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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45화 (46/1,567)

45화. 화산이기 때문입니다. (5)

다음 날 아침.

아니, 아침이란 말을 붙이기도 민망한 새벽.

백매관의 문이 활짝 열렸다.

"아침이네."

"아아. 피곤하다."

"아.

이.

고. 이러다가 죽.

겠.

다."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은 하루의 시작이었고, 평소와 다를 게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분명 뭔가가 달랐다.

다 죽어 가는 병자처럼 질질 끌리던 발걸음에 미묘한 힘이 실려 있다. 그리고 피로를 호소하는 목소리도 이전 같지 않았다.

그리고.

슬쩍슬쩍 옆을 확인하는 시선에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어려 있다.

"자, 오늘 수련도 열심히 해야지."

"으음. 그렇지. 힘들지만."

"그래. 힘들지만 '열심히' 해야지."

다들 군말 없이 창고로 향했다. 그리고 가볍게 수련 도구들을 들고 연무장으로 나간다.

'후후후. 가볍구나. 가벼워.'

'몸 안에 힘이 넘치는 것 같군!'

'이거 나만 이런 걸 먹어도 괜찮은 건가? 사형제들한테 미안한데.'

'후후후후. 청명 사제가 나를 그렇게 좋게 보고 있었을 줄이야. 그 귀한 영단을 내게.'

사형제들이 주변의 눈치를 본다.

'나만 영단을 받아먹었다는 걸 알면 사형들이 섭섭해하겠지?'

'좀 미안하긴 하지만, 영단이 흔한 것도 아니고, 먹을 사람만 먹어야지.'

'혹시 나 말고도 받은 사람이 있을까?'

제각기 머리가 팽팽 돌고 있었다. 청명이 이 영단을 먹은 일은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했기에 실수로라도 이 사실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서로가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화산의 삼대제자들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영단을 먹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유?

너무도 간단하다. 영단이라는 게 그리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삼대제자 전부에게 먹일 영단을 구하려면 천 금이 넘는 돈이 필요하다. 하물며 그 돈이 있다고 해도 영단을 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그런데 청명이 미쳤다고 그 많은 영단을 구해 삼대제자 전부에게 돌리겠는가? 스스로도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삼대제자들이었다.

'그 귀한 영단을 나에게!'

'크흐! 뭔가 불끈불끈(?) 하는구나!'

더구나 영단을 먹은 이들은 그 약효를 확실하게 실감하고 있었다. 몸속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자꾸 올라온다.

아직 영단의 기운을 모두 흡수한 것도 아닌데 이 정도라면, 모두 흡수하는 순간엔 피로가 가시는 건 물론이거니와 내공도 크게 증진될 게 분명하다.

절로 의욕이 살아나고 가슴이 뛴다.

텅!

그때, 백매관의 문이 벌컥 열리며 청명이 걸어 나왔다. 청명을 확인한 삼대제자들이 대열을 맞추며 몸을 바짝 세웠다.

"음."

그 광경을 보며 청명이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좋아.'

눈이 초롱초롱하다. 얼마나 초롱초롱한지 하늘에 보이는 새벽별보다 삼대제자들의 눈이 더 빛날 지경이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청명의 입장에서야 먹어 봐야 소용도 없고, 그렇다고 가져다 팔기도 애매한 영단이지만, 이들의 입장에서는 돈 주고도 구할 수 없는 귀한 약이다.

청명이 준 영단이 어중이떠중이가 만든 게 아니라 화산의 역사와 함께한 매화단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반응이 배는 더 격해졌을 것이다.

'알고 보니 좋은 놈이었어.'

'크으. 배포도 크지. 그 귀한 영단을.'

'충성! 충성!'

삼대제자들이 뜨거운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열렬한지 천하의 청명도 민망한 얼굴로 주춤했을 정도다.

'이래서 사형이 말 안 듣는 애들한테 한 번씩 영단을 주고 그랬던 거구나?'

사람을 다루는 건 채찍만으로 안 된다는 걸 뼛속들이 실감하는 청명이었다.

"자, 그럼 오늘도 깔끔하게 시작해 볼까?"

"오오!"

청명이 턱짓으로 연화봉을 가리켰다.

"찍고 와."

"으라차아아아아아!"

"내가 오늘은 일등이다!"

"비켜! 내가 간다!"

우르르 연화봉으로 달려가는 사형제들을 보며 청명이 피식 웃었다.

'한동안은 편하겠네.'

* * *

'이상하단 말이지.'

운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앞에선 삼대제자들이 평소처럼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운검이 보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운검의 날카로운 눈은 분명한 차이를 찾아내었다.

'검로가 안정됐어.'

똑같은 검세를 전개하고 있지만, 확실히 그 날카로움과 안정감이 달라졌다.

삼대제자들을 바라보는 운검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하체가 달라졌다.'

내딛는 발에 힘이 느껴진다. 발에 힘이 붙으니 상체가 흔들리지 않고, 상체가 흔들리지 않으니 검 끝에 무게가 실린다.

좋은 일이다.

검 끝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건, 원하는 검초를 정확하게 전개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같은 검세를 수없이 연습하고 갈고 닦는 이유가 결국에는 완벽하게 검세를 전개하기 위함이라는 걸 감안하면, 더없이 좋은 변화였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

'그게 이리 단기간에 가능한 일인가?'

운검의 계산으로, 이들이 이만한 수준에 오르기 위해서는 최소 일 년이란 시간이 더 필요했다. 정말 최소로 잡은 기간이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이 년이나 삼 년의 시간이 걸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타앗!"

검이 허공을 가른다.

'어쭈?'

"으라차아아아!"

바닥으로 내디딘 진각이 땅을 울린다.

"허?"

운검이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제자들의 성취가 높아진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다.

'설마 그 새벽 수련이?'

운검의 눈이 가장 뒤쪽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청명에게로 향했다.

"……."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로 댈 건 그것뿐이다.

깊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 삼대제자들의 무위가 갑자기 상승한 것은 청명이 온 이후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청명이 삼대제자들을 데리고 수련을 시작한 이후부터다.

운검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 훈련이 그만큼 효과가 있다는 말인가?'

대단한 것을 바라고 허락한 게 아니다. 청명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었지만, 운검이 훈련을 허락한 이유는 삼대제자들끼리 자체적으로 수련해 보겠다는 그 마음이 기꺼워서다.

물론 운검 그 자신도 수련 시간을 더 확보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그저 의욕이나 조금 더 생기면 다행이라 생각했건만.'

의욕을 넘어 효과가 나오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극단적으로 말이다.

더구나 삼대제자들도 자신들의 실력이 늘고 있다는 걸 실감했는지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의욕을 가지고 수련에 임하고 있었다.

"허허."

이상한 기분이다.

백매관을 운영한 이후로 그에게 검을 배우는 제자들이 저리 용맹하게 눈을 빛내는 걸 보는 게 대체 얼마 만인가?

'부끄럽구나.'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제자들은 저리 의욕을 가지고 수련에 임하는데, 과연 그들을 가르치는 운검은 저만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가?

어쩔 수 없이 도맡은 일을 귀찮아하지는 않았던가?

운검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제자들이야말로 화산의 미래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나는 화산의 미래를 돌보는 일에 소홀했구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부끄럽다. 제자들에게도 부끄럽지만, 그를 믿고 이 일을 맡긴 장문인을 생각하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타아아아앗!"

검이 일제히 하늘을 가리킨다.

그 모습을 보며 운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구나!"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탄사였다.

"다들 검 끝이 살아 있구나."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모르겠다. 운검의 시선이 가장 뒤에 있는 청명에게로 향했다.

이상한 일이다.

화산은 딱히 변한 게 없다. 하지만 청명이 온 이후부터 자꾸만 무언가가 변하고 있었다.

화산을 가장 괴롭혀 온 재정 문제도 어이없이 해결이 되어 버렸고, 삼대제자들도 과거와는 다른 열정으로 수련에 임하고 있다. 게다가 실력이 늘어 가는 게 눈에 보이지 않는가?

이 모든 게 다 우연인가? 아니면……?

살짝 고민하던 운검이 입을 열었다.

"너희도 알다시피 원칙대로라면 너희는 칠현검(七賢劍)을 완전히 익힌 후에 태을미리검을 익히게 되어 있다. 하나, 너희들이 요즘 수련에 열정적으로 임하는 게 눈에 보이는구나. 해서, 너희가 지금처럼만 한다면 내 그 규칙을 깨고 태을미리검을 미리 전수할까 한다."

"오!"

"백매관에서 태을미리검이라니!"

삼대제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운검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열심히 하는 이들에게는 상을 준다. 상을 받은 이들은 더욱 열심히 한다. 이 선순환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이 아이들은 화산을 대표하는 검수로 자라날 것이다.

"그러니 수련을 함에 있어서 한시도 게으름이 없도록 해라!"

"예! 관주님!"

"좋다. 그럼 이번에는 진육합검을 수련하도록 해라."

기운찬 대답이 쩌렁쩌렁하게 연무장을 울렸다. 운검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재빠른 걸음으로 연무장을 향해 다가온다.

"운검 있는가?"

고개를 돌린 운검이 깜짝 놀랐다.

"자, 장문인?"

서둘러 예를 표한 운검이 의아한 눈으로 현종을 바라보았다. 현종이 백매관의 연무장을 찾는 일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사가 다망한 현종 아니던가?

"수고가 많구나. 내 전할 말이 있으니 잠시 시간을 내어 줄 수 있겠느냐?"

"예! 장문인."

운검이 고개를 돌려 삼대제자들에게 소리쳤다.

"너희는 진육합검을 익히고 있……."

"칠현검을 익히고 있도록 하거라."

"……."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현종을 보며 운검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뭔가 이유가 있겠거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을 두고 백매관 뒤쪽으로 돌아간 운검이 조용히 현종의 말을 기다렸다.

"운검아."

"예! 장문인."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예?"

현종이 소매에서 한 장의 서책을 꺼내어 운검에게 내민다. 그 안색이 자못 어두웠다. 운검이 책을 받아 들며 물었다.

"이게?"

"그 궤에서 나온 비급이다.."

"아……."

현종과 서책을 번갈아 보던 운검이 읽어 보라는 현종의 턱짓을 보고는 서둘러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장문인 이건…… 육합권이 아닙니까?"

"그렇다. 육합권이지."

운검이 미간을 좁혔다.

육합은 화산의 기본공이었던 무학이다. 하지만 이제는 진육합권으로 대체되었다. 더 이상 육합권은 화산에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이걸 제게……."

"다 보았느냐?"

"예."

"나도 처음 그걸 발견했을 때는 너처럼 내용만 읽었다. 워낙 정신이 없고 경황이 없었으니까."

"……예?"

"마지막 장을 확인해 보거라. 뒤에도 글이 있다."

"아?"

운검이 서둘러 비급을 다시 펼쳐 들었다. 이내, 거기에 적혀 있는 글귀를 본 운검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서찰을 잡은 운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후인에게 전한다.

후인이 화산의 무학을 발전시키고 변형시키는 것은 탓할 일이 아니다. 무학이란 끊임없이 변하고 발전해야만 한다.

하나, 육합은 화산의 기본이자 화산의 뼈대이다. 육합을 변형시킨다는 것은 화산의 얼을 뒤트는 것과 다르지 않다.

후인은 이 사실을 반드시 명심하길 바란다.

혹여 육합을 변형시키는 종자가 있다면, 훗날 선계에서 마주했을 때 각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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