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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48화 (49/1,567)

48화. 잘못되더라도 원망 마시고. (3)

"여기 있었구나."

운암이 조금 다급해 보이는 얼굴로 청명을 향해 다가왔다.

"사숙조를 뵙습니다."

"사숙조를 뵙습니다."

조걸과 청명이 다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

운암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고는 청명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청명아."

"예, 사숙조."

"아무래도 네가 본산에 한번 다녀와야겠다."

"……예?"

본산?

화산?

청명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아니, 화산에 다녀오라는 게 그리 쉽게 나올 말인가?'

새도 오르다가 추락할 미친 산에 다녀오는 일을 무슨 심부름 가듯 말한다는 말인가?

양심 어디?

"본산에요?"

"그렇다."

청명이 뚱한 얼굴로 옆을 돌아보았다.

조걸이 청명의 시선을 깔끔하게 외면한다.

"아니, 힘 좋고 팔팔한 사형들도 많은데 왜 하필 제가……?"

"네가 막내 아니더냐."

"막내라 다리도 얇고, 경공도 약하고."

"하는 일도 제일 없고."

"……."

아.

일하기 싫어서 맡은 앞마당 청소가 이렇게 비수가 되어 돌아올 줄이야. 인생만사 새옹지마라더니.

"끄으응."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하다하다 애들 심부름까지 해야 하다니. 매화검존 청명이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다는 말인가?

"그래서 그 심부름이라는 게 무슨 일인지요?"

"서찰 하나를 장문인이나 재경각에 전달하면 되는 일이다."

"서찰?"

웬 서찰이지?

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사숙조에게 사정을 일일이 물어보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새파란 놈에게 예의를 차려야 하니 가슴이 아프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상황이 이런 것을.

"예. 사숙조 제가 가겠습니다."

"그래. 평소 같으면 놔두었다가 복귀할 사람에게 보내면 될 일이지만, 꽤 촌각을 다투는 일이라 그리 처리하기가 어렵구나. 네가 이해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

크으.

성격도 좋지.

청명이었으면 삼대제자가 구시렁대는 순간 주둥아리를 털어 버렸을 텐데.

운암이 품 안에서 서찰을 하나 꺼내 청명에게 내밀었다.

"이것이다."

"예."

그리고 운암은 혹여 청명이 궁금해할까 봐 친절하게 서찰이 무엇인지도 설명해 주었다.

"은하상단에서 온 서찰이니, 귀히 다뤄야 한다."

"네? 은하상단이요?"

조걸이 작게 말했다.

"그 황 대인의 상회가 은하상단이야."

"엥?"

청명이 서찰을 빤히 바라보았다. 운암은 청명의 시선에서 딱히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는지 설명을 계속했다.

"장문인에게 급보로 날아온 서신이다. 마침 내가 화음에 있어 중간에 받을 수 있었구나. 화산으로 물품을 전하는 이들이 가지고 올라가면 이틀은 소요될 테니, 네가 빨리 올라가 장문인께 전하도록 하거라."

"예. 알겠습니다."

"시급한 일이니 지체하지 말고 바로 출발하거라."

"예!"

청명이 서찰을 품에 넣고 화산 쪽으로 후다닥 뛰어가자 그런 청명을 지켜보던 조걸이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저……. 저!"

그러다 이내 불안한 눈으로 중얼거린다.

"쟤한테 저걸 쥐여 보내면 안 되는데?"

"음? 뭐라고 했더냐?"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숙조."

조걸이 재빨리 말을 얼버무렸다. 하지만 그의 눈은 멀어지는 청명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불안한데.'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 법이다.

* * *

"흐음."

화산 중턱까지 올라간 청명이 품 안의 서찰을 꺼냈다.

"흐으으음."

그러니까 이게 그 은하전장의 황 대인에게서 온 서찰이라 이거지?

아니. 황 대인이라는 사람은 병상에서 오락가락(?) 한다고 했으니까, 그 아랫사람들이 보낸 서찰이겠지.

"하……. 거참."

청명이 안타깝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남에게 온 편지를 뜯어보는 것은 도인의 도리가 아닐지나, 이 서찰이 하필이면 내게 들어온 것 역시 도가 아니겠는가? 모든 것은 도에 달린 것. 내가 수중에 들어온 서찰을 뜯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겠지. 그렇지 않습니까? 사형?"

- 말 같은 소리를 해라. 이 호랑말코 놈아!

"……여튼 사형은 저랑 안 맞아요."

옛날부터 그랬지 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걸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듣자 하니 사업장을 이대로 두면 개판이 될 건 뻔한 일이고, 그 황 대인이라는 작자가 나서 주면 일이 좀 수월해질 듯싶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은하전장에서 급보가 온다?

그건 황 대인의 신상에 무슨 일이 발생했다는 의미다.

아예 모르면 모를까 알고도 확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건 청명이 아닌 누구라도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겠지만, 여하튼 혹하긴 할 것이다.

청명이 서찰을 찬찬히 살폈다. 겉면에 쓰여 있는 대화산 장문인 친전(大華山長門人親傳)이라는 글씨가 눈에 확 들어온다.

그러니까 화산 장문인 말고는 뜯어보지 말라는 소리겠지.

"괜찮아. 괜찮아. 솔직히 니들도 내가 있고 장문인이 있으면 나한테 소식을 전했겠지. 장문인한테 전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다른 사람들이 들었으면 거품을 물 소리였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 청명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디보자."

밀랍으로 단단히 봉해진 서찰. 어떻게 뜯어도 흔적이 넘을 수밖에 없다.

평범한 방식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청명에게 있어서는 딱히 어렵지 않은 일이다.

"잘도 붙여 놨네."

서걱.

청명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예기가 종이와 밀랍의 경계를 정확하게 가른다. 그러자 처음부터 밀랍을 붙인 적 없는 듯 완전한 봉투만이 남았다.

봉투를 열어 그 안에 든 서찰을 꺼낸 청명이 주저 없이 펼쳐 들고 읽기 시작했다.

"자, 어디 보자……."

청명이 다리를 꼬고 서찰을 읽기 시작했다.

청명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서찰을 구길 뻔한 청명이 살짝 떨리는 손으로 서찰을 곱게 접어 봉투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이내 크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우우욱!"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한 끝에 겨우 마음이 가라앉았으나, 청명은 그러고도 완전히 진정이 되지 않은 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거, 빌어먹을 마화(魔華)잖아?"

마화(魔花).

악마의 꽃.

청명이 이를 악물었다.

"마화를 일반적인 의원들이 치료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왜냐면 이건 무공에 의한 증상이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심한 독에 중독된 것 같은 증상이 나타난다. 그렇기에 치료법을 찾는 것도 그쪽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화는 마교의 특정한 무학에 당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청명이 지금 이리 진정하지 못하는 이유도 아주 간단하다.

'마교 놈들이!'

거의 박멸해 버렸다고 생각한 마교 놈들이 중원 한가운데서 일을 벌이고 있다.

'아니, 아니지!'

청명이 자신의 뺨을 양손으로 쫘악 소리가 나도록 쳤다.

"내가 죽인 건 천마다. 마교 놈들을 모조리 죽인 게 아니지."

이 시대에 마교의 잔당들이 남아 있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천마를 죽이고도 소탕되지 않은 놈들이 화산까지 밀려들었었다고 하지 않던가?

거기서도 살아남은 놈들이 있을 테고, 십만대산에 남은 놈들도 있었을 테니 아직 그 명맥이 이어지는 게 당연하지.

문제는 놈들이 살아 있을 뿐 아니라 중원에서 뭔가를 획책하고 있다는 것.

청명의 눈이 불을 뿜었다.

"아니, 그런데 이 새끼들은 화산에 무슨 원한이라도 있나?"

왜 하는 것마다 화산에 피해를 주는 거지?

중원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황 대인을 건드려서 이 개판을 만든다는 말인가?

"아오. 뒷골 땅겨!"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거 안 되겠는데?'

아무래도 직접 가 봐야 할 것 같다.

서찰에 쓰인 내용만으로는 마화의 증상이라고 확언할 수가 없다. 직접 눈으로 보는 게 먼저다.

게다가…….

"보상! 막대한 보답!"

서찰의 마지막에 쓰인 내용이 청명의 눈을 깔끔하게 돌려 버렸다.

조걸의 말대로라면 이 은하상단이라는 곳이 돈깨나 만지는 상단일 터. 이런 곳에서 '막대한 보답'이라는 말을 썼다면 대체 얼마나 주겠다는 건가?

"이건 절대 놓칠 수 없지!"

청명의 마음이 급해졌다.

이미 세월이 백 년 가까이 흘렀으니 마화(魔花)에 대해 아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백 년간 마교와 중원이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면, 특정한 송수의 마공에 당한 증상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그리고 그 증상을 알아볼 만한 이들은 그날 십만대산의 정상에서 천마와 마교의 손에 모조리 죽었다.

하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것.

'백 년 전 살아남은 이들 중 마화를 아는 이가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직까지 살아 있다면 각 문파의 중진이 되었겠지. 아직 장문인을 맡고 있기에는 나이가 많겠지만, 혹여 이 서찰을 받은 장문인들 중 하나가 정보를 얻겠답시고 이 서찰을 보여 준다면?

"말짱 황 되는 거지! 안 돼! 그 꼴은 못 봐!"

청명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어떤 건방진 놈이 감히 청명의 먹이……. 아니! 환자를 노린다는 말인가? 이건 돈……. 아니, 도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 청명이 해결해야 하는 일이다!

암! 그렇고말고!

"바쁘다!"

청명이 서찰을 잡고, 인장에 손을 가져다 댔다. 살짝 삼매진화를 일으켜 밀랍을 녹여 붙인 청명은 그 즉시 화산 정상을 향해 가공할 속도로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일단 가져다주고!"

그래야 일이 해결돼도 저놈들이 상황 파악을 할 테니까.

"무조건 내가 먹는다!"

거기 딱 기다려.

대화산 장문인 현종 친전.

장문인. 길었던 겨울이 가고 새순이 돋아나는 봄이 오고 있습니다. 이 서찰이 도착할 쯤에는 장문인이 계시는 화산에도 봄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겠지요.

과거 아버님과 함께 방문했던 화산의 전경이 눈에 선합니다. 언제고 한번 다시 방문하겠다는 마음은 가득하지만, 상황이 허락지 않는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그동안 워낙 격조하여 이렇듯 서신을 드리는 것이 부끄럽기 한량없으나, 그럼에도 굳이 이리 연락을 드리는 것은 아버님의 용태가 나날이 나빠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아버님께서는 지난해부터 몸이 좋지 않아 병상에 들어 계십니다. 아버님의 연세를 감안한다면 납득해야 할 일이지만, 최근 들어 기이하게도 노환이라면 당연히 보여야 할 증상 대신 다른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현재 의식이 거의 없는 상황이시고, 거동이 불가능하십니다. 몸은 붉은 색으로 물들고, 미간에는 검은 빛이 돌며, 기맥이 제멋대로 날뛰는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저희 은하상단은 중원의 명의들을 초빙하여 아버님의 병세를 살피게 하였지만, 누구도 제대로 된 진단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이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인연이 있는 분들께 서찰을 보내, 병환에 대한 실마리라도 얻어 보려 합니다. 혹여 장문인께서 아버님의 증상에 대한 것을 아신다면, 어떤 방식으로라도 연락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여 아버님의 증세를 호전시킬 만한 정보를 전해 주시는 분들께는 은하상단의 이름을 걸고 할 수 있는 막대한 보답을 해 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그럼 좋은 대답을 기다리겠습니다.

은하상단 소상단주 황종의(黃宗義) 배상(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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