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너 이 새끼? 종남파 놈이냐? (5)
상대를 경시한 것은 아니다.
비록 공문연이 반쪽짜리 강호인이라고는 하나 그 마음가짐만은 진짜 강호인에 뒤지지 않는다. 무릇 무학의 길을 걷는 자는 상대를 경시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지 않던가.
더구나 복면인이 호위들을 물리칠 때의 일 수를 본 이상 방심이란 있을 수 없었다.
한데…….
뭔가 좀 요상하다.
보라.
턱.
한껏 뒤로 젖혀 낸 주먹이 채 앞으로 뻗어지기도 전, 가슴 언저리에서 막히고 만다. 그것도 검집 끝에.
막아선 검집을 후려치려고 하면 이미 쏙 빠져 버린 뒤다. 한껏 끌어 올려졌던 내력이 뻗어 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뒤틀린다.
"컥!"
내공이 역류하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이, 이 작자가!"
회선퇴(回旋腿)의 묘리로 복면인을 후려쳤지만, 이미 그 자리에는 복면인이 없었다.
"느려 터져서는."
"헉!"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공문연이 화들짝 놀라 주먹을 뒤로 휘갈겼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턱!
"우욱!"
단전에서 끌어 올린 내력은 허리와 가슴을 통해 증폭되고 팔과 주먹을 발사대 삼아 쏘아져야 한다. 하지만 출발하려는 순간 발사대가 막혀 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펑!
몸 안에서 뭔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그와 동시에 어깻죽지 부근이 확 부풀어 올랐다.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마 어깨 쪽 근육이 터져 나갔을 것이다.
"이익!"
그리고 또 같은 일의 반복.
"으아아아아아!"
공력을 있는 대로 끌어 올려 복면인을 걷어찬다. 하지만 복면인은 딱히 피하는 듯한 모습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저 날아드는 파리를 성가셔하듯 뒤로 딱 한 발짝 물러난다.
공문연의 발이 복면인의 가슴 언저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풍압에 야행복이 파르르 떨렸지만, 복면인의 몸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인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빠른가?
아니다.
그럼 강한가?
그것도 아니다.
복면인은 결코 빠르지도 강하지도 않았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따지자면 공문연은 복면인을 열 명도 더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공문연은 복면인의 옷자락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마치 어린 제자가 스승을 상대하는 것처럼 온갖 발악을 해 보지만 어떤 수도 통하지 않는다.
지금도 보라.
경기를 가득 실은 그의 일격이 복면인의 얼굴을 향해 날아간다. 스치기만 해도 살이 뜯겨 나가고, 뼈가 으스러져 나갈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스칠 수도 없다.
복면인은 마치 세 살 아이의 손짓을 피하듯 느긋하게 고개를 꺾는 것만으로 그의 공격을 완벽하게 파훼해 버린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가?
빠르지 않다.
하지만 빠르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압도적인 느낌으로 움직이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느릿하지만 확실하고 완벽한 순간에 가장 적절한 방향과 적절한 거리로 이동한다.
일체의 낭비가 없는 동작.
무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경지였다. 하지만 그 꿈에나 그리던 경지를 바로 앞에서 맞닥뜨린 공문연의 심정은 그야말로 참담했다.
도깨비를 보는 것 같다.
분명 사람과 엉키고 있는데, 누군가를 상대한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눈에 뻔히 보이는데 건드릴 수조차 없고, 아무리 악을 써도 스치지 못한다.
차라리 눈이 돌아가도록 획획 움직인다면 한계와 수준을 대번에 알고 물러나겠건만, 딱 종이 한 장 지나갈 차이로 빗맞으니 속이 터져 병이 날 지경이다.
'이자는 괴물이다.'
그저 피하는 것뿐이라면 이토록 긴장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자의 무학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내 투로를 모두 읽고 있다.'
권이 채 뻗기도 전에 권이 뻗어 나올 자리를 선점한다. 치고 나가야 할 내력을 속박하여 역류시키고 있었다.
무당의 능유제강과는 다르다. 이건 쾌(快)와 선(先)의 경이로운 조화였다.
대체 얼마나 강한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괴물은 예측이 불가능하기에 괴물이다. 이만한 괴물이 화산에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절대로 화산에 수작을 걸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끄으으응."
공문연의 공격을 슬쩍슬쩍 피하던 복면인이 허리를 잡고 몸을 굽힌다.
"아이고오. 빌어먹을 몸뚱어리. 담 오겠네. 담 오겠어."
"……."
복면인이 헉헉거리며 허리를 두드렸다.
……괴물치고는 뭔가 좀 어설프다.
저만한 고수가 이만한 움직임으로 지쳐서 헉헉댄다?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실제로 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복면인의 가슴팍이 쉴 새 없이 오르내린다. 복면의 입 부분은 뿜어낸 숨으로 서서히 젖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복면 중앙에 드러난 얼굴은 땀으로 가득했다. 목을 타고 흘러내린 굵은 땀방울 때문에 등은 이미 흥건하게 젖어 있다.
누가 봐도 쓰러지기 일보직전이 아닌가?
그 와중에 공격이란 공격은 모조리 다 피해 내고 있으니 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끄응."
복면인이 다시 허리를 편다.
"쯧. 좀 더 놀아 주고 싶은데, 더는 안 되겠다. 나도 힘이 딸려서."
공문연의 얼굴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차 한 잔이 식을 시간 동안 어울렸건만 결국 그는 복면인의 옷자락도 잡지 못했다. 가진 바 모든 능력을 다 발휘할 수 있다면 화산에서도 그를 당해 낼 이가 몇 되지 않으리라 자부했던 공문연이 아닌가?
그런데 난생처음 보는 노인에게, 말 그대로 농락당하고 있었다.
"어째서 당신 같은 사람이 그동안 전면에 나서지 않은 것이오?"
"니가 알아 뭐 하게."
청명이 검을 휘리릭 돌려 다시 잡았다.
"거 주둥아리만 산 놈들은 이상한 착각에 빠져 산다니까. 니가 물어보면 내가 대답해야 되냐?"
"……."
"물어볼 사람은 되레 나지. 거 주루 주인치고는 무공이 무척이나 고강하시네. 이만한 무공을 지닌 양반이 겨우 화음에서 주루나 운영하며 살고 있다?"
"……무공이 강하면 주루를 운영하지 말란 법이 있소?"
"없지. 그런데 무공 강한 주루 주인이 돈을 탐내서 수작질을 부린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이만한 무공이면 굳이 주루를 운영하지 않아도 돈 벌 구석이 많거든. 그런데 술 취한 놈들이나 상대하면서 주루나 굴리고 있다 이 말이지?"
복면에 가려진 청명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
"아아. 됐어."
청명이 공문연의 말을 끊어 버렸다.
"알아, 알아. 어차피 너 말 안 할 거잖아. 그 어떤 음모도 없었고, 아무런 수작도 없었다. 그러니까 생사람 잡지 마라. 나는 누구의 명도 받은 적이 없고, 그 누구와도 관련이 없다. 이 모든 일은 내가 개인적으로 시작한 일이다. 그렇지?"
"……그, 그렇소."
"아암. 그렇겠지."
청명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다 그렇게 말하더라고.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렇게 말하는 놈들은 웬만큼 요절을 내 놓지 않고는 제 입으로 실토하는 일이 없더군. 그런데 사실 니가 지은 죄가 크기는 하지만 내가 너를 갈아 버릴 만큼 크지는 않단 말이지. 생각 같아서는 뼈와 살을 분리해서라도 바른 말을 듣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문제가 생길 거고."
청명이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여기서 문제. 내가 이럴 때 어떻게 하는 줄 아냐?"
"……내가 그걸 어찌 알겠소."
"패."
공문연이 눈이 살짝 커졌다.
"예?"
"팬다고."
"……."
청명이 고개를 두어 번 꺾고 공문연에게로 다가갔다.
"어차피 말 안 할 놈을 붙들고 말해라 어째라 하다 보면 내 속만 터지는 법이지. 그러니까 간단하게 서로 타협하면 돼. 너는 절대 말하지 마라. 나는 네가 말을 안 해도 이 정도면 속이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팰 테니까."
"……."
"혹시라도 중간에 마음이 바뀌어서 말하고 싶어지거든 손을 들고 이야기해. 그런데 생각을 빨리 하는 게 나을 거다. 이미 맞은 매는 환불이 안 되니까."
"이 무슨 억지를!"
"아, 그래. 억지. 그게 내 특기지. 간다!"
청명이 공문연에게 빠르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오는 청명을 보며 공문연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기세를 뿜어내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손에 든 검으로 굉장한 절기를 펼쳐 내는 것도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몰골인 복면인이 그저 두 다리를 움직여 달려드는 것뿐인데 공문연은 화들짝 놀라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가 물러나는 속도는 청명이 달려드는 속도보다 빠를 수 없었다.
청명의 검이 검집째 휘둘러져 공문연의 왼쪽 무릎을 노려 온다. 피하기는 늦었다고 생각한 공문연이 팔에 내력을 둘러 무릎 앞을 막았다.
빠아아악!
이윽고 청명의 검이 공문연의 어깨를 후려친다.
"어억!"
절로 억 소리가 튀어나온다.
'어깨?'
분명히 다리였는데, 왜 갑자기 어깨를 얻어맞는단 말인가?
하지만 생각할 새가 없었다. 공문연의 어깨를 후려친 청명의 검이 다시금 공문연의 머리를 후려쳐 온다.
이번에는 분명히 제대로 각을 잡아 머리 위를 막았다.
터억!
눈앞이 순간적으로 흐려진다.
세상이 검게 암전되었다가 천천히 그 색을 되찾는다. 그와 동시에 숨이 콱 막히며 목이 부러질 듯 아파 왔다.
"꺼어억!"
청명의 검이 그의 목을 찔러 버린 것이다. 검집에서 뽑혀 나오지 않은 검이라 목이 베이지는 않았지만, 쇳덩어리나 다름없는 검집이 목을 쑤셨는데 고통이야 오죽하겠는가?
눈물이 찔끔 배어 나오고, 전신이 덜덜 떨렸다.
빠악! 빠악!
그 와중에 청명의 검이 내리쳐진다.
어깨, 머리, 허리.
이제는 숫제 복날 동네 개 잡듯이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인 건, 그리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데도 공문연은 단 한 번도 제대로 피할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어깨를 뒤틀면 허리를 후려치고, 허리를 뒤로 빼면 머리를 후려친다.
금세 산발이 되어 버린 공문연이 기겁을 하여 뒤로 물러났다.
'주, 죽…….'
이러다 정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순간적으로 공문연을 지배했다.
눈을 번쩍 떠 앞을 바라본 순간 공문연과 청명의 시선이 서로 마주친다.
그리고 그 순간, 공문연은 알 수 있었다.
눈.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청명의 눈을 본 순간 공문연은 직감했다.
살아오면서 그는 저런 눈을 몇 번이고 봤다. 그리고 저런 눈을 한 이들은 하나같이 공통된 특징이 있었다.
살인귀.
정체는 모르겠지만, 저자는 사람을 수도 없이 죽여 본 게 분명하다. 공문연을 때려 죽이는 정도는 지나가던 파리를 잡는 것처럼 여길 놈이다.
장난처럼 휘둘러지는 저 검이 검집에서 뽑히는 순간 공문연은 반항도 하지 못하고 목을 베일 게 분명했다.
'아, 안 돼!'
죽고 싶지 않다. 적어도 여기서는 죽고 싶지 않다!
그 순간 청명의 검이 검집에서 뽑혀 나왔다. 이윽고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공문연의 머리로 내리쳐진다.
"으아아아아아!"
공문연의 손이 푸르게 빛났다. 그리고 검을 휘두르는 청명을 향해 섬전처럼 쏘아져 나간다.
파아아앙!
허공을 후려친 공문연이 팔을 뻗은 그 자세 그대로 멈췄다.
"……."
없다.
있어야 할 곳에 청명이 없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공문연이 황급히 고개를 드니 이미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짝다리를 짚은 청명이 검을 검집에 밀어 넣고 있었다.
청명의 입이 열렸다.
"태을신수(太乙神手)?"
"……."
"너 이 새끼?"
순간 자신의 실책을 알아차린 공문연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종남파 놈이냐?"
그리고 이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