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화산이기 때문입니다. (4)
"끄으……."
입에서 숨이 뿜어질 때마다 흙먼지가 날린다.
조걸은 입으로 밀려들어 오는 흙먼지를 뱉어 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꿈틀거렸다.
'미쳤어.'
몸에 힘이 안 들어간다. 얼마나 굴렀는지 하늘이 노랗고, 의식이 순간순간 날아갈 지경이다. 그가 이런 판인데 다른 이들은 오죽하겠는가?
그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멸.
단 한 사람도 서 있지 못했다. 아니, 서 있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다들 시체처럼 바닥에 뻗어서 헐떡이고 있다. 그나마 윤종만이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앉아 상체를 일으키고 있을 뿐이다.
'사형.'
조걸의 가슴속부터 존경심이 마구마구 솟아났다.
사실 실력만 두고 보자면 조걸이 윤종보다 조금 더 강한 편이다. 검을 쓰는 재능과 승부의 감각에서 조걸이 윤종보다 확실히 앞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조걸은 윤종이 왜 대사형인지를 뼈저리게 실감했다.
조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데 같은 수련을 한 윤종은 그래도 드러눕지 않고 앉은 채 숨을 가다듬고 있다. 이건 실력의 문제가 아니다. 정신력의 문제다.
그가 할 수 없는 것을 해내는 사형을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반면에…….
조걸의 시선이 반대쪽으로 돌아간다.
"으ㅤㅆㅑㅤ! 으라차! 으라라라라라라아!"
"……."
조걸의 눈에 자기 덩치보다 세 배는 큰 모래주머니들을 지고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청명의 모습이 들어왔다. 얼마나 빠르게 앉았다 서기를 반복하는지 거의 잔상이 보일 지경이다.
"훅! 훅! 훅! 에이! 뭐가 이렇게 가벼워! 야, 수련 끝난 사람 모래주머니 나한테 넘……. 뭐야? 왜 다 누워 있어?"
'괴물 같은 새끼.'
조걸이 빠득빠득 이를 갈았다.
그들이 소화한 수련량은 어마어마했다. 청명은 며칠 전부터 아주 작정을 했는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삼대제자들을 몰아붙였다. 덕분에 이 꼴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무런 반발을 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다. 청명이 바로 눈앞에서 그들의 다섯 배는 되는 양을 소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기가 있고 승부욕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상황에서 불만을 토로할 수가 없다. 속으로는 불만이 넘치더라도 다른 이들의 눈치가 보여서라도 입을 닫아 버리기 마련 아닌가?
그런데 심지어 청명은 그만한 양을 소화하고도 힘든 기색도 없이 수련을 이어 가고 있었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터어엉!
청명이 지고 있던 모래주머니들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그러고는 혀를 찬다.
"뭐 얼마나 했다고 다 퍼져서는. 에잉! 요즘 애들은 대가 약해. 나 때는 안 그랬는데."
'네가 제일 어리거든, 인마?'
제일 어린놈이 어디서 요즘 애들질이야!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 할 테니까. 밥 먹고 오후 수련 하면 된다. 수련 시간에 졸거나 딴짓하는 놈은 내일 수련량 두 배로 늘릴 테니까 그렇게 알고."
'악마!'
'마귀!'
'개새끼!'
마음속으로나마 처절하게 욕을 해 보지만, 제아무리 청명이라 해도 남의 마음을 읽는 재주는 없었다. 안타깝게도 말이다.
"그럼 간다. 수련 도구 정리 잘해 놔라."
휘적휘적 백매관으로 걸어가는 청명을 보며 삼대제자들이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고기.
고기가 눈에 보인다.
요즘 화산에는 돈이 넘쳐나는지 끼니마다 고기가 나오고 있다. 심지어 처음 보는 숙수(熟手)들이 식당을 드나드는 걸 보면, 새로 사람을 고용한 모양이었다.
고기라면 눈에 불을 켜던 삼대제자들이지만, 지금은 식탁에 앉은 지 한참 되었음에도 고기에 손을 대는 이가 없었다.
"……먹어."
윤종이 힘없이 말했지만 아무도 젓가락을 들지 않는다.
"……먹으면 토할 것 같아서."
"입맛이 없습니다."
"고기를 보는데 토악질이 쏠리다니. 내가 죽을 때가 됐나."
다들 차마 입에 뭘 넣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대사형."
"……왜?"
"이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윤종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성토가 끝나는 건 아니었다.
"이게……. 아니, 그러니까 저희도 수련을 하는 건 좋다 이겁니다. 사실 그동안 저희가 화산에 올라서 수련에 전념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 어설프게 시간을 때우느니 그 시간에 제대로 수련해서 뭐 하나라도 얻는 게 낫다는 것도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이건 수련이 너무 과합니다. 전신에 성한 곳이 없습니다."
다른 사형제들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이러다 죽습니다, 사형."
"전에는 좀 버틸 만했는데, 요즘에는 정말 죽을 것 같습니다."
"방에만 들어가면 시체처럼 잠에 듭니다. 잠들 때마다 자다가 죽는 게 아닌가 싶어서 덜컥 겁이 납니다."
"젓가락을 못 들겠어요. 손이 달달 떨려서."
윤종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게 말해 봐야……."
"그래도 사형이 말하면 듣는 척이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대사형이잖습니까."
윤종이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건 틀린 말은 아니다.'
예전에 비슷한 경우가 있을 때는 조걸과 윤종이 불만을 찍어 눌렀다. 하지만 지금은 단순히 그리 처리할 일이 아니다.
윤종도 한계에 달해 있었다.
수련을 하며 피로가 쌓이면 그 피로를 풀어야 다음 수련에 지장이 없는 법인데, 최근의 청명은 무슨 생각인지 피로를 회복할 틈을 주지 않고 사람을 몰아붙였다.
매일매일 한계를 넘는 느낌이다. 오죽하면 윤종도 새벽 수련을 나가는데 두려움을 다 느꼈겠는가?
윤종이 슬쩍 조걸을 돌아보았다.
"걸아."
"예. 사형."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음……."
조걸이 침음을 흘리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삼대제자 중에서는 윤종 다음으로, 어쩌면 윤종 이상으로 발언력이 큰 사람이 바로 조걸이다.
"솔직히 좀 무리이긴 합니다."
"그렇지?"
"이건 몸이 못 버팁니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강도가 더 심해지고 있다는 거죠. 저도 강도 있는 수련은 환영하는 바지만, 이건 너무 가혹합니다."
"……으음."
"쇠는 두드릴수록 단단해지지만, 사람의 몸은 두드리면 망가지는 법입니다."
"그럼 너는 어찌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문제는……."
조걸이 눈가를 실룩인다.
"그 새……. 아니, 청명이 이런 이치를 모를 리가 없다는 겁니다."
"끄응."
윤종이 신음을 흘렸다.
그 역시 정확히 같은 생각이었다. 지금 하고 있는 수련은 말이 안 된다. 그런데 자신이 과도한 수련을 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청명이 모른다는 건 더 말이 안 된다.
왜냐면 청명이니까.
"일단은 조금만 더 버텨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도 달라지는 게 없다면 그때는 말을 해야지요."
"그러자꾸나. 그러면 나부터 참지 않겠다."
조걸과 윤종의 대화가 끝나자 다들 수긍하는 얼굴들이었다. 일단은 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항의를 하겠단 대답을 들었다는 게 중요하다.
그 항의가 먹힐지 안 먹힐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일단은 밥을 먹자꾸나. 들어가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밀어 넣어라. 오후에도 수련을 해야 하는데, 힘없는 모습을 보이면 사숙조께서 경을 치실 것이다."
"끄응."
"잘 먹겠습니다."
"어휴."
다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꾸역꾸역 젓가락을 들었다. 그 안쓰러운 모습들을 보며 조걸이 작게 혀를 찼다.
"끄으응."
조걸은 힘겹게 침상으로 향했다.
'진짜 이러다 죽을 것 같은데.'
씻은 게 용하다. 전신이 먼지로 뒤덮여 있건 말건 그냥 침상으로 돌진해서 뻗어 버리고 싶었지만, 필사적인 의지로 옷을 빨고 몸을 씻은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었다.
덕분에 눈꺼풀은 천근만근이고, 전신에는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걸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풀썩.
딱딱한 침상으로 엎어진 조걸이 자신도 한숨을 토했다.
'자고 일어나면 또 수련이지.'
사실 조걸은 청명의 수련 방식에 불만이 없었다. 아무리 가혹해도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결국에는 그 모든 수련이 자신을 강하게 만들 테니까.
하지만 최근에는 조금 의문이 든다.
이러다가 몸이 먼저 망가지는 게 아닐까? 육체가 이 수련을 계속 버틸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의문이 깊어지기도 전에 수마가 밀려온다. 조걸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밀려오는 잠에 자신을 맡겼다.
"사형."
"……으음."
"사형. 일어나 봐. 사형."
"음?"
조걸이 힘겹게 눈을 떴다. 희미한 시야에 사람의 형체가 들어온다.
"누구!"
벌떡 일어나려는 조걸을 묵직한 손길이 내리누른다.
"소란 피우지 말고 조용히 일어나 봐."
"청명?"
"얼른."
이 미친놈이 이 밤에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조걸의 방까지 쳐들어왔다는 말인가? 문은 또 어떻게 열었고.
"……무슨 일이냐?"
조걸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꽤 잔 것 같은데 피로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몸이 무거우니 절로 짜증이 치솟았다.
그 순간, 청명이 그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자."
청명의 손 위에 놓인 작은 환약을 본 조걸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뭐지?"
"영약."
"뭐?"
"쉬이이잇."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어 버린 조걸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거 어렵게 구한 거야. 내가 사형이니까 주는 거야."
"지, 진짜 영약이라고?"
"속고만 살았나? 향만 맡아도 감이 올 텐데?"
진짜다.
조금 전부터 청아한 향이 조걸의 코를 콕콕 찔러 대고 있었다. 그럼에도 반문한 이유는 도무지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영약이 무엇인가? 내공을 증진시키고 몸을 정화해 주는 약이다. 강호에서는 최상급의 영약이 어딘가에 있다는 소문만으로도 혈겁이 벌어지고 사람이 죽어 나간다.
그 정도의 영약이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내공을 증진시켜 주는 효능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값어치는 같은 양의 황금을 아득하게 능가한다.
그런데 그 영약을 남에게 준다고?
"독 안 들었어."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조걸이 소리를 지르려다 심호흡을 했다.
"나한테 이걸 왜 주는 거냐? 네가 먹으면 될 텐데?"
"사형한테 필요하니까."
"……."
"빨리 먹어. 다른 사람들 알기 전에. 그리고 내가 영약 줬다는 건 절대 비밀이야. 사형한테만 주는 거니까."
"……너."
조걸이 입을 벙긋거리다 닫았다.
이걸 정말 먹어도 되나?
평소였다면 여러 가지 고민을 했겠지만, 극도의 피곤함을 견디고 있는 조걸은 평소처럼 영활하게 머리를 굴리지 못했다. 게다가 저 환약이 정말 영약이 맞긴 한 모양이었다. 그 증거로, 피곤에 지친 몸이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일단 먹어. 내가 도인해 줄 테니까."
"……진짜 먹어도 되냐?"
"내가 사형이라 주는 거라니까."
청명이 손에 든 환약을 튕겼다. 조걸이 뭔가 반응하기도 전에 입 안으로 쑥 들어온 환약이 사르르 녹으며 식도를 타고 넘어간다.
직감적으로 이게 진짜 영약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일단 도인은 해 줄 테지만, 절대 급하게 흡수하지 마. 최소 한 달의 시간을 두고 천천히 흡수하면 돼."
"아, 알았다."
"뒤돌아. 지금부터 도인할 테니까."
조걸이 살짝 감동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가부좌를 틀었다. 그 등을 바라보며 청명이 사악하게 웃었다.
'목이 마른 사람한테 물을 줘야 고마운 줄 아는 법이지.'
내일 수련장에 나올 사형제들이 어떤 눈빛을 보여 줄지 벌써부터 궁금한 청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