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너 이 새끼? 종남파 놈이냐? (4)
'언제?'
공문연의 눈에 당혹감이 어린다.
접근하는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바로 지척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누구지?'
목소리의 주인을 발견한 공문연의 감정은 당혹에서 당황으로 변했다.
몸에 쫙 달라붙는 검은 야행복, 검은 복면, 그리고 한 손에 들고 있는 검까지.
"……."
누가 봐도 나는 강도다 하고 외치는 듯한 복장이다.
하지만…….
공문연이 시선이 저도 모르게 위쪽으로 올라갔다. 쨍쨍 내리쬐는 해가 그의 눈에 들어온다.
'미친놈인가?'
훤한 대낮에 대로를 돌아다니는 강도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상황인가?
"……당신이 말한 거요?"
누군가 공문연의 의문을 대신 물어 주었다. 그러자 복면인이 뚱한 눈으로 말한 이를 바라본다.
"여기 나 말……. 쿨럭! 쿨럭쿨럭! 끄으으……. 나, 나 말고 누가 있…… 쿨럭! 나?"
"……."
공문연이 멍한 눈으로 강도를 바라보았다.
'곧 죽을 것 같은데?'
노인인가?
구부정한 허리. 피골이 상접하다 못해 뼈다귀 같은 몸. 그리고 복면 사이로 드러난 눈가의 혈색으로 짐작하건대 꽤나 연배가 있어 보인다.
아니면 다 죽어 가는 어린놈이든가.
에이. 하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무슨 용무요? 지나가다 들른 객은 아닌 것 같고."
그러자 복면인이 몇 번 기침을 해 대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끄응. 이러다 죽겠네."
"……."
"무슨 일은 딱 보면 모르겠나?"
"……모르겠소만?"
"벌건 대낮에 이런 복장으로 돌아다니는 놈 정체가 무엇일 것 같으냐?"
"미친놈?"
"……."
"……아니면 치매?"
"강도다! 강도!"
"아, 강도셨구려. 설마 했소."
공문연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쥐도 못 잡을 것 같은 몰골로 강도라니.
물론 겉모습만 보고 상대를 경시하는 행위는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지금 저 작자는 겉모습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검을 꼬나 쥐고 있기는 하지만, 무학을 익힌 강호인 특유의 기세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하기야. 생각이 있는 강호인이라면 이 벌건 대낮에 저런 복장으로 돌아다니진 않겠지.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짓이다.
"이보시오. 노인장."
공문연이 파리 쫓듯 손을 내저었다.
"보아하니 재물을 보고 회가 동한 모양인데, 괜한 목숨 버리지 말고 돌아가시오."
"재물을 보고……. 쿨럭! 회가 동한……. 쿨럭! 쿨럭! 아오! 네놈들이겠지!"
"……뭐라는지 못 알아먹겠는데?"
"끄응."
아무래도 영 의사 전달이 안 되니, 복면인은 허리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지팡이 삼아 짚고 있던 검을 들어 공문연을 가리켰다.
"재물을 뺏으려는 게 아니라, 내 재산을 찾아가려는 것이다."
"조금 전에는 강도라더니?"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라."
"……허어."
공문연이 인상을 썼다.
일이 안 풀리려니까 별 거지 같은 놈이 다 붙는다.
"경을 치기 전에 꺼지는 게 좋을 거요."
"쳐 보든가?"
"이 작자가 진짜!"
공문연이 버럭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복면인의 검 끝이 공문연을 겨눴다.
"머리가 나쁜 놈 같지는 않았는데, 영 말귀를 못 알아먹는군."
공문연이 입을 다물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한참 동안 복면인을 바라보던 공문연은 조금 달라진 어투로 물었다.
"화산에서 오시었소?"
공문연의 말에 상인들이 눈을 크게 떴다.
"화산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공 루주?"
공문연은 상인들의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귀찮은 파리 떼를 상대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복면인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잘 아는구나."
"화산과는 이야기가 끝난 걸로 아는데?"
"화산과는 이야기가 끝났지. 하지만 나와는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장문인이 보낸 것이오?"
"그럴 사람으로 보이디?"
"……아니겠지."
공문연은 화산 장문 현종을 나름 인정하고 있었다. 그가 답답한 인사라는 것은 부정할 도리가 없지만, 답답한 만큼 나름의 정의를 지키는 자다.
앞에서는 보내 준다고 해 놓고 뒤로 다른 사람을 보낼 만큼 닳고 닳은 자는 아니었다.
"화산에서 왔다는 이가 화산 장문의 의지를 어긴다는 말이오?"
"괜찮아."
복면인이 고개를 까딱까딱 꺾었다.
"내가 그 아이의 말을 일일이 들을 만한 배분은 아니거든."
공문연의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
'전대?'
복면으로 가리기는 했지만 구부정한 허리와 삐쩍 마른 몸, 그리고 늙수그레한 목소리를 감안했을 때, 저자는 나이가 꽤 많은 자다.
그리고 화산 장문인에 대한 어투를 감안한다면 장문인 이상의 배분일 수도 있다.
그 말인즉슨,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자는 화산의 전대 고수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고수의 풍모는 전혀 보이지 않는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웬만한 이 앞에서는 평정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공문연이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이는 괴이하기가 이를 데가 없었다.
공문연이 안색을 굳혔다.
"화산의 행사가 이리 치졸할 줄은 몰랐소이다."
"치졸?"
복면인이 코웃음을 쳤다.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는 거지. 연공(燕公)이 지금 너를 보면 뭐라고 하시겠냐?"
"……연공이 누구요?"
복면인, 청명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 이것 봐라?'
연공을 몰라?
연공은 청명이 화산에 있을 당시, 태화루의 루주였다. 공문연이 태화루를 이었다면 모를 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연공을 모른다?
청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냄새가 나는데?'
그것도 아주 구린 냄새가 난다. 어쩌면 이 일은 돈에 미친 몇 놈이 저지른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뭐, 아무래도 좋다."
청명이 검을 까딱거렸다.
"장문인은 사람이 좋아서 니들한테 그 재물을 가져가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사람이 아주 치졸하고 배워 먹은 게 없어서 그 꼴은 못 본다. 성질 같아서는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 버리고 싶지만, 그래도 장문인의 명이니 존중은 해야지. 수레 놔두고 꺼져. 그럼 안 잡을 테니까."
"허허."
공문연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보오. 내가 힘이 없어서 그대로 물러났다고 생각하시오?"
"응."
"……."
공문연이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저놈 말하는 게 좀 이상하다. 대화를 하다 보면 자꾸 말문이 턱턱 막힌다.
"크흠! 큰 착각을 하고 있구려. 내가 순순히 물러난 것은 문제를 크게 만들지 않기 위함이오. 복면 쓰고 강도짓 하는 놈 하나 때려잡지 못해서가 아니라는 거지."
"하하. 말은 잘……. 쿨럭! 쿨럭! 에에에에에헤헤취! 카아악! 퉤! 아이고……. 아이고, 죽겠다."
몸을 숙이고 기침을 해 대는 복면인을 보고 있으니 절로 측은지심이 일었다. 상황만 허락했다면 당장에 달려가 부축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후들거리는 팔다리와 굽어 펴질 줄 모르는 허리를 보고 있으니 눈물이 핑 돌 것 같다.
"……노인장. 지금 돌아간다면 굳이 잡지 않겠소. 힘들어 보이는데, 서서 그러지 말고 그만 가 보시오."
"노인장은 얼어 죽을."
이래 봬도 파릇파릇한 어린이이시다.
지금 좀 쉬어 있기는 하지만.
'아이고 선천지기가 사람 죽이네.'
몸뚱어리가 영 제정신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선천지기를 끌어다 쓰긴 했지만 폐단이 이리 심할 줄은 몰랐다.
하기야 꼼짝없이 세 달은 정양 생활을 해야 할 처지에 온 동네를 쏘다니고 있으니 몸이 멀쩡할 리가 있겠는가. 덕분에 저놈들이 노인으로 오해해 주니 다행이기는 하지만…….
"긴말할 것 없다."
청명이 검을 휘휘 돌린다.
"처맞고 갈 놈들만 남고, 그냥 갈 놈들은 지금 가라. 내가 옛날 같았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패 버렸겠지만, 나도 최근에 느낀 바가 있어서 나름 참고 있는 거니까 괜히 성질 건드리지 말고."
"잘도 지껄이는군."
공문연도 더 이상 대화할 필요가 없다는 듯 선을 그었다.
"마지막 경고요. 이제 더는 이쪽도 사정을 봐주지 않겠소."
"알았으니. 저 뒤에 있는 놈들 나오라고 해라."
공문연이 흠칫했다.
'알아챘다고?'
지금 그의 뒤에는 암중의 호위가 따라붙어 있었다. 워낙 실력이 쟁쟁한 이들이라 웬만한 자는 기척조차 느끼기 힘들 텐데?
"나와라."
공문연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풀숲에서 십여 명의 무사들이 뛰쳐나왔다.
"헉?"
"언제 이런 사람들이?"
상상도 못 한 상인들이 겁먹은 얼굴로 수레에 바짝 붙는다. 그들이야 당연히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빠아아아아아악!
그래도 노인 공경을 하겠답시고 한 번쯤 물러날 기회를 더 주려던 공문연의 입을 틀어막은 것은 꿈에서도 듣기 싫을 만한 타격음이었다.
소리가 얼마나 찰진지 절로 어깨가 들썩인다.
그리고…….
풀썩.
가장 앞으로 튀어나갔던 무사가 모로 쓰러졌다. 살짝 들린 다리가 달달 떨리는 것으로 보아 다시 일어나기는 그른 듯싶다.
청명이 혀를 차며 검을 들었다.
"하여튼!"
빠아아아악!
"요즘 애새끼들은!"
빠아아아악!
"말이 많아요!"
빠아아아아아악!
"나 때는 안 그랬는데!"
털썩!
뭐가 뭔지 파악도 하지 못한 순간에 다섯이나 되는 무사들이 바닥에 쓰러졌다. 눈으로 보고도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쯧."
검집째 검을 회수한 청명이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짝다리를 짚은 채 공문연을 노려본다.
다른 건장한 이가 했으면 꽤나 괜찮은 광경이 나왔을지 모른다. 하지만 피골은 상접해서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히고 있는 청명이 그런 자세를 취하자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담함이 느껴진다.
"아가야."
청명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네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옛날부터 내 말을 무시한 애들 중에 팔다리 멀쩡하게 돌아간 애가 없었다. 말이 안 통하면 짐승이지. 짐승은 매가 약이고. 어디, 그 약이 네놈에게도 통하는지 확인해 볼까?"
청명이 검을 어깨에 올린 채 휘적휘적 걸어왔다.
그 모습을 본 무사들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난다. 기세에서 완전히 눌린 것이다.
"물러서라! 쓸모없는 것들."
무사들을 뒤로 물린 공문연이 이를 갈며 앞으로 나섰다.
'화산에 아직 이런 이가 남아 있었다는 말인가?'
이빨과 손톱이 모조리 뽑혀 나간 호랑이인 줄 알았다. 아니, 그 건 맞을 것이다. 착오가 하나 있었다면, 호랑이라는 동물은 굳이 이빨과 손톱 없이 앞발만으로도 웬만한 사람 하나는 일격에 죽여 버릴 수 있단 걸 간과했단 거겠지.
"왜 당신 같은 사람이 두문불출했는지 모를 일이군. 전면에 나섰다면 화산이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니가 뭘 알겠냐.
청명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공문연이 날카로운 음성으로 선수를 쳤다.
"하나, 시기를 잘못 정했소. 안 그래도 화산에 한 방 먹여 주고 싶었는데, 잘되었군. 당신쯤 되는 사람이 내 손에 죽어 나간다면 장문인이 통탄하겠지. 각오하시오."
공문연이 기운을 끌어 올렸다.
주변의 풀들이 공문연의 기파를 타고 위로 솟구친다. 감히 일개 현의 객잔 주인이 보일 수 있는 기세가 아니었다.
"그렇지. 내가 너 뭔가 있을 줄 알았지."
청명이 눈을 빛냈다.
"걱정하지 마. 주둥아리는 안 팰 테니까."
그래야 말을 하지 않겠어?
청명이 공문연에게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 순간 공문연이 양손을 치켜들며 청명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