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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37화 (38/1,567)

37화. 거지도 안 주워 갈 문파 같으니! (2)

화산은 달라진 게 없었다. 불어오는 바람도 그대로고, 고풍스러운 전각들도 그대로다.

다만 달라진 것은 화산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후욱!"

조걸이 무복을 벗어젖혔다. 벗어 던진 무복을 움켜잡자 땀이 줄줄 흘러나온다. 새벽부터 근력 수련을 하고 나면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옷을 갈아입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다.

"아, 오늘 수련 진짜 힘들었다."

"새벽부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정말."

들려오는 말들을 들으며 조걸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주변에는 그와 같이 옷을 빠는 동기들이 가득했다. 모두 함께 얼음장 같은 냇물로 전신을 씻고, 땀에 젖은 무복을 깨끗하게 빨았다.

조걸은 준비해 온 새 옷을 입고는 빨래를 잘 갈무리하여 챙겼다.

"슬슬 올라가자."

"예. 사형."

청자 배들이 빨래한 무복을 집어 들고는 화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뒤쪽에서 그 모습을 보며 조걸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많이 바뀌었네.'

예전이었다면 이런 광경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청자 배들은 화산의 문도이기는 하지만 무학을 익히는 데 열정적이지 않았다. 심지어 대사형인 윤종이나 조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제는 다들 새벽부터 자발적으로 나와서 수련을 하고 있다. 입으로는 불만이 끝도 없지만, 그게 반항으로까지 이어지는 이는 없었다.

이 광경은 뭐라고 할까?

'정말 무관 같군.'

조걸이 피식 웃고 말았다.

화산의 삼대제자들을 보며 이제야 무관의 모습 같다는 생각을 하다니. 그럼 이제까지 화산은 무관이 아니었단 말인가?

"왜 그렇게 웃느냐?"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조걸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대사형 윤종이 경공을 펼치며 조걸을 돌아보고 있었다.

"아, 사형. ……말하기 조금 민망하지만, 이제야 다들 무관의 모습 갖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습니다."

"그렇더냐?"

"조금 이상한 생각이긴 하지만요."

"아니다. 나도 마침 같은 생각 중이었다."

"하하……."

조걸은 끝내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걸은 화산에서 땀을 흘려 수련을 한다는 걸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다. 백매관에서 지시하는 수련은 빠짐없이 해 냈지만, 그건 노력이 아니라 할당량을 채우는 것에 가까웠다.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가 하산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조걸의 목표였다. 아니, 조걸만이 아닌 다른 모든 이들의 목표였을 것이다.

그러니 열정이 있을 수가 있나?

하지만 최근 들어 뭔가 바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뿐 아니라 다른 사형제들의 눈빛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이게 다 그놈 때문이겠지.'

청명을 떠올린 조걸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진다.

청명은 화산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지금은 분명 작은 바람에 불과하자만, 이 바람이 산들바람으로 끝날지, 화산 전체를 뒤흔들 거대한 태풍이 될지는 아직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멋 훗날에는 분명 그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산을 뛰어올라 화산의 산문에 접어든 조걸이 어깨를 쭉 폈다. 가슴 한구석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그 뿌듯함은 이내 순식간에 하늘 높이 날아갔다.

"에헤이! 그거 거기 잡으면 안 된다니까!"

"날라! 날라! 일단 안쪽으로 자재 다 밀어 넣고 그다음에 시작한다고! 귀먹었어?"

"거기! 거기 부서지면 너는 한 달 동안 일당 없다! 여기까지 기어 올라오는 것도 세상 힘들었는데 뭐 하는 짓거리냐!"

조걸이 멍하니 화산의 눈앞에 펼쳐진 모습을 바라보았다. 분주하고 어수선하기가 짝이 없다.

"……."

그의 시선이 좌에서 우로 크게 이동한다.

'뭐지? 이 사람들은?'

생전 처음 보는 이들이 산문을 들락거리고 있다. 모두들 손에 처음 보는 연장과 자재들을 쥐고 있었다.

"거기. 아니, 거기가 아니고! 저쪽으로!"

그나마 그중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게 위안이다. 운암이 사람들 사이에 서서 다급하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형?"

조걸의 시선을 받은 윤종이 멍한 얼굴로 운암을 향해 걸어간다.

"사숙조."

"음? 윤종이더냐?"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아."

운암이 빙그레 웃었다.

평소라면 삼대제자에 불과한 윤종에게 일일이 설명을 해 주지는 않았겠지만, 지금 운암은 기분이 매우 좋은 상태였다. 그러니 설명해 주지 못할 것도 없다.

"인부들이다."

"인부요?"

"그래. 너도 알다시피 전각들이 많이 낡지 않았느냐?"

"그렇습죠."

많이 낡은 정도가 아니다.

낡다 못해 거의 바스러져 바람만 불면 뭔가가 부러지고 휩쓸려 나가는 판이다. 그나마 제자들이 지내는 곳과 수련을 하는 곳은 어찌어찌 보수를 해서 형태나마 유지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전각들은 관리할 인력이 부족하여 최소한의 관리도 없이 방치되고 있었다.

"이 기회에 크게 한번 보수를 할 생각이다. 산문도 다시 세우고."

"예?"

"보고만 있지 말고 가서 자재를 나르거라. 여기까지 자재를 가지고 온다고 인부들이 다들 고생을 한 모양이니까. 웬만한 목재는 근처에서 베어다 만들면 되지만, 여기서 나지 않는 목재도 있는 모양이더구나."

"예?"

"빨리빨리 움직여! 어서!"

싱글벙글 웃으며 소리치는 운암을 보며 조걸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변화가 그의 생각보다 더 빠르게 찾아오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게 뭔 일이지?"

조걸이 황당함이 담긴 눈으로 식탁을 바라보았다.

자재들을 나르느라 힘을 한 번 더 뺀 덕분에 허기가 목 끝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막상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보니 허기보단 황당함이 더 크게 밀려온다.

"이게 뭐지?"

"……내가 꿈을 꾸는 건가?"

"아무리 봐도 이건 그 '고기'라고 불리는 그 무언가 같은데?"

다른 사형제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그들의 시선은 식탁에 고정되어 있었다.

식탁 위에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졌다.

무려 고기가 올라온 것이다.

"이런 천인공노할 일이 있다는 말입니까?"

"살아 있는 것을 죽여 그 시신을 뜯어낸 악업의 결정체가 신성한 도가의 식탁에 오르다니!"

"횡재로다!"

"……."

조걸이 헛웃음을 흘렸다.

화산에서는 화식이나 육식을 딱히 금하지 않았다.

화산이 그 맥을 이은 전진(全眞)에서는 채식을 권하고 육식을 금하는 계율이 있지만, 화산의 대에 이르러서는 많이 달라졌다. 채식을 권하기는 하지만 육식을 금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금하지 않는다는 것이 식탁에 고기를 올린다는 것과 같은 말일 수는 없다.

화산에 입문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화산파의 식탁에 고기가 오른 모습을 보는 건 이게 처음이다.

"이거 먹어도 되는 겁니까?"

"먹으라고 올려 둔 것 같은데?"

다들 윤종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핀다. 사숙들이 이 자리에 없는 이상 결정권자는 윤종이다.

윤종이 쓴웃음을 머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먹자꾸나. 식겠다."

"예."

윤종의 말에 일단 자리에 앉은 조걸은 문득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들었다. 모든 사형제들이 조걸을……. 아니, 정확하게는 조걸의 옆에 앉은 윤종에게 불 같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사형제들의 의도를 짐작한 윤종이 젓가락을 잡고 고기 한 점을 집었다. 그리고 그 고기가 윤종의 입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파파파파파팟!

사방에서 젓가락들이 그릇으로 날아든다!

심지어 고기를 잡기 위해 금나수를 응용하는 놈들까지 있었다. 조걸은 그 광경을 보며 어이가 없어 소리를 칠 뻔했다. 하지만 그의 몸은 머리보다 솔직했다. 조걸의 젓가락 역시 벼락처럼 그릇을 향해 날아들었다.

'늦으면 못 먹는다!'

'비켜! 내 고기!'

'고기! 고기!'

사방으로 비산하는 고기의 파편들을 보며 윤종이 눈을 질끈 감았다.

화산이.

그의 화산이 뭔가 이상하게 변해 가고 있다.

"거참, 사람이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갑자기 공사를 시작하질 않나, 식탁에 고기가 오르질 않나. 심지어 오늘 새 무복도 두 벌씩이나 지급이 되었잖습니까?"

"그랬지."

윤종이 뭔가 생각하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알 수 없는 표정을 보던 조걸이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돈이 참 좋다는 생각."

"허허."

조걸은 그만 웃어 버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윤종에게서 이런 말이 나오니 기분이 좀 이상하다.

하기야, 그건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

"아무리 돈이 생겼다고는 하나, 윗분들께서 이렇게 빠르게 뭔가를 바꿀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분들이라고 제자들이 가난하게 버티는 게 좋으셨겠느냐? 없으니 어쩔 수 없었던 게지."

그렇다.

율법에 어긋나서 고기가 나오지 않았던 게 아니다. 고기가 비싸기 때문에 나오지 않은 것이다.

"돈이 없어 못 했던 일들이니 돈이 생겼을 때 하는 거지. 그런데 뭐가 이상하더냐?"

조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암 사숙조께서 도무지 입꼬리를 어찌하지 못하는 것을 보지 않았더냐?"

그렇지.

봤지.

조걸은 맹세컨대 운암이 그렇게 밝게 웃는 것을 생전 처음 보았다. 오죽하면 운암이 웃는 법을 모르는 사람일 수 있겠다 생각한 적이 다 있을까.

그런 양반이 이죽이죽 웃는 꼴이라니!

확실한 건 지금의 화산은 변화의 길목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사형."

"음?"

"이제 어떻게 될 것 같으십니까?"

앞뒤 없는 질문이었지만, 윤종은 조걸의 말이 뭘 의미하는지 이해했다.

"너도 알지 않느냐? 화산은 이미 빠르게 변하고 있다."

"예."

"그러니 우리도 각오를 할 필요가 있겠지."

"각오라……."

"그저 금전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너도 보지 않았더냐. 그 궤짝에."

"예. 비급이 있었지요."

장문인이 무공의 이름을 말하며 뒤로 넘어가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화산은 변하고 있다. 그리고 변할 것이다. 우리 역시 변화를 피할 수 없겠지. 그러니 의지를 굳게 다지고 노력해야 한다. 그럼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것을 볼 수 있지 않겠느냐?"

조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다 그놈 때문인가?'

조걸은 이 모든 상황이 얼마 전에 청명이 벌인 수작질에서 비롯되었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눈에 뻔히 보이는 연기를 생각하자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다.

"무슨 짓을 한 걸까요?"

"낸들 알겠느냐?"

주어가 없었지만,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를 윤종이 아니었다.

"확실한 것은 그 녀석은 우리가 미리 짐작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라는 점이지. 정신을 바짝 차리는 게 좋을 게다. 어설픈 각오로는 그녀석이 만들어 내는 풍운에 휩쓸려 버릴 수도 있으니까."

"걱정 마십시오, 사형. 저 조걸입니다."

"그래. 그랬지."

윤종이 허허 웃으며 백매관으로 향했다. 그런 그의 뒤를 조용히 따르는 조걸의 뇌리에는 조금 다른 생각이 머물고 있었다.

'우리는 미리 짐작할 수 없는 녀석이라.'

조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어쩌면 청명은 그들뿐 아니라 장로님들과 장문인도 감당할 수 없는 놈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말이다.

"그런데."

"응?"

"그놈은 어디 있습니까? 아침부터 안 보이던데?"

"못 들었느냐? 오늘 장문인이 녀석을 찾으셨다. 아마 지금쯤 장문인의 처소에 있을 것이다."

"장문인께서요? 장문인이 그 녀석을 왜 또 찾으신다는 말입니까?"

"낸들 알겠느냐?"

윤종이 어깨를 으쓱하자 조걸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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