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49화 (50/1,567)

49화. 잘못되더라도 원망 마시고. (4)

"끄으으응."

"이거 진짜 못 해먹겠네."

삼대제자들이 끙끙대며 산문으로 들어섰다.

화음에서 장사를 하는 건 이들에게 못 할 짓이었다. 수행을 통해 마음의 평정을 얻어야 하는 도인들이다. 그런 이들에게, 속세에 찌든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은 산에서 도를 닦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행이었다.

"다 좋은데……."

물론 그건 이해할 수 있다.

이들도 돈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고, 얼마나 벌기 어려운 것인지 이해하고 있다. 당장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돈이 없어서 피죽만 먹고 살지 않았던가?

산에서 도를 닦고 무학을 익힌다고 해서, 나무껍질만 뜯어 먹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산이든 들이든, 혹은 도시든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그러니 거기까진 불만이 없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

"그냥 화음에 숙소 하나 잡아 주면 안 되나? 이게 뭔 뻘짓이야?"

"아침저녁으로 화산을 내려갔다 올라오려니 진짜 죽을 것 같습니다. 사형……."

윤종이 눈을 질끈 감았다.

평소라면 엄살 부리지 말라고 일갈했을 윤종이지만, 지금은 그런 말이 안 나온다. 그도 숨이 턱까지 차오를 지경이기 때문이다.

"……이것도 수련이라고 생각해라."

"뭐 이런 수련이……."

"아니면 너희가 사숙조들께 직접 가서 따지든가."

"……."

다들 입을 꾹 다물었다.

윗사람들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사숙조들이 하고 있는 고생에 비하면 자신들의 고생은 별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야 당장 오늘을 버티면 그만이지만, 사숙조들은 다음 날 장사를 준비한다고 아직 화산으로 복귀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형. 요즘 수련할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학을 익히러 왔지, 장사를 하러 온 게 아니잖습니까. 이럴 거였으면 고향에서 그냥 점소이나 했지, 화산에 들지 않았을 겁니다."

윤종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언제나 원하는 대로 돌아가는 건 아니잖으냐? 이것도 마찬가지다. 곧 해결이 될 테니, 그때까지만 참아 보자꾸나."

"……예, 사형."

"알겠습니다."

그래도 말이 먹히기는 하는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윤종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말은 그렇게 했다만, 이 상황이 언제쯤 나아질지.'

기약이 없다.

아니, 기약이 없는 정도가 아니다. 윤종이 보기에 상황은 좋아지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나빠지기만 했다.

그나마 이번에 화산의 편을 들었던 상인들이 알음알음 도와주지 않았다면 벌써 망하는 사업장이 나왔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상황이 좋아지려면 좋아질 만한 요소가 눈에 보여야 하는데, 보이는 것이라고는 나쁜 요소들뿐이다.

'장문인께서 대책이 있으셔야 할 텐데.'

윤종이 생각을 이어 가다가 흠칫 놀랐다.

'내가 화산 걱정을 다 하고 있구나.'

얼마 전까지는 그럴 일이 거의 없었다. 삼대제자 중 대제자이기는 하지만, 화산의 미래를 걱정하거나 고민한 적은 없다. 화산이 망하더라도 떠나면 그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새 윤종도 진지하게 화산을 걱정하고 있다.

이게 다 그 녀석이 나타난 뒤 벌어진 변화…….

"사혀어어어어어어엉!"

윤종이 눈을 질끈 감았다.

'다 좋은 변화 같건만, 왜 저놈은 날이 갈수록 철이 없어지는 것 같지?'

윤종은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오는 조걸을 바라보았다.

"사형! 사형! 큰일 났습니다!"

"진정 좀 하거라. 너는 도인이라는 놈이 그리 경박스러워서야……."

"처, 청명이……."

청명?

그 이름이 조걸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윤종의 얼굴도 하얗게 질렸다.

무슨 일인지 듣기도 전에 사람을 질리게 할 수 있는 것도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아, 아니! 일단 와 보십시오! 빨리!"

조걸이 앞서 달리기 시작하자, 윤종은 두말 없이 조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이놈이 대체 또 무슨 사고를 쳤지?'

생각할 틈도 없었다. 전력으로 달려 산문으로 들어선 윤종은 앞선 조걸을 따라 백매관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윽고 청명의 방 앞에 도착한 조걸이 문을 과격하게 열어젖힌다.

"없어?"

하지만 방 안에 청명은 없었다.

"그새 어딜 간 거냐?"

"아니요. 그게 아닙니다! 저거 보십시오. 사형."

"응?"

저거?

조걸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윤종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종이?'

청명의 침상 위에 종이 한 장이 놓여 있다. 침상 가까이 간 윤종이 그 안에 적힌 글귀를 읽었다.

일이 생겨서 며칠 다녀옴. 알아서 잘 해명할 것. 그리고 수련 빼먹으면 허리를 반대로 접어 버릴 테니 절대 빼먹지 말 것.

"……이 미친놈이."

종이를 잡은 윤종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뭐? 며칠 다녀와?

아니, 이 미친놈은 삼대제자라는 놈이 볼 일이 생겼다고 본산을 며칠이나 비우는 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어, 어떻게 합니까? 사형?"

윤종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애들 입단속시켜라."

"……그러다가 걸리면 사달 납니다."

"가서 바로 말해도 사달 나는 건 마찬가지다. 일단 며칠 내로 돌아온다고 했으니, 그때까지만이라도 어떻게든 숨겨 봐야지."

오늘 같은 일만 아니라면 윗분들이 청명 같은 삼대제자 막내를 신경 쓸 리가 없다. 운이 좋다면 들키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들키면 어쩌려고 이러는지……."

"그게 걱정이더냐?"

"예? 사형은 걱정 안 되십니까?"

"……나는 그게 아니라 다른 게 걱정이다."

"뭐가요?"

윤종이 깊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이놈이 며칠이나 자리를 비울 일이 대체 뭔지가 걱정이다. 또 얼마나 큰 사고를 치려고."

"……."

윤종의 말에 격하게 동의하는 조걸이었다.

* * *

"허억! 허억! 허억! 아오. 숨 좀 돌리고!"

청명이 옆에 보이는 나무둥치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화산에서부터 서안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더니 정신이 하나도 없고 입에서 단내가 풀풀 난다. 역시 좀 무리한 모양이다.

"아오! 내가 왕년에는 어?"

한 걸음으로 산을 뛰어넘고 어? 두어 번 휘적 하면 장강을 뛰어넘는 사람이었는데!

예전의 그였다면 화산에서 서안까지 오는데 한시진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산책하듯이 느긋하게 걸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청명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없었고, 개 발에 땀나도록 미친 듯이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오……. 시원한 냉수 한잔했으면 원이 없겠네."

이럴 때마다 숨길 수 없는 연배가 드러나는 청명이었다.

적당히 숨을 고른 청명은 고개를 들어 서안을 바라보았다.

"여기도 오랜만이네."

화음도 나름 발전한 곳이지만, 섬서의 성도인 서안과 비교할 수는 없다.

서안은 화산에 가장 인접해 있는 대도시였다. 그러다 보니 과거에도 도시를 방문해야 할 일이 있을 때마다 최우선적으로 고려를 하던 곳이 바로 서안이었다.

청명이 입맛을 다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도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

본디 화산의 제자들은 서안에 들르는 걸 선호하지 않았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서안에 가장 가까이 있는 대문파가 바로 종남이기 때문이다.

종남이 있는 종남산은 서안에서부터 불과 오십 리 남짓이었다. 그러다 보니 종남의 제자들은 심심하면 서안에 출몰했다.

화산의 제자가 서안에 갔다가 종남 놈들을 만나면?

'그 날로 둘 중 하나는 박살 나는 거지.'

종남과 화산은 사이가 안 좋다.

아니, 그냥 사이가 안 좋다는 말로 표현할 정도가 아니다. 화산과 종남은 거의 원수지간에 가깝다.

세상에 서로 사이가 안 좋은 문파가 어디 한둘이겠는가?

하지만 사이가 안 좋은 걸로 유명한 남궁세가와 하북팽가도 종남과 화산이 으르렁대는 모습을 보면 혀를 차고 손가락질을 할 정도다.

왜 그렇게 사이가 안 좋으냐고?

거꾸로 물어야지. 사이가 좋을 일이 뭐가 있냐고.

애초에 가까운 나라끼리 사이가 좋을 일이 없는 것처럼, 근처에 붙어 있는 대문파들은 사이가 좋을 수가 없다. 일단은 이권이 걸려있는 데다가 제자를 받는 것도 경쟁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니들이 세냐 우리가 세냐 하는 문제가 나오는 순간 칼 뽑는 일밖에 남지 않는다. 이건 자존심의 문제다.

게다가 화산과 종남은 같은 도가 문파다. 도가 문파치고 속가의 기질이 강하다는 점이 비슷한데, 심지어는 주력 무학이 검이라는 점마저 비슷했다.

종남과 화산을 세운 선인들께서는

'허허. 성향이 서로 비슷하니 가까운 곳에 문파를 세워 두면 후인들이 형제처럼 잘 지내겠지.'

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실제 후인들은 형제는커녕 서로를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화산도 종남파의 문인들을 만나는 걸 껄끄러워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서안에 드나드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청명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청명은 남들이 꺼려하는 일은 일단 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였고, 사형제들이 말리면 말릴수록 더더욱 서안을 드나들었다.

시비?

당연히 걸렸지.

저쪽에는 불행하게도 말이다.

'많이도 때렸지.'

이건 꼭 변명해야 하는 일이지만, 청명은 단 한 번도 종남 놈들을 찾아가서 팬 적은 없다. 청명은 그럴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그 시간에 고기 한 점 더 뜯고, 술 한 잔 더 마셔야 한다.

장문사형의 눈을 피해 음주가무를 즐길 시간도 부족한데, 그런 놈들 찾아가서 시비 걸 시간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종남 놈들은 음주가무보다 싸움박질을 즐기는 모양이었다. 청명에게 한두 번 당한 뒤로는 청명이 서안에 떴다는 말만 들어도 게거품을 물고 달려오고는 했다.

물론 오는 족족 패 버렸지만.

생각해 보면 온다고 오는 족족 패는 청명도 대단했지만, 그렇게 처맞고도 죽어라고 다시 덤비는 종남 놈들도 대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종남의 근성만은 청명도 인정한다. 이놈들은 처맞는 데 취미가 있는지, 죽도록 얻어맞아 놓고는 다시 마주치면 또 눈이 뒤집혀서 달려드는 미친놈들이었다.

아마도 그 근성이 지금의 종남을 만들었겠지.

화산이 망해 가는 와중에도 종남은 천하제일 검문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지 않는가?

물론 그것도 잠깐이겠지만.

"그래서 음……."

청명이 자신의 옷을 슬쩍 바라보았다.

급하게 오느라 도복을 벗지 못했다. 가슴팍에 수놓인 매화 문양이 오늘따라 반질반질 눈에 띈다.

"마주치면 사달 날 것 같은데……."

옷을 사서 갈아입을까?

조금 고민하던 청명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에이 설마."

이 넓은 서안에서 하필 종남 놈들을 마주치는 일이 벌어지기야 하려고. 예전처럼 종남 놈들이 청명을 찾느라 눈이 벌게진 상황도 아니고.

"별일이야 있겠어?"

일단 빨리 은하상단으로 가 버리면 종남 놈들을 마주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럼 그 돈은 내가 먹는 거고."

청명이 음흉한 미소를 짓고는 서안의 성문을 넘었다.

이 일이 얼마나 큰 평지풍파를 몰고 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