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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40화 (41/1,567)

40화. 거지도 안 주워 갈 문파 같으니! (5)

청명이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위로 올렸다. 입을 악다문 그의 턱이 조금 더 위로 꺾인다.

조금 더.

조금 더.

그리고 조금 더.

"……."

부러지기 직전까지 목을 젖히고서야 청명은 자신이 원하는 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

깎아지른 절벽.

끝도 없이 높다 못해 꼭대기는 운무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무시무시한 절벽이 청명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미친놈."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화산에 사는 이들은 이 절벽을 단장애(斷腸崖)라고 부른다. 오악(五岳) 중에서도 가장 험준하기로 유명한 화산에서, 가장 높고 위험한 절벽이 바로 이곳 단장애다.

그리고 이 위험한 절벽의 한가운데에 청명이 지금 찾으려는 곳이 있었다.

화산의 수많은 비지(?

地) 중에서도 가장 비밀스러운 곳. 화산에서도 극소수. 그중에서도 극소수만 아는 곳!

"그야, 나만 아니까."

이 절벽의 중앙쯤에는 직접 오르지 않고서는 찾을 수 없는 작은 동굴이 있다.

단장애는 그 위험성 때문에 문도들의 경공 수련이 금지된 곳이다. 하지만 청명은 태생적으로 하지 말라는 건 꼭 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청개구리인지라 단장애에서 경공 수련을 즐겨 했다.

그러다 우연히 단장애의 중턱에 작은 동굴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때부터 전용 은신처로 사용한 것이다.

"많은 도움이 됐지."

예를 들면 장문사형의 눈을 피해 술을 마신다거나, 혹은 장문사형의 눈을 피해서 고기를 뜯는다거나, 또는 장문사형의 눈을 피해 낮잠을…….

"장문사형."

왜 저를 살려 두셨습니까?

때려죽이시지.

입장이 바뀌어 보니 장문사형이 왜 그리 청명만 보면 버럭질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청명이 그 입장이었으면 때려죽였겠지.

하지만 지금 청명은 굳이 입장을 바꾸지 않아도 예전의 청명을 때려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미친놈이……."

목이 꺾일 것 같다.

제정신이 박힌 놈이면 이런 절벽의 한가운데를 처소로 쓸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청명쯤 되는 또라이니까 이런 짓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피해는 지금의 청명이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매화검존 청명이었다면 이런 절벽쯤이야 두어 번의 도움닫기만으로도 오를 수 있지만, 화산의 삼대제자 청명은 이 절벽을 오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단장애가 왜 단장애인가!

발 디딜 곳도 없고, 잡을 곳도 없다. 절벽이 얼마나 반들반들한지 보는 사람의 마음이 절로 시원해질 정도다.

이 절벽은 원래 이랬다.

혹시나 다른 이들이 이 동굴을 발견할까 봐 청명이 중간중간 절벽을 반듯하게 깎아 놨기 때문은 절대 아니다.

"……가지가지 했다 진짜."

예전의 자신에게 살의를 느끼다니. 세상의 누가 이런 경험을 해 보겠는가?

"후우."

깊게 한숨을 내쉰 청명은 이내 단호한 눈으로 절벽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간다!"

뒤는 없다.

누군가 왜 절벽을 오르느냐 묻는다면 청명은 이리 대답할 것이다.

"저기 영약이 있다고! 빌어먹을!"

청명의 기억이 확실하다면 바로 저 동굴에 매화단과 설매단이 있다!

왜냐면 저기가 청명이 술을 퍼먹고 드러누워 자던 곳이니까. 숙취 해소용으로 매화단을 꿍쳐 놓은 곳이다.

'나 진짜 대책 없었네.'

아무리 발에 채였다지만 그래도 영단인데, 그걸 숙취 해소용으로 쓰겠다고 동굴에 짱박아 놓다니. 제정신인 놈이 할 짓이 아니다.

하지만 덕분에 지금의 청명이 기회를 얻은 것도 사실이지.

청명이 결연한 얼굴로 단장애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반대편의 숲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후우우우우우우."

청명이 깊게 심호흡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미친 짓인데."

청명은 지금 단장애의 정상에 서 있었다. 반대쪽 능선으로 돌아 올라온 것이다. 그의 손에는 넝쿨을 엮어 만든 긴 밧줄이 들려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단장애의 아래에서 동굴까지 오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저 반질반질한 절벽을 타고 오르는 게 버겁기도 하고, 그 높이가 너무 높기도 하다.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청명이 오르기에는 너무 가혹한 절벽이다.

하지만 위에서 내려간다면? 밑에서 오르는 것보다는 훨씬 쉽다.

딱 하나 문제가 있다면…….

"한 열 배쯤 위험하다는 것뿐이지."

슬쩍 아래를 내려다본 청명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거라고는 깎아지른 절벽과, 그 절벽 가운데 걸린 운무뿐이다.

가만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심장을 움켜쥐었다.

"아 씨. 살 떨려."

예전에는 정원처럼 산책하던 곳이건만, 지금은 지옥으로 들어가는 입구 같다. 맨정신에 밧줄 하나로 이곳을 내려간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하지만 세상에는 하고 싶어서 하는 일과 해야 해서 하는 일이 따로 있다. 이건 명백한 후자였다.

"한 번 죽지, 두 번 죽……. 아니, 두 번 죽는구나."

청명은 일단 손에 든 밧줄을 근처에 보이는 돌부리에 단단히 묶었다. 이 줄이 그의 생명 줄이다. 묶인 줄을 몇 번이나 당겨 확인한 후 심호흡을 하며 절벽 끝에 가 선다.

"하아."

화산파 살리기 더럽게 힘드네. 이게 뭐라고 목숨까지 걸어야 하나.

"제길!"

욕지거리를 내뱉은 청명이 과감하게 절벽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빤들빤들한 절벽을 타고 내려가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도 찾기 어렵다. 청명은 티끌만 한 틈에 몸을 의지하고, 틈이 없으면 흡자결(吸字訣)로 벽에 달라붙었다.

한참을 낑낑대며 절벽을 내려가던 청명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절로 쏟아져 나온다.

"아오! 씨바!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으면 벽호공이라도 익혀 둘걸!"

잡기(雜技)라고 생각해 익히지 않았던 무학인데, 상황이 이리되니 잡기마저도 아쉽다.

그때였다.

투둑! 투두둑!

살짝 밟았던 돌부리가 부스러지며 아래로 떨어진다.

톡. 톡. 톡.

청명은 아래로 떨어지는 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절벽에 튕긴 돌이 짙은 구름을 파고든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고서야.

토옥!

"……와."

여기서 바닥까지 떨어지는데 저리 오래 걸리네. 떨어지면 시체도 안 남겠네. 진짜.

몸을 한번 부르르 떤 청명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천하의 천마를 앞에 두고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매화검존 청명이지만, 그건 상대가 천마일 때의 이야기고. 같은 죽음이라 하더라도 절벽에서의 추락사는 사양이다.

여기서 죽어 저승에 갔다고 생각해 보자.

다시 주어진 생을 추락사로 마감한 그를 사형제들이 어떻게 보겠는가? 천마를 죽였던 영웅에서 세상천지 다시없는 멍청이로 격하되고 말 것이다. 그건 절대 사양이다.

"끄응."

청명이 기민하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으나, 몇 번 반복하다 보니 마치 벽에 붙은 도마뱀처럼 영활하게 절벽을 타는 청명이었다.

'저 아래쪽이었을 텐데.'

아래로 내려가던 청명이 미간을 찌푸렸다. 절벽 한중간에 거대하게 갈라진 틈이 있다.

'안쪽으로 들어가는 건 무리고.'

뛰어내려야 한다는 말인데…….

"후우."

깊게 한번 심호흡을 한 청명이 단호한 눈으로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명색이 매화검존인데!"

이런 거에 쫄 수는 없지!

과감하게 아래쪽으로 몸을 던진다. 몸이 살짝 떠오른다는 느낌이 드는 동시에 눈앞으로 절벽이 돌진해 왔다.

"으라차!"

적절한 시기에 손을 뻗어 살짝 튀어나온 돌부리를 움켜잡았다. 절벽에 대롱대롱 매달린 청명이 외쳤다.

"으, 살 떨려!"

하지만 덕분에 꽤나 많은 거리를…….

투둑.

"응?"

청명의 고개가 위로 획 올라갔다. 그의 눈에 그가 잡고 있는 튀어나온 돌부리가 들어온다.

"아니지?"

투두둑!

"……."

아니, 거…….

좀 도와주지. 양심도 없네.

콰득!

돌부리가 순식간에 부러졌다. 청명의 몸이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히이이이이이이이이익!"

청명은 허공에서 팔다리를 필사적으로 휘저었다.

'여기서 떨어지면?'

죽는다. 너무 결과가 확실해서 재고할 여지도 없다.

'죽어?'

죽는다고? 이 청명이?

그때였다.

텅!

갑자기 허리춤에서 강한 충격이 느껴지더니 청명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른다.

"어?"

청명의 시야에 출렁이는 밧줄이 들어왔다.

'그렇지!'

텅! 텅!

두어 번 튕기고서야 움직임이 잦아든다.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청명이 깊게 탄식했다. 그리고 잠시 뒤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사람은 준비성이 있어야지!"

밧줄을 안 묶고 내려왔으면 꼼짝없이 뒈질 뻔했다. 넝쿨을 엮어 만든 밧줄이라 잘 버틸까 긴가민가했는데, 다행히 작은 청명의 몸 하나는 유지할 정도가 되는 모양이다.

청명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있다!'

청명의 눈이 반짝였다.

그가 매달린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불룩 튀어나온 부분이 보인다. 저 아래에 청명이 드나들던 은신처가 있다. 어림짐작으로 대충 밧줄의 길이를 맞췄는데 그게 또 맞아떨어진 모양이다!

"크으. 하늘이 돕는구나."

청명은 심호흡을 하며 줄을 움켜잡았다. 일단은 저 절벽에 달라붙어야 한다. 그러려면 일단 반동을…….

"읏차!"

청명이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동도 없던 밧줄이 지속적으로 몸을 흔들자 점차 앞뒤로 요동치기 시작한다.

'자 각도를 잘 맞춰서.'

부웅.

부우웅.

밧줄에 매달린 청명의 몸이 절벽에서 붕 멀어졌다가 훅 다가가기를 반복했다. 그 폭이 점점 커지고, 절벽에 거의 닿을락 말락 한 지점까지 다가간다.

"으라차아아아!"

손을 뻗어 절벽을 움켜잡았지만, 암석이 워낙 매끈해서 그런지 악력만으로는 한 번에 움켜잡을 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청명이 절벽을 걷어차고 몸을 뒤로 띄워 냈다. 이제 다시 다가가면 양손으로…….

뚜두둑!

"어?"

청명의 고개가 벼락처럼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기가 막히게 자신이 원하는 부분을 정확히 찾아냈다.

넝쿨이 반쯤 끊어져 위태하게 이어져 있다.

"에이."

아니지.

보통 이럴 때는 절벽으로 다가갈 때까지는 버티다가 절벽에 붙으면 줄이 끊어질…….

우두둑!

"……리가 있나! 으아아아아아아!"

반동을 준 기세를 그대로 품고 청명의 몸이 아래로 추락한다.

"히이이이이익! 죽는다! 진짜 죽는다!"

그나마 반동을 줬기에 절벽에 바짝 붙을 수는 있었다. 있는 내력을 모조리 끌어 올린 청명이 절벽에 손을 박아 넣는다.

오도독!

경쾌하게 뼈가 부러지며 청명의 몸이 쾌속하게 추락했다.

"으아아아아! 미친!"

속도까지 실린 체중을 손목이 감당하지 못한다. 청명이 필사적인 기세로 다른 손을 절벽에 찔러 넣었다.

오독!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아 뭔! 갈대 쪼가리도 아니고 뼈가 뭐 이렇게 쉽게 부러져! 이 망할 몸뚱어리야!"

좀 살아 보자는데 협조를 해야 할 거 아냐!

청명이 양팔과 양다리를 필사적으로 휘저었다. 허공에서 헤엄을 치는 꼴이지만, 꼴에 효과는 있는지 어찌어찌 절벽에 바짝 다가갈 순 있었다.

"흐아아아압!"

손이 안 되면 전신으로!

청명이 절벽에 개구리처럼 달라붙는다. 두 발로는 절벽을 긁고, 부러진 양손 대신 양팔로 절벽을 끌어안았다.

"아아아아악! 뜨거! 앗, 뜨거!"

전신이 마찰하며 화끈한 열기가 느껴진다. 하지만 나름 효과는 있었다. 떨어지는 속도가 확 줄어든다.

이제 여기서 튀어나온 부분만 발견하면!

시선을 아래로 내린 청명이 흐뭇하게 웃었다.

튀어나온 부분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

여기가 단장앤데.

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더 좋은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튀어나온 돌부리 따위보다 훨씬 더 안전한 곳.

"허허. 땅이네."

땅이야.

추락하는 건 순식간이네.

허허 웃던 청명의 몸이 바닥에 그대로 처박혔다.

쿠우우우우우우우우웅!

"끅."

처박힌 반동으로 허공으로 일 장은 튀어 올랐다가 다시 떨어진다.

쿵!

흙먼지가 사방으로 비산한다. 폴폴 날리는 흙먼지에 묻힌 청명의 전신이 바르르 떨렸다.

"살……았네."

절벽에 들러붙어 속도를 줄인 덕분에 즉사는 면했다. 하지만 덕분에 전신이 아주 박살이 나 버린 것 같다. 안 아픈 곳이 없다.

"끄으으으응."

한참을 낑낑대던 청명이 겨우겨우 몸을 일으키고는 시뻘건 독기가 찬 눈으로 절벽을 노려보았다.

"……내가 무슨 수를 써서도 오르고 만다, 이 빌어먹을 절벽!"

오독.

아. 턱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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