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거지도 안 주워 갈 문파 같으니! (4)
청명이 나간 장문인의 처소에 현종과 운암, 그리고 무각주인 현상이 남아 서로를 마주보았다.
"어찌 생각하느냐?"
현종의 물음에 운암이 미소를 지었다.
"도기(道器)입니다."
"너도 그리 느꼈구나."
현종이 기꺼운 미소를 지었다.
청명이 어여뻐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왜 아니겠는가? 청명 덕분에 화산은 멸문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적이 쳐들어 온 것도 아니고, 내분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고작 돈 때문에 역사와 전통의 화산이 현판을 내리는 가장 치욕스러운 상황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니 현종의 입장에서는 청명을 업고 다녀도 모자랄 판이다.
하지만 지금 이 평가는 그런 어여쁨 덕분이 아니다.
"어린아이임에도 말에 현명함이 묻어납니다. 때때로 거친 면이 있지만, 나이를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그렇지."
장문인의 추임새에 운암의 생각이 깊어졌다.
청명과 대화를 하고 있으면 어린아이와 대화를 하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단순히 말투 때문이 아니었다. 청명에게서는 어린아이 특유의 치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되레 뭐랄까?
'선기를 느끼는 건 나뿐인가.'
도가의 향이 난다.
이 느낌은 이치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어린아이에게서 도문의 향이라니.
'도기라는 말이 아니고야 설명할 수 없구나.'
운암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생각이 깊습니다. 말을 하기에 앞서 고심하는 면도 보입니다. 여러모로 총명한 아이입니다."
"그렇지."
"무재만 확실하다면…… 후대의 화산을 이끌 동량이 될 것입니다."
현종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시선을 돌려 현상을 바라보았다.
"어찌 생각하는가?"
지금까지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현상이 침음을 흘렸다.
"제가 사람을 볼 줄 모른다는 것, 장문사형도 알지 않으십니까?"
"이 사람아. 그래도 느낌이란 게 있지 않느냐?"
"느낌이라……."
현상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시간이 느릿하게 지나간다. 한참 동안 상념에 빠져 있던 현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이가 아이답지 않습니다."
"……."
"종종 험한 삶을 살아온 아이나 생각이 깊은 아이들이 그런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건 압니다. 하지만 그건 또래에 비해서 의젓하다는 것이지 어른과 같다는 뜻은 아니잖습니까?"
살짝 시선으로 동의를 구한 현상이 말을 잇는다.
"하지만 그 아이는 조숙한 게 아니라 정말 어른처럼 말하고 어른처럼 행동합니다.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끄집어내 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말입니다."
"속이 검다는 뜻인가?"
"그런 의미까지는 아닙니다. 다만……."
현상이 말을 줄였다.
"알겠네."
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지금은 큰 의미를 두지 말도록 하세. 보다시피 아이가 아닌가?"
"예, 장문인."
"우리는 사람을 쓰는 이들이 아니라, 사람을 길러 내는 이들일세. 훌륭한 인재라면 그 재능을 발휘하도록 해 주면 될 것이고, 문제가 있는 아이라면 문제를 고치도록 이끌어 주면 될 일이네."
"옳은 말씀이십니다."
"운암아."
"예, 장문인."
"공사는 어찌 되어 가고 있느냐?"
"산세가 험하여 자재의 충원이 쉽지 않습니다. 나무를 베어 최대한 충당하고 있지만, 베어 낸 나무를 말리고 다듬는 데 드는 시간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시일이 조금 소요될 듯합니다."
"그렇구나."
가만히 수염을 쓸어내린 현종이 진중한 얼굴로 물었다.
"자금이 생겼다고 겉치레부터 신경 쓰는 내가 못마땅하지는 않더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장문인."
"이해해 다오. 화산은 이제 새로 태어나야 한다. 무릇 사람이란 새로운 다짐을 하고 새로운 뜻을 세울 때는 의관을 정제하고, 몸가짐을 바로하는 법이다. 이것은 문파도 다르지 않을 터. 문도들에게 새로운 뜻을 전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가장 확실하다고 여겼다."
"장문인의 뜻이 옳습니다."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사제."
"예, 장문사형."
현상이 살짝 고개를 숙인다.
"새로 얻은 무학의 해석을 최대한 빨리 마쳐 주게. 하나, 허술함이 있어서는 안 되네. 그 무학을 제자들에게 어찌 전수하느냐에 따라 화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네."
"한 치의 허술함도 없도록 하겠습니다."
"내 자네들만 믿겠네."
생각에 잠긴 듯한 현종의 모습을 보며 현상이 살짝 얼굴을 굳혔다.
'말해야 하는가?'
아니. 아니다.
그저 노파심일지도 모른다. 장문사형은 지금 백 년을 넘어 천 년을 이어 갈 화산의 미래를 구상하는 중이다. 별것 아닌 이야기로 신경을 쓰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상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비급을 발견했을 당시에는 워낙 충격을 받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막상 비급을 해석하느라 뒤적이다 보니 최근에는 의아함을 지울 수가 없다.
'최소 백 년이 지난 서책이라 하기엔, 종이가 너무 깨끗하다.'
그리고 군데군데 먹물이 번져 나온 자국까지 있었다.
현상의 의심이 맞다면 이 비급은 백 년 전의 것이 아니다. 비교적 최근에 누군가가 만든 비급이다.
하지만 대체 누가?
화산에서도 실전된 무학을 그 누가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인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이렇게 비급을 만들어 발견하게 만드는 것보다 비급을 들고 찾아오는 쪽이 났다. 그렇다면 화산의 모든 문도가 그를 왕처럼 떠받들 테니까.
하면 화산에 도움을 주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뜻인데.
현상이 고개를 저었다.
과하다. 과한 생각이다.
혹여 음모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무학을 검토하고 또 검토해 보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이건 진품이다. 어긋난 곳이 없고, 잘못된 곳이 없다. 사특한 점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
'한 번만 더 검토해 보자.'
이상하다면 그때 가서 말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 * *
"에라. 거지도 안 주워 갈 문파 같으니!"
청명이 돌멩이를 걷어찼다.
"뭘 했길래 그 많던 영단이 하나도 안 남았어!"
장문인의 표정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이놈의 문파에는 자소단은커녕 매화단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게 분명했다.
절망적이기가 짝이 없다.
돈이 없어 자소단을 제조할 수 없었던 거라면, 돈이 생긴 지금 해야 될 대답은
'일단은 기다려라.'
였다. 하지만 장문인은 기다리라는 말 대신 화제를 돌리는 쪽을 택했다.
그 말인즉슨, 지금 화산에 영단이 없는 것은 물론이요, 영단을 만드는 방법도 실전되었다는 뜻이다.
"뭐 멀쩡한 게 하나가 없어!"
속이 터진다.
누가 일부러 화산을 박살 내겠다고 계략을 꾸몄어도 이렇게 다양한 부분에서 다양하게 박살이 나 있을 수는 없다.
문파에 무공이 없고, 영단이 없고, 사람이 없고, 돈까지 없다?
"잘도 안 망했네. 잘도!"
속은 터지지만 화를 내 봐야 무얼 하겠는가? 이게 다 제 업보인 것을. 청명이 입맛을 다시며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하, 이거 골치 아프네.'
생각보다 몸이 쉬이 회복되지 않는다. 아직 근골이 완성되지 않은 어린아이의 몸인 데다가, 내력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선천지기를 끌어다 썼으니 웬만큼은 부작용을 각오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웬만큼이 아니라는 게 문제지.'
생각 이상으로 몸이 회복되지 않는다.
아마도 은연중에 과거의 몸과 과거의 수준을 기준으로 삼는 버릇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당년의 청명이 어린아이가 선천지기를 끌어 쓴다는 말을 들었으면 그 아이는 물론이고, 말리지 못한 주변인들까지 깡그리 잡아다가 볼기를 쳤을 것이다.
그만큼이나 위험한 일이니까.
하지만 사람이란 게 그렇다. 남은 안 되지만 나는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패가망신하지.
문제는 지금 패가망신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청명이라는 점이었다. 몸이 회복이 되지 않으니 수련이 쉽지 않고, 수련이 쉽지 않으니 무학이 늘지 않는다.
화산을 다시 일으킨 대가라고 감수하기에는 갑갑함의 정도가 너무 심했다. 이대로 간다면 최소 반년 정도는 정양에 들어야 할 판인데.
"반년은 얼어 죽을!"
늙은이의 몸이라면 모를까. 이 어린 나이에 반년은 너무도 치명적이다. 지금의 반년은 먼 훗날의 십 년과도 같다.
단순히 몸을 회복해서 편해지려는 게 아니다. 지금 청명은 완벽한 토대를 만들어 가는 중이다. 하지만 사람의 몸은 땅이 아니잖은가?
아이는 성장하고 변화한다. 그런 만큼 적당한 시기라는 게 있는 법이다. 이 시기를 놓치면 다시는 만들 수 없는 것이 있다. 몸이 알아서 무학을 쭉쭉 습득할 때 기초를 닦아 줘야 하는 법 아닌가?
"방법을 찾아야 돼."
청명이 심각한 얼굴로 고심에 빠졌다.
"일단은 무조건 영단이 있어야 하는데……."
기운이 쇠한 것은 기운으로 밖에 치료할 수 없다. 느긋하게 받아들이는 기운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단번에 많은 양의 기운을 받아들여 선천지기를 채워야 한다.
그렇다면 방법은 두 가지.
귀한 영단을 먹거나, 격체전력 같은 기공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청명에게 격체전력을 해 줄 사람을 구할 수 있을 리가 없고, 영단도 구할 수가 없다.
영단은 돈이 있다고 해서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게다가 지금 청명은 어린아이의 몸이 아닌가? 화음을 떠날 수 없는 그가 영단을 구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방법이 없다.
"아, 진짜!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뭔 놈의 문파에 영단이 하나도 없냐고! 썩을 놈의 의약당 놈들!"
예전의 화산에는 거짓말 조금 보태서 영단이 바닥에 굴러다녔다.
자소단이야 웬만한 문도는 일생에 하나씩은 꼭 먹을 정도로 흔했고, 설매단은 어디 가서 공 좀 세우거나, 수련만 열심히 해도 상으로 떨어질 정도였다.
그리고 매화단?
"그건 약도 아니었지."
매화단은 너무 흔해서 영약 취급도 못 받았다. 청명도 지금 상태가 이렇지 않았다면 매화단을 달라는 소리는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청명에게야 도움이 되겠지만, 당시의 청명에게 매화단은 먹어 봐야 내공도 오르지 않는 쓸데없는 단약에 불과했다.
오죽하면 과거 청명이 매화단을 숙취 해소제로 썼겠는가?
'효과는 죽여줬는데.'
장문사형 몰래 술을 진탕 마시고, 운기로도 숙취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을 때, 매화단을 한 알 먹어 주면 속이 쫘아아악! 풀렸다. 영단으로써는 가치가 없지만, 숙취 해소제로는 천하에서 제일가는 물건이 바로 매화단이었다.
물론 그걸 장문사형이 알았다면 입에 거품을 물고 청명을 죽이겠다고 쫓아왔겠지만.
그래서 매화단을 꿍쳐 놓고 숨어서…….
"어?"
우뚝.
휘적휘적 걷던 청명의 몸이 우뚝 멈췄다.
"숙취 해소?"
그의 고개가 모로 돌아간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있다! 영단!
아니, 아니!
있을 것이다! 영단!
화산의 사고뭉치 청명……. 아니, '전' 화산의 사고뭉치였던 청명이 꿍쳐 놓은 영단이!
"대가리가 나쁜 게 도움이 될 때도 있구나!"
청명이 낄낄대며 전력으로 산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