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화산이기 때문입니다. (1)
"끄으으으으응!"
어두운 동굴.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빈 동굴 속으로 붕대 감긴 손이 밀고 들어온다.
"끄으으으으으으으……."
그리고 이내 더 일그러질 수는 없을 것 같은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으아아아아아아!"
턱! 턱!
양손을 뻗어 바닥을 움켜잡은 청명이 동굴 안으로 빨빨 기어 들어간다.
"후욱! 후욱! 후욱! 매화검존 이 미친 새끼!"
무슨 생각으로 이런 데다 은신처를 만들어 놓고 산다는 말인가? 산에서 무공만 익히다 보니 머리가 돌아 버렸나?
아, 매화검존이 나지.
"아이고, 죽겠다."
청명이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어떻게든 동굴까지 올라왔다는 게 실감이 나니 이상하게 눈물이 나려고 한다.
'진짜로 뒈질 뻔했지.'
멀쩡한 몸으로도 오르지 못했던 절벽을 양손이 부러진 채 오른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머리라는 게 존재하고 생각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면, 부족함을 알고 후일을 기약했을 터.
그러나 안타깝게도 청명은 머리는 존재하지만 생각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지금 못 오르면 시간이 또 걸린다니까!"
혼자 변명이라도 하는 듯 발악처럼 소리친 청명이 다시 앓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드러눕는다.
"아이고. 늙은이 죽네."
아니, 이제 어린이지. 한 번씩 이렇게 헷갈린다.
그래도 어찌어찌 튼튼한 줄을 만들어 들어오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이번에도 줄이 끊어졌으면 정말 염라대왕을 만나러 갔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마 염라대왕도 웃음을 참느라 고생했겠지.
그 꼴을 안 본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끄응."
우두둑거리는 허리를 억지로 펴 몸을 일으킨 청명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에 뵈는 게 없다.
아파서가 아니라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인다.
"쯧. 이쯤이 아마……."
더듬더듬 손을 뻗자 무언가가 손끝에 걸린다.
"그렇지."
손끝에 잡힌 것을 훅 잡아당기자 천이 걷히며 안쪽이 확 밝아진다. 빛을 내는 그것을 바라보며 청명은 피식 웃었다.
"진짜 나도 대책이 없었네."
야명주의 빛이 참으로 영롱하고 선명했다.
동굴 안에서는 불을 피울 수가 없다. 입구가 아래로 나 있는 구조다 보니, 불을 피우면 금세 동굴 내부가 연기로 가득 차 버린다.
제아무리 청명이라고 해도 그 매캐한 연기 속에서 술을 마실 수는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가능은 하지만, 뭐 고행도 아니고 그런 짓거리를 왜 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야명주를 가져다 박아 놨네.'
저게 돈이 얼만데.
'화산에 들어온 상납품 중 하나를 슬쩍했었지.'
그때는 워낙 많은 것들이 오고가다 보니 저런 것 하나 슬쩍한다 해도 전혀 티 나지 않았다. 나중에야 장부 맞추느라 장문사형과 재경각에서 피를 토했겠지만 뭐.
"이미 지나간 일을 어쩌겠어."
새삼 과거의 매화검존이 얼마나 대책 없는 인간이었는지 실감하는 청명이었다.
아, 그게 나지.
자꾸 까먹네.
청명은 밝아진 동굴 내부를 차분히 둘러보았다.
"흐음."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내부에 있는 것은 편히 몸을 뉘일 침상과 작은 다탁 하나, 그리고 궤짝 하나가 전부였다.
그런데도 뭔가 고풍스럽다. 세월이 흘러 풍화되었는지 별것 아닌 것들도 뭔가 있어 보인다.
"이야. 이게 이렇게 되는 거구나?"
새삼 깨달음이 몰려왔다.
청명이 다시 살아나지 않고 그대로 죽은 다음, 먼 훗날 화산의 누군가가 이곳을 발견했다면? 전대 고수의 은거지라고 생각하고 난리가 나지 않았을까?
혹여나 절벽에서 떨어지다가 우연히 발견해 들어오기라도 했다면?
"그게 절벽신공이지. 절벽신공."
실제로는 그냥 짱박혀서 술 처먹던 곳인데, 후인들의 눈에는 절대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동굴 안에 분명 숨겨진 비밀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온갖 짓을 다 했을 것이다.
"알고 보면 절벽신공이 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거 아닌가?"
청명이 피식 웃고는 궤짝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거침없는 손길로 뚜껑을 연다. 거의 백 년 동안 쌓여 있던 먼지가 매캐하게 피어올랐다.
"콜록! 어휴! 콜록!"
손사래를 쳐 먼지를 밀어 낸 청명이 궤짝 안쪽을 살폈다.
일단 눈에 들어오는 것은 술병. 각양각색의 술병을 보니 절로 침이 흐르…….
아니, 아니지! 지금 술이 중요한 게 아니지.
시야에서 필사적으로 술병을 밀어 낸 청명은 옆에 놓인 작은 상자로 시선을 옮겼다.
'이거다!'
청명이 냉큼 상자를 잡아 꺼낸다. 기억했던 것보다 좀 더 크고 묵직하다.
"후우우우."
깊게 숨을 들이마신 청명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상자의 뚜껑을 연다. 동시에, 짙은 매화향이 동굴 안으로 퍼져 나간다.
만발한 매화나무가 주변을 가득 채운 것 같은 느낌이다.
딸깍.
뚜껑을 완전히 열어젖히자 상자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동그란 단환이 보인다. 상자의 바닥에 자잘한 무언가가 깔려 있고 그 위로 눈처럼 새하얀 단환 다섯 개가 놓여 있다.
"크으!"
감동이 물밀 듯 밀려든다.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바닥에 깔린 것들은 단순히 단환을 보호하기 위한 완충재가 아니다.
바로 매화단이다.
"진짜 또라이네."
아무리 매화단이 흔했다지만, 저걸 저렇게 쌓아서 꿍쳐 놓다니. 사람이 얼마나 욕심이 많으면 이런 짓을 벌인다는 말인가? 장문사형이 이 꼴을 봤다면 뒷목을 잡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래도 자소단은 안 꿍쳤잖아요. 사형."
괜한 민망함에 슬쩍 변명을 해 보는 청명이었다.
사실 안 꿍친 건 아니다. 정확히는, 자소단에 손댈 수가 없었다. 소림의 대환단처럼 자소단은 화산 내에서도 최상급으로 취급되는 영약이었다. 때문에 아무리 화산의 장로라고 해도 함부로 손댈 수 없었다.
의약당과 장문인의 허가가 동시에 있어야 반출이 가능한 물건이 바로 자소단이다.
그 외의 매화단 정도는 장로 신분이면 얼마든지 가져갈 수 있다. 물론 설매단을 건드리기 위해서는 장로들 중에서도 힘이 막강한 장로여야 하지만 청명이 누구인가? 화산 최고수인 매화검존이다.
-화산 최고의 사고뭉치겠지!
어디선가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
"아무려면 어때."
일단은 지금 환단을 손에 넣었다는 게 중요하다. 이것만 있으면 몸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청명이 상자 안에서 설매단 하나를 꺼내 들고는 조심스레 뚜껑을 닫았다. 예전에는 숙취 해소제로 마구 쓰던 물건이지만, 입장이 바뀌면 물건의 가치도 달라지는 법. 지금 청명에게 이 영약들은 무가지보(無價之寶)나 다름없었다.
"아, 살 떨려."
상자를 궤짝 안에 조심스레 내려놓은 청명은 손에 들린 설매단을 소중하게 바라보았다.
새하얀 환약에서 청아한 향이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그 향만 맡아도 몸이 회복되는 기분이었다.
"사람은 있을 때는 소중함을 모른다더니."
예전의 화산이 천하제일문파의 자리를 넘보던 때는 설매단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귀하게 여겼던 건 오직 자소단이었다.
그러니 청명이 매화단을 이리 많이 챙길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단순히 청명만 그런 게 아니다. 화산 내에 그런 분위기가 만연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더 좋은 영단이 부족하지 않을 만큼 있는데, 누가 하급 영단에 관심을 주겠는가?
하지만 처지가 이렇게 되니 그때는 별것 아니었던 영단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아이고. 내 처지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
앓느니 죽어야지.
청명이 즉시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신세 한탄은 나중에 해도 충분하다. 지금은 일단 몸을 완전하게 회복해야 한다. 그 와중에 내력을 조금 더 쌓을 수 있다면 좋고.
가부좌를 튼 청명이 입 안으로 설매단을 던져 넣었다. 입 안에 들어온 설매단은 씹을 틈도 없이 사르르 녹아 절로 목을 타고 넘어간다.
입 안에 청아한 향이 가득 퍼졌다.
하지만 청명은 그 향을 느낄 새도 없이 운기를 시작했다.
영단을 먹는다고 저절로 내력이 느는 게 아니다. 그 영단의 기운을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어야 내력을 증진시킬 수 있다.
여기에서 미묘한 문제가 발생한다.
내력이 부족하고 나이가 어릴 때는 영단을 먹어도 완전히 흡수할 수가 없다. 기운을 운용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기운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는?
그래도 효과가 완전하지는 않다. 이미 내력이 많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영단이라는 것은 부족한 것을 채우는 법. 이미 차 있는 것을 더 높여 주지는 못한다.
'영단을 먹는 족족 내력이 차면 소림 놈들은 대환단을 열 개씩 씹어 먹고 천하제일 땡중이 되었겠지.'
이렇듯 영약이란 부족한 내기를 채워 주는 것. 어리고 약할수록 효과가 있지만, 반대로 어린 아해들은 영약의 기운을 완전히 흡수할 수가 없다.
하지만 청명은?
'아주 골수까지 빨아먹을 수 있지!'
여기에 천하에 단 하나뿐인, 기운의 운용이 완벽한 어린아이가 있다.
그야말로 전설로만 전해지는, 경력 있는 신입. 아니, 경력이 끝내주는 신입이다.
"후우."
배 속으로 들어온 설매단이 기혈을 타고 치달리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웅.
몸 안에서 기운이 약동한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거대한 기운에 절로 뿌듯함이 느껴진다.
'긴장해야지!'
세맥을 뚫고 빠져나가지 못하게 기운으로 갈무리해서 단전을 채워 넣는 것? 그건 지금의 청명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청명이 지금 해야 하는 건 그리 간단한 게 아니었다.
불완전한 선천지기를 채워 넣어야 한다.
두껍고 무디던 의식이 칼날처럼 예리해진다. 하지만 청명은 거기에서 더 나아갔다. 의식을 갈고 갈아 뾰족한 바늘처럼 날카롭게 벼려 낸 청명이 완벽하게 설매단의 기운을 통제해 단전으로 밀어 넣었다.
'조심. 조심.'
갓난아기를 다루듯 부드럽고 섬세하게.
내부로 침전해 들어간 청명의 심상 속에 자신의 단전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청명의 목표는 단전이 아니다. 저 단전에서도 가장 깊은 곳.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품고 있는 근원이 있는 곳.
'안 돼!'
기운을 이끌고 단전으로 밀고 들어가려던 청명이 돌연 휘몰아치는 기운을 되돌렸다.
'불순하다.'
기본적으로 영단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영약의 좋은 기운만을 뽑아 섭취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영약을 정제하여 순수한 기운만을 뽑아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화산이 자랑하는 설매단도 청명의 단전에 들기에는 너무 불순한 부분이 많았다. 청명의 단전 안에 흐르는 기운이 티 없이 맑은 산속의 청정수라면, 설매단의 기운은 고여서 썩어 버린 물처럼 느껴질 정도다.
청명은 단호하게 결단을 내렸다.
'걸러 낸다!'
이대로 설매단의 기운을 걸러 낸다면 약효 대부분을 버려야 한다. 그건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 기운 모두를 받아들이는 건 의미가 없다. 그는 가장 완전하고 완벽한 토대를 만들어 내기 위해 지금까지 먼 길을 돌아오지 않았는가? 당장의 급한 마음으로 일을 그르칠 수는 없다.
'가장 순수한 기운만을 남기고 모두 버린다!'
기운이 청명의 몸을 타고 돌았다. 그러면서 조금씩 깎여 나간다. 설매단에 섞여 있던 불순물이 청명의 육체에 있던 불순물과 뒤섞여 몸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내 청명의 몸에서 진득하고 시커먼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