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잘못되더라도 원망 마시고. (5)
황종의는 실망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래도 안 된다는 말인가?'
은하상단의 상단주. 그의 아버지인 황문약의 병세는 나날이 깊어지고 있다. 얼마 전까지는 그래도 의식은 있었건만, 최근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날이 부쩍 늘었다.
의식이 없는 사람은 음식도 먹을 수 없는 법.
이런 나날이 계속된다면 며칠 지나지 않아 숨이 끊어질 것이 분명했다.
다급한 마음에 천하의 명의들을 초정하고, 이제는 그동안 인연이 있었던 강호의 문파들에게도 도움을 구하고 있지만, 그들도 딱히 해답을 내어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오늘, 독에는 천하제일의 조예를 자랑한다는 사천당가의 인물들이 찾아왔기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었다. 그러나 돌아가는 상황은 황종의를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어렵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들려오는 부정적인 말에 황종의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독의 조종이라 불리는 당가 분들도 아버님을 치유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물론 저희 당가는 독에 있어서는 천하제일을 자부합니다. 그 어떤 독도 해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지만 영존의 병세는 독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황종의가 미간을 좁혔다.
"증세가 저런데 독이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당가의 장로 당명(當明)이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증상이 비슷하기는 하지만, 중독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다른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으으음."
황종의의 안색이 더 어두워질 수 없을 만큼 어두워졌다.
은하상단의 자금력으로 명의들을 초청하고, 막대한 보상까지 약속했음에도 황문약의 병을 고칠 이가 나타나지 않는다.
"노환은 아닌 게 확실하겠지요?"
"자연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면,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그러자 당명이 곤란하다는 듯 살짝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의 표정을 보며 황종의가 한숨을 내쉰다.
"죄송합니다. 장로님께서 의원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제가 너무 답답하여."
"도움이 되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배웅하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당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씁쓸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갔다.
"이를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황종의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버지의 병세는 나날이 깊어 가는데, 천금을 쥐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식의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아버지께서 대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일을 겪는다는 말인가?'
평생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베풀며 살아온 황문약이다. 하늘의 뜻이라는 게 꼭 인과응보에 있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이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일 년 동안 원인을 알 수 없는 질환에 고통받다가 숨이 끊어지는 죽음이라니…….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 예. 장로님."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새하얀 무복이 인상적인 백발의 사내였다.
"방금 당명 장로님께서 돌아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소단주(小團主). 자꾸 같은 말을 하기 민망합니다만, 이제는 그만 인정해야 할 때입니다. 황 대인을 구할 방법은 도제(道第)뿐입니다."
황종의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장로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는 압니다. 하지만 아직은 그런 것에 기대고 싶지 않습니다."
"소단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영존의 증세는 흐름을 거스른 대가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모았고, 너무 많은 것을 인위적으로 뒤틀었습니다. 지금이라도 내려놓고 도에 뜻을 둔다면 영존께서 쾌차하실 수 있을 겁니다."
황종의가 고개를 돌려 사내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사내는 그 눈빛이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다는 듯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대 종남의 장문인께서 직접 제를 올려 주시는 일이 흔히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동안 연을 이어 온 은하상단의 황 대인이기에 이런 복락을 누릴 수 있음을 왜 모르십니까? 시간이 촉박합니다. 후회를 남기지 마십시오."
"……조금만 더 기다려 보겠습니다."
"덧없는 것을."
사내가 혀를 찼다. 마치 황종의가 한심한 짓을 하고 있다는 투다.
황종의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런 무례한 말과 대접을 그냥 넘겨야 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내가 종남의 장로인 기목승(紀木昇)이기 때문이다.
종남은 과거부터 구파일방으로 유명한 문파였지만, 최근 들어서는 욱일승천의 기세로 그 이름을 천하 만방에 떨치고 있다. 이번 대는 몰라도 몇 대가 흐르면 천하제일검문(天下第一劍門)의 자리를 꿰찰 게 분명하다 평가될 정도다.
게다가 서안은 예로부터 종남의 영향력이 큰 곳이었다. 그런 종남의 장로가 직접 권유를 하는데, 상단주도 아닌 소단주인 황종의가 매정하게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제사를 지내 주는 대가로 또 천금을 요구하겠지.'
돈이 아까운 건 아니다.
아버지를 살릴 수 있다면 재산을 모두 내놓아도 아깝지 않다. 하지만 이들이 정말 도제로 아버지를 살릴 자신이 있었다면, 선금을 내놓으라고 할 게 아니라 제를 지내 아버지를 살린 다음 보상을 요구했을 것이다.
평생 장사를 하며 익힌 눈치는 이들이 무엇을 노리는지 자연히 알게 해 주었다.
"아직 각지로 보낸 서찰의 답변이 모두 오지 않았습니다. 답변을 받아 보고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실로 답답한 노릇이오. 각지의 명의를 초빙하고도 고치지 못한 병을 그들이 어찌 고친다는 말이오. 방금 당가의 말을 들어 보지 않았소이까?"
황종의의 눈썹이 꿈틀한다.
황종의와 당명이 나눈 대화를 모두 들었다는 듯이 말하고 있다. 본인은 깨닫지 못한 모양이지만, 안에서 오간 대화를 훔쳐 들었다는 뜻이 아닌가?
'뻔뻔한.'
황종의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깝게도 지금 그에게는 그 사실을 지적할 힘이 없었다. 황문약이 이대로 명을 달리하기라도 한다면, 은하상단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서안에 영향력이 큰 종남과의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막대한 돈을 들여서라도 말이다.
"조금만 시간을 더 주십시오. 제가 종남을 믿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자식 된 도리로 하나라도 더 해 보고 싶은 마음이라 그렇습니다."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소. 영존께서 유명을 달리하신다면 소단주의 헛된 집착의 결과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오."
탁자 아래서 황종의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명심하겠습니다."
그 순간이었다.
"소단주님!"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화산! 화산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지금 화산이라고 했는가?"
"예! 화산입니다."
황종의의 눈이 살짝 떨렸다.
화산 역시 그가 서찰을 보낸 곳이다. 하지만 이미 세가 기울어 버린 화산에 크게 기대할 것이 없다 보니 화산으로 보내는 서찰은 가장 마지막에 출발했다.
시기를 따져 보아도 이제 막 서찰이 도착했을 텐데 벌써 사람을 보냈다는 말인가?
'혹시?'
만약 저들이 황문약의 증세에 대해 딱히 아는 것이 없었다면, 서찰을 보내지 직접 사람을 보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한 줄기 희망을 품은 황종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더없이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산?"
기목승의 눈에 살짝 노화가 인다.
화산이라는 말만으로도 그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리고 이내 거친 음성이 이어진다.
"다 망해 자빠진 것들이 수작질을 부리는구나! 여기가 어디라고!"
황종의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기목승은 서안을 염두로 두고 한 말이겠지만, 황종의는 그 말에서 기목승이 은하상단을 숫제 종남의 것으로 취급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소단주. 굳이 저런 것들을 만나 볼 필요가 없습니다. 화산이 뭘 안다고 영존의 병세를 고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황종의가 얼굴을 굳혔다.
"그렇다 해도 연락을 받고 와주신 분들입니다. 문전박대가 말이나 되겠습니까?"
"제 말을 들으셔야 합니다."
"장로님."
황종의가 두말할 것 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이곳은 은하상단입니다. 종남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흐음!"
기목승이 영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황종의는 그 반응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황급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혹시 모른다.'
천하의 명의도 고치지 못했고, 가장 이름 높은 문파들에서도 뾰족한 수를 내놓지 못했다. 그렇다면 오히려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답이 나올지도 모른다.
밖으로 나온 황종의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화산에서 오신 분들은 어디에 계시느냐?"
시비가 황종의의 말에 허리를 꺾으며 대답한다.
"입구에 계십니다."
"먼 데서 오신 손님을 입구에 세워 두었다는 말이더냐? 아무리 정신이 없다고 하나 그런 무례가 어디에 있느냐!"
순간적으로 황종의의 목소리가 격해진다. 하지만 시비는 바로 용서를 청하기는커녕 오히려 입술을 잘근거리며 입구 쪽을 슬쩍 바라본다.
"바로 모시려고 했으나……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라……."
"비켜라. 내 직접 가 뫼시겠다."
"소단주님. 하나……."
황종의가 낯빛을 굳히고는 걸음을 옮겼다. 시비의 어정쩡한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대체 언제부터 은하상단이 지위 고하에 따라 객을 나누었다는 말이던가?'
아버님께서 의식이 있으셨다면 당장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장사를 하는 이는 가장 낮은 곳에서 임해야 한다. 지위 고하와 가진 것을 바탕으로 손님의 격을 나누는 이들은 장사를 할 자격이 없다는 게 황 대인의 지론이었다.
그걸 모를 리가 없는 이들이 화산의 세가 약해졌다고, 찾아온 객을 입구에 세워 두는 무례를 범하다니.
'상단을 다시 한번 정비해야겠어!'
황종의가 내심 다짐하며 입구로 갔다.
이내 입구에 짝 다리를 짚고 서 있는 작은 아이가 보인다.
'음. 화산의 도포로군.'
새하얀 무복과 그 가슴에 새겨진 매화 문양. 의심할 것 없이 화산의 제자였다.
황종의가 청명을 보며 바로 말했다.
"소도장.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러자 어린 도사 놈의 고개가 살짝 삐딱해진다.
"아뇨. 뭐. 그럴 수도 있죠."
"제가 은하상단의 소단주인 황종의입니다. 아랫것들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제 불찰이니, 저를 탓해 주시기 바랍니다."
"괜찮다니까요. 뭐 대접받으러 온 것도 아니고."
대답이 좀 삐딱한데?
황종의가 표정을 유지한 채 말을 이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일행 분들께서는?"
"저 혼자 왔어요."
"아, 그렇군요. 일행……. 예?"
황종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지금 뭐라고?"
"혼자 왔다니까요."
눈앞에 보이는 어린 도사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씨익 웃는다.
"황 대인의 병을 고칠 방법을 가져왔으니, 어서 안내해 보세요. 아. 그리고 그 말씀하신 막대한 보상이라는 게 뭔지부터 확인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
황종의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대체 뭐지, 이 새끼는?
은하상단의 황종의가 매화검존 청명을 처음으로 만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