오르는 걸 느꼈다. 화가 나 돌아 버릴 것 같았지만, 뭘 어쩌겠는가? 황종의의 말대로 이곳은 종남이 아니라 은하상단인데. 아무리 기목승이 종남의 장로라 할지라도 은하상단에서까지 제멋대로 굴 수는 없었다.
"네 이놈! 만약 황 대인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다면, 네 경을 칠 것이다!"
걸음을 멈추지 않는 황종의와 청명을 향해 윽박지르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조금 거리가 멀어지자 황종의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소도장. 이상하게 종남 분들이 화산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흥분을 참지 못하셔서."
"괜찮아요."
"아, 이해해 주시……."
"누굴 탓하겠어요. 다 내가 지은 죄지."
"……예?"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적당히 팰 걸 그랬나.'
백 년 전의 가해자가 백 년 뒤의 피해자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