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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46화 (47/1,567)

46화. 잘못되더라도 원망 마시고. (1)

"이, 이게 무슨?"

운검이 기겁을 하여 현종을 바라보았다. 현종은 자신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듯이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육합……."

머릿속이 헝클어지기라도 한 듯, 상황이 정리가 되지 않는다.

육합은 오랜 세월 동안 화산을 지탱해 온 화산의 기본공이다. 검을 처음 잡는 이들이 올바른 파지법(把持法)을 익히는 것처럼, 글을 처음 배우는 이들이 천자문을 외우는 것처럼, 화산의 모든 무학은 육합을 제대로 익히는 것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세월은 흘렀고 시대는 바뀌었다. 화산은 더 이상 느려 터진 육합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배우고 빠르게 나아가야 한다.

그렇기에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진육합검을 창안한 것이 아닌가?

진육합검은 육합검과는 달리 더 빠르게 배울 수 있고, 더 실전적이다.

"장문인. 진육합이 화산에 필요하다는 건 모두가 함께 내린 결론이 아니었습니까?"

"그렇지."

"한데 이건……."

현종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그렇기에 네 의견을 들으러 온 것이다. 네가 말했다시피 진육합검을 화산의 기초 무학으로 재정립한 것은 화산의 의지였다. 하지만 선조의 말씀 역시 중한 것은 마찬가지 아니더냐?"

"……."

운검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한 정도가 아니다. 선인의 말은 후인의 이정표다. 모든 문파는 선인의 길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법이다.

그런데 이리 명확한 선인의 의지를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으으음."

"어찌 생각하느냐?"

"어찌 제가……."

"너는 화산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기본공에 있어서는 나도 네 의견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말을 해 주거라."

운검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렵구나.'

전통을 따를 것이냐, 변화를 택할 것이냐는 언제나 사람들을 고민하게 만드는 화두였다. 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장문인. 저희가 진육합검을 만들어 낸 이유는 화산에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정도는 결국 시간이 더 걸리는 법이다. 육합의 우수성을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당시의 화산은 느긋하게 제자를 키워 낼 시간이 없었다. 당장 내일 문파가 현판을 내릴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시간이 더 걸리는 길을 택할 수는 없잖은가?

"그렇기에 여쭙겠습니다. 이제는 화산이 미래를 볼 수 있습니까?"

현종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것 역시 어려운 질문이었다.

'미래라.'

화산은 산적한 문제 중 겨우 하나를 해결했을 뿐이다. 그 문제가 가장 시급하고 중한 문제이긴 했으나, 여전히 수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다.

"대답이 쉽지 않구나. 명확히 답할 수 없음을 이해하거라."

"장문인."

운검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반대입니다."

"어째서더냐?"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운검이 한숨을 내쉬었다.

진육합검과 육합검은 한 뿌리에서 나왔지만, 전혀 다른 무학이다. 애초에 무학을 구성하는 근본 자체가 다르다. 육합이 느리고 더디지만 단단하게 내리누르는 무학이라면 진육합은 쾌속하고 영활하며 경쾌한 무학이다.

"아이들은 빨리 배웁니다. 이미 저 아이들은 진육합의 무리(武理)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육합을 다시 가르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자칫하다가는 이도저도 안 되는 결과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육합을 대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안정된 하체와 진중함이 필요합니다. 이제는 너무 늦었습니다."

운검이 고개를 내저었다.

"선인께서 괜한 말을 남기시지는 않았을 겁니다. 가급적이면 저도 선인의 말씀을 따르고 싶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정말 그리 생각하느냐?"

"예. 장문인."

"육합을 깨우침에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이 뭐라 했더냐?"

"단단한 하체와 진중……."

운검이 눈을 끔벅였다. 현종이 슬그머니 고개를 틀어 수련을 하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단단한 하체?"

"……."

"진중함?"

"……."

"수련이 아주 잘됐구나?"

그거 제가 한 게 아닌데요?

그거…… 저놈이 한 건데?

운검의 시선이 가장 뒤에서 목검을 휘휘 휘젓고 있는 청명에게 가 닿았다.

'설마?'

아니겠지. 상황이 공교롭게 되었다지만, 이건 너무 무리수다. 청명이 무당도 아니고, 이 상황을 어찌 미리 예측한단 말인가?

"내가 보기에 이 아이들이 육합을 다시 익히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만?"

"……그, 그렇기는 하지만…… 아이들이 혼란스러워할까 저어됩니다."

"운검아. 그 혼란을 다스리고 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더냐?"

운검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혼란스러운 건 아이들이더냐? 아니면 너이더냐?"

"자, 장문인. 제가 잠시만 시간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음?"

"한 아이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아이?"

"배우는 것은 제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길을 알기 위해서는 무학을 배울 아이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생각이다."

가르침이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지만,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어찌 생각하는지도 중요하다.

"그럼 윤종……."

"청명아!"

현종이 뭔가 말을 하기도 전에 운검이 큰 소리로 청명을 불렀다. 대충대충 검을 휘두르고 있던 청명이 움찔하여 이쪽을 바라본다.

"이리 오거라."

운검의 말에 청명이 검을 내리고는 휘적휘적 걸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내 너에게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예. 하문하십시오."

운검이 살짝 뜸을 들이고는 입을 열었다.

"느리지만 더 높이 가는 것과, 빠르고 확실하게 가는 것 중 어느 게 더 옳다고 생각 되느냐?"

옆에서 듣던 현종이 살짝 난색을 표했다. 질문 자체가 너무 현학적이다. 아이가 받아들이기에는 과한 감이…….

'아, 맞다. 청명이지.'

저 아이는 확실히 특별한 면이 있으니 이해하고 답을 내놓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과연 청명은 깊이 고민하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이내 생각을 정리했는지 고개를 들고 운검을 바라보았다.

"높이 가는 것이 옳습니다."

"어째서냐?"

"화산이기 때문입니다."

"……."

운검이 굳은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이 대답으로 그가 받은 충격을 보여 주는 듯 그의 눈가가 잔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화산이기 때문이라.

'허허허허.'

운검이 슬쩍 고개를 돌려 현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현종은 눈을 감고 있었다. 드러난 표정만으로는 속내를 모두 알 수 없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대답이 옳은가 그른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아이의 입에서 저 대답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렇지. 우리는 화산이었지.'

그들이 잃었던 것.

화산에 대한 자부심.

그 까마득한 과거의 편린이 지금 화산의 막내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적당한 문파라면 후자를 택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화산은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화산의 이름을 만방에 다시금 알리기 위해서는 현실과 타협할 수 없습니다."

속내를 보이지 않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운검이 숨긴 속내를 찾아 대답하고 있다. 그것도 어른들이 부끄러울 만한 정론으로.

"화산이기에 타협할 수 없다는 뜻이더냐?"

"제자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알겠다."

운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로 돌아가거라."

"예."

청명이 멀어지자 운검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기 전에 현종이 먼저 입을 열었다.

"부끄럽구나."

"그렇습니다, 장문인."

"아이의 입을 통해 이런 말을 들을 줄이야. 허허. 화산이기에. 화산이기에……. 화산의 그 누가 지금의 상황에서 그런 말을 입에 올릴 수 있겠느냐."

현종이 눈을 감았다.

화산의 장문인인 그도 차마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속으로조차 생각하지 못한 대답이다. 어쩌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이기에 할 수 있었던 대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대답이 화산을 이끄는 그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화산. 화산이라."

"장문인."

운검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치기 어린아이의 말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이이기에 이런 저런 현실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겠지요."

"그렇구나."

"어려울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저 아이에게 부끄럽고 싶지는 않습니다."

현종이 침음을 흘렸다.

작은 일이 아니다. 기본공을 정하는 것은 대단히 중한 일이다.

하지만 더 중한 것은 화산의 방향을 정하는 일이다. 이 작은 대화가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커져 현종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화산이 앞으로 걸어야 할 길에 대한 선택을 말이다.

"운검은 듣거라."

"예, 장문인."

"화산장문의 이름으로 현 시간부로 화산의 기본공을 진육합검에서 육합검으로 되돌린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장로들과 협의하여 정식으로 명을 내리겠지만, 운검은 정식으로 명이 오기 전에 이 사항을 숙지하고 아이들에게 육합을 전수하도록 하라."

"예!"

운검의 눈이 단호해졌다.

화산은 화산이다.

어정쩡한 문파로 남을 수는 없다. 그들이 화산의 이름을 쓰는 한 언제나 최고가 되어야 하고 최고를 노려야 한다. 비록 몸은 개천에 담그고 있을지라도 언제나 승천하여 용이 될 날을 기다려야 한다.

그게 화산의 이름을 쓰는 자들의 의무이자 소명이다.

"육합뿐만이 아니다. 화산의 모든 무학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백매관의 관주인 너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할 것이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장문인. 화산에 받은 은혜를 그렇게라도 갚을 수 있다면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현종이 빙그레 웃고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이 아이들이 화산의 미래다.'

그들은 이루지 못했다. 어쩌면 그들 대에서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이끌 때쯤에는 천하에 화산의 이름을 다시 떨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현종은 못 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아마 지금 선계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화산의 선인들도 그를 기특하다 여길 것이다.

분명히.

'저 한심한 놈.'

자리로 돌아온 청명이 혀를 찼다.

이런 작은 것 하나도 제대로 정하지 못해서 우물쭈물하는 꼴을 보니 속이 터진다.

'그걸 물어봐야 아냐? 물어봐야? 밥을 입에 떠 넣어 줬더니 어떻게 씹는지를 물어보고 있네.'

앓느니 죽지. 앓느니 죽어.

"어휴."

"왜 갑자기 한숨이야."

"니들이 내 속을 알겠냐?"

"……뭐래."

조걸의 질문에 대충 대꾸하며 청명이 눈을 찌푸렸다.

'냉정하게 생각하자. 이놈들은 제대로 하는 게 없다. 분명히 지금 하고 있는 일도 개판이 나 있겠지.'

아무래도 화음에 한번 다녀와야 할 것 같다.

화음의 사업장들이 제대로 정리가 되어 있을지가 걱정이다. 장문인에게 맡겨 두었다가는 제대로 돌아가는 일이 하나도 없을 판이니 청명이 제대로 챙기는 수밖에 없다.

"하. 이놈의 문파는 내가 없으면 돌아가는 게 없네."

"……저 인간 뭐라는 겁니까, 사형?"

"냅둬라. 어디 하루 이틀 일이냐?"

모두가 한숨을 내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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