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거지도 안 주워 갈 문파 같으니! (3)
"……괜찮으냐?"
"예. 쿨럭!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은 것이더냐?"
"저엉말 괜찮습니다. 쿨럭! 쿨럭!"
"안 괜찮아 보이는데……."
현종이 얼굴을 반쯤 일그러뜨리고 청명을 바라보았다. 앞에 앉은 청명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피골이 상접하고 안면이 새하얗게 질렸다.
'건강이 얼마나 안 좋으면?'
아무리 봐도 아사하기 직전으로 보인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제자들에게 피죽도 안 먹이느냐고 침을 뱉으며 욕을 하고도 남을 것 같다.
'처음 왔을 때는 안 이랬던 것 같은데.'
현종이 미묘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운암에게 물었다.
"의약당에서는 뭐라더냐?"
"원기가 상했다고 합니다."
"원기?"
"예. 과도한 수련으로 원기가 상해 정양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허어!"
현종이 감격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아. 원기가 상할 때까지 수련을 하다니. 그런 미련한 짓을 왜 했더냐?"
'그게 아닌데.'
수련은 얼어 죽을.
화산에 오르고부터는 제대로 된 수련을 못 해 본 청명이다. 그런데 뭔 놈의 수련인가.
물론 의약당에서는 할 말이 그것밖에 없었겠지. 원기가 상한 것도 사실이고 몸이 상한 것도 사실이니까. 이제 갓 입문한 놈이 선천지기를 끌어다 쓰다가 원기가 박살이 났다고 어찌 상상이나 하겠는가? 의약당에 화타가 앉아 있었다고 한들 나올 수 있는 대답이 아니다.
이상한 오해가 생겨났지만 이럴 때일수록 솔직하게 대답해야겠지.
"죄송합니다. 장문인. 하루라도 빨리 화산의 무학을 익히고 싶다는 마음에 그만……."
"허어, 선재. 선재로다."
장문인은 청명이 더없이 마음에 든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마음만은 사실이니까!
"급히 먹는 밥이 체하는 법이다. 몸이 상해서야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제자, 조금 더 신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 그렇지."
현종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눈앞의 아이는 그야말로 화산의 홍복이다. 굴러 들어온 복덩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니 어찌 어여쁘지 않겠는가?
"그래. 차는 즐기느냐?"
"딱히 즐기지는 않습니다."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술이면 몰라도.'
청명의 입맛에 차는 너무 맹탕이다. 목을 알싸하게 자극하는 술과는 달리, 차는 그저 풀 맛이 나는 물일 뿐이었다.
장문사형은 그런 청명을 두고 도사가 되기에는 애초에 글러 먹은 놈이라고 했지만, 입맛이 그런 걸 어쩌겠는가?
'화산 장문인은 차를 즐겨야 한다는 법칙이라도 있나?'
과거의 장문사형도 다도에 조예가 깊었다. 그리고 청명이 보기에 지금의 장문인도 차를 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장문인이 정성스레 탄 차를 청명에게 내민다. 청명이 두 손으로 차를 받아 들었다.
"즐기지 않는다니 아쉽지만, 본 도가 성의껏 탄 차니 맛이나 보거라."
"예."
향을 느끼는 과정이고 뭐고 없이, 청명은 차를 쭉 단번에 들이켰다.
"……."
본디 차란 맛보다는 그 향을 만끽하는 데 더 큰 즐거움이 있는 법이건만, 청명에게 차는 뜨거운 물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듯했다.
안타까운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현종은 청명이 찻잔을 내려놓자마자 물었다.
"어떠냐?"
"차네요."
"……."
현종의 근엄한 얼굴에 미묘한 실망이 감돌았지만, 청명은 도사의 본분에 맞게 그저 솔직할 뿐이었다.
"크흠. 그래."
헛기침으로 어색함을 날려 버린 현종이 다시 표정을 부드럽게 풀어낸다.
"내가 이리 너를 다시 부른 것은 이번 일에 대한 치하를 하기 위함이다. 네 덕분에 화산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참 잘해 주었구나."
"저는 한 게 없습니다."
"어찌 네가 한 것이 없겠느냐? 네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우리는 거리에 나앉았을 것이다."
"우연히 그곳을 지났고, 우연히 상자에 발이 걸렸을 뿐입니다."
"허허. 우연이라."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젓는다.
"세상에 우연이라는 건 없다. 모든 것은 인연이 이어진 결과일 뿐이지."
청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한 말이겠지만, 현종의 말은 정곡을 정확하게 찌르고 있었다.
'한 번씩 저렇게 날카로울 때가 있단 말이야.'
"그렇지 않더냐? 운암아?"
"그렇습니다, 장문인. 그리고 설사 이 모든 것이 우연으로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그 우연을 야기한 공 역시 작지 않습니다. 게다가 재물에 욕심을 내지 않고 장문인께 알렸으니, 이 공을 어찌 작다 하겠습니까."
"그렇지, 그렇지."
현종이 기껍다는 듯 연신 수염을 쓸어내렸다.
"해서."
그러더니 따뜻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본다.
"공을 세운 이에게 상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 화산은 네게 상을 내리려 한다. 그래서 불렀느니라."
"상이라 하셨습니까?"
"그렇다. 원하는 것이 있더냐?"
청명이 살짝 고민에 빠졌다.
원하는 것?
"그만한 재물을 그냥 넘기고도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일 터. 재물이 필요하다면 적당한 재물을 주마."
"재물은 괜찮습니다."
"음?"
현종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재물이 필요 없다고 했느냐?"
"예. 어차피 화산에서 밥도 주고 옷도 주는데 재물이 있어 봐야 무엇 하겠습니까? 이 산속에서 쓸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허허허. 그래, 그렇지."
현종이 미소를 지었다.
'도기(道器)로구나.'
아무리 쓸 곳이 없다 한들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이야 돈을 쓸 일이 없지만, 앞으로도 쓸 일이 없는 건 아니잖은가?
그만한 일을 짐작 못 할 아이로 보이지는 않는데, 그럼에도 재물을 거절하는 것을 보니 무욕(無慾)을 실천하는 아이다. 도를 품을 그릇이었다.
하지만 청명의 내심은 훈훈한 현종의 해석과는 전혀 달랐다.
'그거 해 봐야 얼마나 된다고?'
장문인의 비밀 창고. 이제는 화산의 장문인이 아니라 청명이 쓰는 비밀 창고에는 현종이 봤다면 눈을 까뒤집고 기절할 만한 양의 재물이 그득그득 쌓여 있다.
청명은 이미 화음현 최고의 부자다.
가난한 장문인이 상으로 내리는 푼돈 같은 건 안 받아도 그만이다.
"그렇다면 원하는 것이 무엇이더냐? 네 항렬로는 아직 익힐 수 없는 무학을 미리 익히게 해 줄 수도 있다."
"무학도 괜찮습니다."
"……허어? 이것도 괜찮다고?"
"예."
"무학에 뜻이 없는 것이더냐?"
청명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자가 모든 것을 알지 못하지만, 화산의 선인들께서 항렬에 따라 익힐 무학을 정해 둔 데에는 다 뜻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현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예. 조금 전 장문인께서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랬지."
"무학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수준에 맞는 것을 익히며 느려도 확실하게 나아가겠습니다."
"그래. 옳다. 네 말이 진정으로 옳다."
현종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마음에 든다. 아직 어린 아이가 도가 무엇인지, 순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지 않은가?
'어디서 이런 기재가 들어왔다는 말인가?'
기꺼움이 넘쳐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현종이었지만, 물론 청명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내가 너한테 무공을 줘야 할 판이다. 인마!'
안 그래도 이번에 전해 준 무공 말고 다른 것들은 어떤 방식으로 넘겨줘야 하나 하는 고민 때문에 골머리를 썩던 청명이다.
한 번에 다 넘겨줬다면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기이한 면이 있어서, 금으로 된 불상과 은으로 된 불상을 동시에 주면 은으로 된 불상의 가치를 평가절하 해 버린다.
이십사수매화검법과 칠매검을 동시에 주면 누가 칠매검을 익히려 들겠는가? 현종의 말대로 급히 먹으면 체하는 법이다.
'이런 것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써야 하다니.'
장문사형. 잘못했습니다.
장문사형이 잔소리할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것 죄송합니다. 제가 그때 장문사형이 얼마나 개고생을 하는지 알았어야 하는 건데.
반쯤은 장문인의 시선으로 화산을 보다 보니 과거의 장문인이었던 청문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 것 같다. 그리고 그 힘겨움의 많은 부분을 청명이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말 좀 들을걸.
이미 죽은 청문에게 속죄하긴 어렵지만, 그나마 지금 있는 장문인에게라도 잘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청명이었다.
"네게 욕심이 없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나, 지금 내게는 조금 곤란한 일이구나. 그래, 그럼 딱히 필요한 건 없더냐?"
'필요한 것이라.'
남은 거라고는 이름밖에 없는 화산에서 청명에게 뭘 해 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청명이 입을 열었다.
일단은 일신상의 자유를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으면 움직임의 반경이 넓어진다. 다른 것보다는 그게 급하다.
"장문인. 제자는 무학을 익힘에 있어서 게으름을 피우지 않습니다."
"네 꼴만 보아도 그건 알겠구나."
"……."
작게 헛기침을 한 청명이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이 청정 도량 안에서 그저 무학만 익히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씩은 넓은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제가 원할 때 한 번씩 화음에 내려갈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으음."
현종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네 의도는 알겠으나. 그건 화산의 규율에 어긋나는 일이다. 네가 세운 공은 충분하지만, 그랬다가는 형평성의 문제로 불만을 품는 사람이 생길까 저어되는구나. 그건 한번 생각을 해 보자꾸나."
"예, 장문인."
"혹 다른 것은 없느냐?"
고민하던 청명이 눈을 번쩍 떴다.
"장문인!"
"음?"
"보시다시피 제자의 몸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 눈이 있으면 알겠지."
"의약당의 말로는 원기가 상했다고 합니다."
"그래. 들어서 알고 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혹여 영단을 내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영단?"
"예. 화산의 영단 말입니다. 보통 문파에는 그런 게 하나씩은 있지 않습니까?"
현종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허. 그래. 영단이 필요하구나. 그래, 영단 좋지. 몸을 보충하는 데 그 이상의 것이 있겠느냐?"
"예! 그렇습니다!"
"허허허. 그래, 영단. 그래. 네가 세운 공이라면 영단을 받기에 충분하지. 그래. 음……. 그래……."
현종이 슬쩍 청명의 눈치를 본다. 그러더니 짐짓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씩 화음에 내려가고 싶다고 했었느냐?"
"……예?"
"물론 규율에는 어긋나지만, 네가 세운 공을 감안한다면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 수 있다. 운암은 듣거라."
"예! 장문인!"
"화산 장문인의 이름으로 허하노니, 앞으로 화산의 제자 청명이 화음에 내려갈 때는 타인의 허락을 받지 않는다."
"예!"
"다만 청명은 화음을 벗어나지 않아야 하며, 화음에서 벌이는 모든 일에 있어서는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걸 명심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청명이 고개를 갸웃한다.
"영단은요?"
"또한 화음에 내려감에 있어서 수련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
"허허허허. 그래. 그럼 그만 나가 보거라."
"아, 아니, 장문인. 영단……."
"내 너에게 기대가 크다. 쉼 없이 정진하도록 하여라."
"……눼."
"그래."
"보중하십시오. 장문인."
청명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터덜터덜 밖으로 나가자 현종이 빙그레 웃었다.
'내가 먹고 죽을 영단도 없다, 이놈아!'
앓느니 죽지.
앓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