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잘못되더라도 원망 마시고. (2)
오랜 고난의 끝에 화산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청명의 활약으로 화산을 가장 괴롭히던 금전적인 문제가 해결되었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무학도 갖추게 되었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 화산에는 새순이 피는 봄과 같은 활력이 찾아왔고, 모두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어야 했는데…….
"평화는 얼어 죽을."
청명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쥐고 있던 빗자루가 부러질 듯 휘어졌다.
평화?
여기가 아비규환이다.
"예? 계산요? 이, 이게……. 잠시만요. 조걸 사형! 조걸 사형! 여기 얼마예요?"
"거기! 거기 물건 채우라고 했잖아!"
"모든 것은 도에 달린 것 아니겠습니까? 재료가 없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예? 환불이요? 예. 어……."
새하얀 도포를 걸친 화산의 삼대제자들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밀려오는 손님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애쓴다, 애써.'
여기가 어딘고 하니, 화음이다.
장부를 찾아내어 화음의 사업체들을 모조리 되찾아 온 것까지는 좋았다. 나름 잘 돌아가는 사업체를 열 개 넘게 인수했으니, 돈 버는 일만 남은 게 아닌가?
……라고 생각했던 게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다.
청명조차 생각하지 못한 일이지만, 이놈들은 무려 백 년 가까이 제대로 된 사업장을 굴려 본 경험이 없다. 그러니까 제 손으로는 한 푼도 벌어 본 적이 없는 생초짜들이 갑자기 열 개도 넘는 사업장을 굴려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 결과?
보시다시피.
"아니! 재료 다 떨어졌다고 한 지가 언젠데 재료가 안 오냐고!"
"재경각은 대체 뭘 하는 거야?"
"저 미친놈은 손님 붙들고 뭐 하는 거야! 야! 야 인마!"
청명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잘들 논다. 잘들 놀아.'
생전 해 본 일이라고는 칼 들고 휘두르는 것밖에 없었던 화산의 제자들이 화음으로 내려와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식은땀을 뻘뻘 흘려 대고 있는 중이다.
화선의 옛 선인들이 보았다면, 준엄하게 질책……. 아니, 배를 잡고 땅을 뒹굴었겠지.
그 제자들 중에 청명도 있으니까.
그리고 물론 손님들의 반응도 좋지 않았다.
"아니! 뭔 차가 이렇게 써!"
"엽차 달라고, 엽차! 엽차가 무슨 말인지 몰라? 이게 엽차야?"
"찻주전자에 찻잎을 그냥 때려 박아 내오는 다루가 어디 있어! 여기 주인 어디 갔어?"
내가 살아서 지옥을 다 보네.
청명이 흐뭇하게 그 몰골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오호통재라."
그나마 여기는 나은 편이다.
다른 사업장으로 끌려간 삼대제자들은 지금 무간지옥을 경험하고 있다. 아니, 그놈들을 데리고 장사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 지옥을 겪고 있겠지.
비단 팔다가 비단 찢어 먹는 놈.
호미 내오라는데 곡괭이 내오는 놈.
그래도 요리하다가 손님상에 나갈 고기 집어 먹는 놈은 이해의 여지라도 있다. 물론 뒈지게 처맞아야겠지만.
그나마 손님 응대만 하는 삼대제자들은 몸으로 구르면 그만이지만, 일대제자들은 지금 머리가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평생 도나 닦던 사람들이 속세의 풍파에 휘말리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수준이 아니라 손에 들고 있던 제기까지 내던질 판이다.
"야, 이놈아! 뭐 하고 있느냐! 빨리 쓸지 않고!"
"끄으으응. 네. 씁니다! 쓸어요!"
청명이 손에 잡은 빗자루가 획획 움직이며 다관 앞을 쓸어 내기 시작했다.
'이걸 쓸어서 무엇 하나. 온 손님들이 죄다 학을 떼고 돌아가는데.'
청명의 눈에 문을 박차고 나오는 손님들이 보였다. 그 불쾌함이 가득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당장 달려가
'저놈들을 매우 치십시오!'
하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다.
물론 현실 서열로는 화산의 막내니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는 없겠지만.
대충 빗자루로 앞의 먼지들을 밀어 낸 청명이 슬그머니 뒤쪽으로 빠졌다. 다과를 나르느라 정신이 없는 조걸이 눈에 띄었다.
"사형."
안 듣는다.
"사혀엉."
안 듣는다.
"야. 야, 인마. 야!"
귀가 막혔다.
"조걸 이 새꺄!"
"넵! 삼대제자 조거……. 뭐 인마?"
조걸이 눈을 까뒤집고 청명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사제 같지 않은 사제라지만 그래도 사제가 아닌가. 사제 놈이 막말을 해 대는데 참을 수 있는 사형이…….
"왜?"
여기 있다.
조걸이 슬쩍 주변 눈치를 보더니 다루를 빠져나와 청명에게 다가왔다.
"사형."
"그러니까 왜?"
"우리 인간적으로 이야기 좀 해 보자. 사형이 나름 유명한 상가의 막내아들이라며? 대륙전장 막내아들, 뭐 그런 거?"
"대륙전장은 얼어 죽을. 그냥 작은 상인 집안이야."
"그래도 최소한 돌아가는 걸 보는 눈은 있겠지. 원래 그렇잖아. 잘나가는 집 막내아들은 기본적으로 철없는 망나니지만, 알고 보면 대단한 재능을 숨기고 있다든가."
"……뭔 소리야?"
조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하튼 이놈과 대화만 하면 뭔 말을 하는지 알아먹을 수가 없다.
"그래서……."
청명이 슬쩍 턱짓으로 아수라장의 현장을 가리켰다.
"대체 왜 이런 사태가 벌어진 거야?"
"그야……."
조걸이 한숨을 쉬었다.
"원래 여길 맡고 있던 이들 말이야."
"응."
"그래도 그놈들이 인망은 있었던 모양이더라. 그 사람들이 그만두면서 종업원들이 덩달아 많이 그만뒀어."
"엥? 인망?"
사기꾼 새끼들이 인망이라니. 이게 무슨 탐관오리가 거지 굴에 기부하는 소린가.
"인망이라니? 그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야, 사형?"
"정확하게 말하면 인망이라기보다는, 학연 지연 혈연에 아주 철저했던 모양이더라고. 일하던 종업원들이 거의 친척이나 가족들이다 보니, 슬슬 눈치 보다가 다들 그만둬 버렸어."
크으.
이것이 가족 경영의 폐단인가. 이러니 전문 경영인을……. 아니, 이게 아니고.
"그러니까 종업원 문제라는 거지?"
"그게 첫째고."
"응? 더 있어?"
조걸은 미묘하게 눈을 찌푸리고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듣는 귀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야 그는 목소리를 낮춰 말한다.
"네가 보다시피 화산의 어른들에게 이 사업장들을 운영할 능력이 없다는 게 제일 큰 문제야."
"그런 것도 능력이 필요해?"
"도를 닦는 사람들이나, 무학을 익히고 사는 사람들은 벌어먹고 사는 문제를 쉽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게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게 아냐. 그게 쉬우면 다 부자 되지."
"하긴 그것도 그렇지만."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니까 지금 화산은 이 사업장들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
"이런 말은 조금 과하겠지만,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지. 나도 이렇게 심할 줄은 몰랐지……."
그때였다.
안쪽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보이차가 모자라다니까 철관음을 가져오면 뭘 어쩌라는 겁니까!"
"그게 그거 아닌가?"
"보이차라고 했잖습니까! 사형! 지금 안 그래도 골치 아파 죽겠는데 물건까지 바뀌면 어떻게 합니까!"
"왜 목소리를 높이고 그래! 내가 평생 이런 비싼 차를 다뤄 볼 일이 있었어야 뭘 알든 말든 할 거 아냐?"
"누군 그런 거 마셔 봤답니까!"
청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도를 닦는다는 것들이.'
그깟 찻잎 하나 바뀌었다고 성질내며 싸우고 난리다.
"저 봐."
조걸이 혀를 찼다.
"운영이라는 게 그리 간단한 게 아냐. 재료 하나, 물건 하나 모두 고르고 사야 한다고. 어설프게 좋은 재료를 고르면 수지가 맞지 않고, 그렇다고 싸구려를 사용하면 손님이 떨어지지. 제대로 못 하겠다고 업자를 고용하면 그놈들이 다 등을 쳐 먹고 일한 사람은 남는 게 없어."
"……지금부터 배우는 건?"
"나이 마흔 먹은 아저씨들 데리고 무학 가르치라고 하면 너는 할 거냐?"
"안 하지."
조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솔직히 내가 보기에는, 이대로 가면 반년 못 넘기고 여기 다 망할 거야. 예전 화산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화산은 이걸 운영할 능력이 없다. 이건 답이 없어."
"그래도 잘 배워 보면 되지 않을까?"
조걸이 허망한 눈으로 청명을 보았다.
"청명아. 잘 봐라. 지금 우리가 맡은 사업장들의 특징이 뭔지 아냐?"
"글쎄?"
"다 물건 떼다 파는 일이라는 거다."
"……응?"
"다루. 주루. 비단상. 대장간 등등. 하나같이 재료를 구해다가 뭔가를 만들거나 그대로 가져다 파는 일들이지. 이런 일의 특징이 뭔지 아냐?"
"내가 그거 알면 부자지."
"물건을 잘 고르고 떼는 데 거의 모든 게 걸려 있다는 거야. 그런데 말이다.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를 게 뻔한 순진한 도사가 돈을 들고 와서 물건을 떼려고 하면 저쪽에서 어떻게 할 것 같냐?"
"호구 잡겠지."
"그냥 호구만 잡으면 일도 아니지. 아마 뼛골까지 뽑아 먹으려고 할 거다."
"……."
"이건 글렀어. 애초부터 안 될 거였다."
청명이 고개를 돌려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장문사형.'
이 사제 이제야 장문사형의 위대함을 깨닫습니다. 사형이 있었을 때는 찰떡같이 돌아가던 사업장들인데.
'에라, 빌어먹을. 앓느니 죽지!'
청명이 콧김을 뿜었다.
"그럼 해결책이 뭔데?"
조걸이 멍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왜 나한테서 해결책을 찾아!"
"아니! 사형이 그래도 장사하는 집안의 자식이라며. 그럼 해결책이 있을 거 아냐?"
"이 미친놈아! 약초 처음 캔 사람한테 죽을병을 고쳐 달라고 하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냐! 내가 그럴 능력이 있었으면 화산에서 검 휘두르고 있었겠냐? 벌써 가문 물려받아서 떼돈 벌고 있겠지. 이건 우리 아버지가 와도 못 살려."
"……상황이 그렇게나 심각해?"
"답이 없다."
조걸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오죽하면 내가 우리 집에 연락을 해 보려고 했겠냐. 하지만 너무 먼 데다, 우리 집이 그럴 만한 여력이 없어. 이만한 사업장들을 무리 없이 운영하려면 적어도 웬만한 물품에는 다 조예가 있는 거상이어야 한다. 그런데 화산에는 그런 사람이 없어."
예전에는 있었어.
청문이라고.
근데 뭐 지금이야 없지.
조걸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황 대인만 멀쩡하셨어도 이런 걱정은 안 해도 되는데."
"황 대인?"
"응. 황 대인."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면 예전부터 그 황 대인이라는 사람이 자주 언급되던데, 그 사람이 뭐 하는 사람인데?"
"거상이지."
"거상?"
조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섬서를 기반으로 활동하시는 거상 중 한 분이셔. 청해는 물론이고, 운남과 서역의 물건까지 취급하는 분이지."
"그런데 그 사람이 화산이랑 무슨 관계가 있어?"
"그분이 예전부터 화산을 후원하셨다. 나름 유명한 이야기야. 그분이 계셔서 화산이 완전히 몰락하지 않을 수 있었지."
"……화산의 뭘 보고?"
"글쎄. 그거야 내가 알 수 없지만……."
조걸이 어깨를 으쓱한다.
"화산뿐 아니라 여러 곳을 후원하셨다고 들었다. 여튼, 그분만 계셨더라면 별문제가 없었을 거야. 여러 가지 조언을 받거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럼 그 양반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되잖아."
"안 돼. 황 대인은 지금 일 년째 병상에 계시거든. 의식이 없다는 소문도 있어."
"으음."
"그러니까……."
그때였다.
"청명! 청명 있느냐!"
청명이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목을 높였다.
"여기 있습니다!"
청명의 시선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