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거지도 안 주워 갈 문파 같으니! (1)
"……."
공문연이 재빠르게 안색을 가다듬었다.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지 않는가?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하? 이놈 보소?"
청명이 코웃음을 쳤다.
"이놈이 내 눈깔이 옹이구멍인 줄 아나. 내가 태을신수도 못 알아볼 사람으로 보여?"
"……."
청명이 이죽이며 말했다.
"거참 공교롭네. 공교로워. 화음에서 주루를 운영하고, 화산에 빚 독촉을 하시던 분께서 공교롭게도 종남의 무학을 익히고 계시다 이 말이지? 그것도 아주 잘 배운 태을신수를?"
공문연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얻어맞은 곳의 아픔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빌어먹을.'
참았어야 했다.
설사 목이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태을신수를 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화산에서 온 자 앞에서라면!
치명적인 실수.
하지만 이걸 실수라고 할 수 있을까?
저자가 공문연을 그리 몰아치지 않았다면, 그리고 얻어맞느라 정신이 없는 공문연 앞에서 갑자기 진검을 뽑아 내리치지 않았더라면 공문연은 죽는 한이 있어도 태을신수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우연이라면 최악의 우연이고, 노린 것이라면 저자의 그 심계가 얼마나 깊은지 가히 짐작할 수 없다.
"종남에서 보냈냐?"
"……."
공문연이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차피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변명이 될 수 없다. 구차한 변명으로라도 상황을 돌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하겠지만, 이제는 그게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설프게 입을 열어 더 많은 정보를 주느니 함구해 버리는 것이 났다.
"호오? 입을 닫으시겠다."
청명이 목을 뚜둑뚜둑 꺾으며 공문연에게로 다가갔다.
"뭐, 좋아. 그것도 의리지. 나름 좋은 선택이라고 본다. 그런데 네가 하나 착각하는 게 있어."
"……?"
"그게 뭔지 알아?"
"……뭐요?"
"안 알려 줄 건데?"
"……."
종남은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예전부터 종남은 화산과는 앙숙이어서 감정이 별로 좋지 못했지만 적어도 종남이 구파일방 중 한자리를 차지하는 대문파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만한 문파가 일 처리를 허술히 할 리가 없다. 청명의 생각은 그랬다. 공문연이 아는 정보는 극히 제한되어 있을 것이고, 설사 더 많은 정보를 안다고 해도 그 정보가 제대로 된 것일 리 없다.
종남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만 알면 끝이다. 그 이상은 청명이나 화산이 알아내야 할 일 아니겠는가?
물론 그 사실을 공문연에게 말해 줄 필요는 없다.
"하, 이 새끼들. 그래도 예전 무림은 삭막하긴 해도 치사하지는 않았는데, 구파일방쯤 되는 놈들이 무공도 아니고 돈으로 남의 문파를 거덜 내려고 해? 그것도 사기를 쳐서? 아주 잘들 하는 짓이다."
공문연이 더는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소리쳤다.
"흥. 화산의 입장에서는 그게 차라리 낫지 않겠소?"
"응?"
"당신도 알고 있을 텐데! 화산은 이제 희망이 없소. 재물? 돈? 그런 건 무파에게 있어서는 부가적인 것일 뿐이오. 무학을 잃어버린 화산은 이제 더 이상 과거의 화산이 될 수 없소. 조금 빨리 망하냐, 조금 더 버티다 망하냐의 차이일 뿐!"
"호오?"
청명이 재미있다는 듯 공문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그저 죽어 가는 화산의 숨통을 빨리 끊어 주려 했을 뿐이오. 되레 화산이 고마워해야 할 일이지. 당신쯤 되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텐데? 화산은 더 이상 살아날 수 없다는 걸! 무학의 대가 끊긴 문파는 그저 고사(枯死)하는 법이지."
"누가 그래?"
"이해를 못 하는 거요?"
"아니. 누가 화산의 무학이 대가 끊겼다고 그러냐고."
"……."
공문연이 멍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다른 이가 이런 말을 했다면 코웃음을 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청명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 무게감이 달랐다.
적어도 공문연의 눈에 보이는 청명은 누가 봐도 화산의 전대 고수였으니까.
"이 새끼들이 멀쩡히 잘 살아 있는 화산을 대를 끊으려고 하네. 그리고! 살아도 화산이 사는 거고 죽어도 화산이 죽는 건데 니들이 뭐라고 잘 살고 있는 화산을 묻으려고 하냐? 니들이 무슨 권한으로?"
"……."
"여하튼 주둥아리 터는 놈들은 별 같잖은 논리를 다 가져다 붙인다니까. 차라리 화산이 엿 같아서 때려죽이려고 했다 그래라. 종남파 새끼들이 그러면 내가 인정은 해 줄 테니까."
많이도 팼지.
가까이 사는 이웃일수록 부딪칠 가능성도 높다. 외교에 원교근공이 기본인 것처럼 인접한 문파는 반드시 사달이 난다. 화산과 종남은 속가풍이 강한 도문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면이 많았고, 서로 검을 주로 쓰는 점마저 비슷했다.
비슷한 계열의 대문파가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으면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죽어나는 법이다.
그러다 보니 과거 청명도 종남을 심심하면 때려잡았다. 정확하게는 종남에서 시비를 걸다가 청명에게 개박살이 나는 모양새였지만.
"나는 종남의 사람이 아니오!"
"그렇겠지."
"오해하는 모양인데, 방금 그 수법은 내가 우연히 익힌 것에 불과하오."
"아암. 그래. 그럴 거야. 내가 아주 놀라운 사실 하나 알려 줄까?"
"……그게 뭐요?"
"나도 화산 사람 아냐."
"……."
"말이 되는 소리를……."
"너는, 이 새끼야!"
"……."
청명이 바닥에 침을 뱉으려다 흠칫했다.
아 복면. 큰일 날 뻔했네.
"여하튼 태을신수를 보여 준 대가로 재미있는 걸 보여 주마. 이걸 네가 알아보면 아주 재미있을 거야. 못 알아보면 아쉽겠지만."
청명이 천천히 검을 내밀었다.
"너를 보낸 놈에게 똑똑히 전해라."
청명의 기도가 일변했다.
지금까지의 장난스러운 모습이 사라진다. 구부정하게 굽어졌던 허리가 꼿꼿하게 펴졌고, 쳐져 있던 어깨가 제 모습을 되찾는다.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완벽한 자세.
그 모습을 본 공문연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슬쩍 벌렸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청아한 바람과 함께 그윽한 매화 향이 환상처럼 피어난다.
"매화는 눈 속에서 피어났을 때 가장 진한 향을 풍기는 법. 지금은 비록 겨울이지만, 화산의 정기는 끊기지 않는다. 이윽고 봄이 오면 매화는 만산에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공문연은 보았다.
청명의 검 끝이 천천히 움직인다.
떨림.
아주 작은 떨림에서 시작한 움직임은 이내 커다란 흔들림으로 바뀌었고, 그 커다란 흔들림은 이내 하늘을 가득 수놓은 환상과도 같은 검의 궤적으로 바뀌어 간다.
하늘을 뒤덮을 듯 가득한 검 끝.
그 검 끝에서 생생한 매화 꽃잎이 피어난다.
삭막한 겨울이 지나, 이윽고 따뜻한 봄을 알리는 매화가 온 산에 피어나듯 청명의 검 끝이 그려 낸 매화가 세상을 가득 뒤덮었다.
'이건 환상이다.'
바람이 분다.
춘풍에 휘날리는 듯 하늘을 뒤덮은 매화가 일제히 흐드러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꽃잎들이 하늘을 유영하듯 날아올라 공문연의 이마로 가만히 내려앉았다.
꽃잎들이 공문연을 사뿐히 스쳐 지나며 그의 의식을 바람처럼 날려 버렸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는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털썩.
의식을 잃은 공문연이 바닥으로 쓰러지는 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린다. 하늘을 뒤덮었던 매화도 어느새 신기루처럼 사라져 있었다.
검을 회수한 청명이 빙글 몸을 돌렸다.
"퉤!"
무리한 기의 운용으로 입가로 선혈이 역류한다. 복면을 벗고 솟구친 피를 뱉어 낸 청명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죽겠네, 진짜.'
망가진 몸뚱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아직도 내력이 부족하다. 과거의 그였다면 장난처럼 그려 냈을 일 검만으로도 전신의 모든 내력이 빨려나가는 느낌이다.
'토대도 좋은데, 이러다 내가 죽겠다. 아오.'
뭔가 대책을 강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복면을 다시 쓰는 청명이었다.
"자, 그럼."
그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진 공문연을 넘어 상인들에게로 향했다.
"……."
상인들이 귀신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본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검으로 하늘에 매화를 피워 내는 조화는 살아생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아니, 예전에 지나가듯 과거 화산에는 그런 고인들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지만, 보나마나 과장된 전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전설을 찢고 나온 인간이 지금 그들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화산에 사기를 쳐 돈을 뜯어내려고 했던 그들의 입장에서 청명은 저승사자나 다름없다.
"맞고 갈 사람?"
"……."
"그냥 갈 사람?"
"저요!"
"저는 그냥 가겠습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청명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좋아. 아주 협조적이야."
상인들이 우르르 옆쪽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물론 청명은 그들을 그리 쉽게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동작 그만."
"……."
상인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니들이 그렇게 가 버리면 내가 이 많은 수레들을 어떻게 끌고 가냐? 생각 좀 해라, 생각 좀!"
"……."
상인들이 억울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강도질을 하는 놈의 편의까지 봐줘야 한다는 말인가? 세상이 아무리 거꾸로 돌아간다지만 이런 법은 없다.
하지만 누구도 차마 반박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너희."
"예!"
"지금부터 각자 자기 수레에 실린 재물이 얼마인지 확인한다. 제일 늦는 새끼는 이 새끼 옆에 나란히 눕혀 주마."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상인들이 득달같이 자신의 수레에 달려들어 재물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천팔백 냥입니다!"
"이천삼백 냥입니다!"
"저는 팔천……."
"뭐야? 당신 재산이 그렇게 많았어?"
"지금 그게 중요하냐? 이 인간아?"
심지어는 저들끼리 아웅다웅하며 먼저 보고하려 날뛰었다.
청명이 그 꼴을 보다가 눈을 찌푸렸다.
"야."
"예?"
"수레랑 말 값은 포함했냐?"
"……."
"다시 계산해."
"예."
어찌어찌 계산이 다 끝나자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말 한 필 빌려줄 테니까 한 놈이 가장 가까운 전장으로 가서 돈 가져와라. 현물로 팔 테니까."
상인들이 멍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나름 돈 바닥에 구르는 인간들이지만, 이런 인간은 살다 살다 처음 봤다.
"돈은 무기명 전표로 가져와. 전표에다가 표시해 놨다가 걸리면 오늘 살인나는 거야. 알았어?"
"예."
거기에 치밀하기까지.
"한 놈 가."
"……저 그런데."
"뭐?"
상인 중 하나가 물었다.
"전장으로 가는 이가 도망치면 어떻게 됩니까?"
청명이 피식 웃는다.
"도망쳐서 뭐 하게?"
"……."
"니들 돈 있냐?"
"없죠."
"재산은 압류당했지?"
"예."
"그럼 여기 있는 게 단데 도망쳐서 뭘 어쩔 건데? 개평이라도 받아먹고 싶으면 돌아와야 할걸?"
"……그럼 관에 신고라도 하면……."
"해 봐."
청명이 다리를 슬쩍 올렸다가 바닥을 내리찧었다.
쿵!
바닥이 쩌적쩌적 갈라진다.
"대신 신고하고 절대 돌아오지 마라. 대륙 끝까지 도망쳐라. 내가 죽어도 그 새끼는 잡을 테니까. 절대 돌아오지 마라. 절대."
"……."
상인들은 그 순간 신고를 포기했다.
생각해 보면 화음에는 아직 그들의 식솔이 남아 있다. 이 미친놈에게서 달아날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관군이 이놈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출발해."
"……예."
화산은 명문 정파답게 자애로웠다.
그럼에도 이들이 불행한 까닭은 단 하나였다. 화산은 자애롭지만, 화산에 사는 이들 모두가 자애롭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그날 해가 채 지기도 전에 서책 한 권 두께의 전표를 손에 든 복면인이 희희낙락하며 화산을 올랐다. 수많은 이의 땀과 눈물로 만들어진 재물은 그렇게 욕심 많은 도사 놈의 창고에 고이 모셔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