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너 이 새끼? 종남파 놈이냐? (3)
"사형! 대사형!"
"왜 이리 호들갑이냐?"
"들으셨습니까?"
윤종이 피식 웃었다.
"뭘 들었냐는 말이냐?"
"벌써 소문이 파다하게 나지 않았습니까? 못 들으셨습니까?"
"귀가 있으니 못 들을 것도 없다."
윤종이 태연하게 대답하자 조걸이 더욱 호들갑을 떨었다.
"화산에 빚 독촉을 하던 화음의 상인들이 알고 보니 과거 화산의 대리인들이었답니다. 그들의 사업체도 모조리 화산의 것이고요."
"그렇다더구나."
"지금 화음에는 난리가 났답니다. 관병들이 화음을 점거하고 그들의 재산을 모조리 몰수하고 있답니다."
"그것도 들었다."
"아이고, 대사형! 뭐가 그렇게 태연하십니까. 하! 이래서 내가 도사 될 사람들이랑은 말을 말아야 하는데!"
조걸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그게 그리 대단한 일이더냐?"
"대단하지요. 대단하고말고요. 몰려온 이들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면 그 돈이 다 얼마인지나 아십니까? 그들의 재산은 둘째 치고, 그들의 사업장만 가져올 수 있어도 화산은 대대로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될 겁니다."
"그렇게나……?"
윤종이 조금은 심각함을 알았다는 듯 새삼스러운 눈으로 조걸을 바라보았다.
그는 애초에 도인이 될 사람이고, 태생도 상계(商界)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 그가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과 상가의 자제인 조걸의 시선은 확연히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
"생각보다 큰일이었던 모양이구나."
"아이고, 사형. 사형도 훗날에는 화산을 이끌어야 하는데, 그렇게 금전 감각이 없어서는 큰일 납니다."
"으음. 명심하지."
소문이야 들었지만, 그게 그리 엄청난 일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저 빚 독촉은 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예상보다 꽤나 대단한 일인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의문점이 생겨났다.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냐. 장문인께서는 왜 지금까지 그 수모를 참으셨고?"
"그, 그게……."
"응?"
조걸의 얼굴이 묘하게 복잡해졌다.
"장부를 이번에 발견했다고 하더라고요?"
"장부?"
"예. 화산의 사업체와 관련된 장부 말입니다. 며칠 전에 그걸 발견해서 저놈들을 때려잡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조걸은 은근히 말끝을 흐린다. 그리고 윤종은 조걸의 표정이 떨떠름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며칠 전이란 말이지."
"예."
"며칠 전에 장부가 발견됐다. 그리고 그 장부는 분명히 서책의 형태를 하고 있겠지?"
"그렇겠지요."
윤종이 허탈하게 웃었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며칠 전에 서책이 발견되는 모습을 본 것 같구나. 그렇지 않으냐?"
"……그렇지요."
조걸과 윤종이 차마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미묘한 시선을 교환했다.
'그 궤짝.'
'거기 분명히 서책이 들어 있었지.'
우연이라 하기에는 너무 공교롭다. 거기다가 궤짝 안의 내용을 확인한 장문인의 반응이 너무도 인상적이지 않았던가?
"설마라고 하고 싶은데 말이다."
"저도 같은 심정입니다만."
조걸과 윤종의 얼굴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게다가 그 전의 놈의 반응이 좀……."
"대놓고 너무 이상했지요."
- 아이쿠우우우! 이게 뭐야? 여기에 웬 돌부리가아아아아!
- 아니, 세상에! 돌부리가 아니잖아! 누가 이런 데다 이런 걸 묻어 두었지이? 이상하네? 허허허허. 거참 이상하네.
- 파 볼까? 내가 파 봐도 괜찮겠지? 하하하하. 하하. 여기에 이런 게 묻혀 있다니. 참 이상한 일이로구나아아. 보물도 아닐 텐데에에에에.
윤종이 눈을 질끈 감았다.
'속아 주려고 해도 웬만해야 속아 주지. 빌어먹을.'
그 어색한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세 살짜리 아이가 들어도 분명히
'아 이놈 뭔가 이상한 수작을 꾸미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거지 같은 연기 후에 나온 궤짝이라…….
"역시나?"
"그렇겠죠?"
조걸과 윤종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대체 그런 걸 어디서 찾은 걸까?"
"……알면 알수록 알 수가 없는 놈입니다."
"끄응."
윤종이 고개를 내젓는다.
수상한 점이 너무 많다. 굳이 심혈을 기울여 보지 않아도 걸을 때마다 수상한 점이 우르르 굴러떨어지는 것 같다.
그럼에도 윤종이 청명을 크게 경계하지 않는 이유는 화산에 대한 그의 진정성만은 확연하기 때문이다.
이번 일만 해도 마찬가지다. 어쨌거나 청명이 그 장부들을 찾아 준 덕분에 화산이 큰 이득을 보지 않았는가?
"여하튼……."
그 순간이었다.
"대사형!"
방 밖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혹시 청명 못 보셨습니까?"
"청명은 왜?"
"장문인께서 찾으시는데 도통 어디에 있는지 보이질 않습니다. 방에도 없고."
"……음?"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려던 윤종의 몸이 뚝 멈췄다. 이내 그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기 시작한다.
"없어?"
"예. 아무 데도."
"서, 설마!"
윤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허겁지겁 청명의 방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문을 박차고 들어간 윤종이 청명의 옷장을 열어젖혔다.
"사형! 왜 그러십니까?"
뒤늦게 윤종을 따라 다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온 조걸이 소리쳤다.
"……없다."
"예?"
"그게 없다고."
윤종이 텅 빈 옷장을 가리켰다. 옷장 안에는 청명의 도복이 놓여 있었다.
"어? 도포도 벗어 놓고 어딜……."
그 순간 조걸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도복을 벗었다는 것은 다른 옷을 입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평상복도 도복의 옆에 놓여 있다. 보이지 않는 옷은 그러니까…….
"서, 설마."
얼마 전 조걸이 구해다 준 야행복, 그리고 복면이다.
윤종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
청명이 진정 화산의 홍복인지, 재앙인지 도무지 구분이 가지 않는 두 사람이었다.
* * *
"허……."
조금명은 넋이 나간 얼굴로 수레를 바라보았다. 수레에는 그가 지금까지 모아 온 재물의 일부가 담겨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가득 담긴 재물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깜짝 놀랄 만한 양이지만, 그 재물을 보는 조금명의 심정은 참담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하루아침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허겁지겁 화산에서 내려온 그들이 본 것은 이미 관병들에게 점거당한 그들의 사업장이었다. 병기로 무장한 관병들이 사업장을 둘러싸고 있었고, 그들에게는 추방령이 내려졌다.
항의하는 그들에게 돌아온 말은 화산 장문인의 부탁이 없었더라면 모두 관아로 압송했을 거라는 호통뿐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 장부가 진짜였다는 소리다.
하지만 조금명은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가문 대대로 운영해 온 매화공방이 화산의 것이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선대에서 운영하고 있었기에 자연히 이어받았을 뿐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공방을 빼앗기고 화음에서 쫓겨나게 되다니. 이리 억울할 데가 세상천지에 어디 또 있단 말인가?
다른 이들의 표정 역시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대 두 대 모이기 시작하는 수레를 보니 조금명은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오?"
"그러게나 말이외다."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들은 당장 화음에서 쫓겨나지만, 식솔들은 조금 더 머무르는 게 허용되었다. 이제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식솔들에게 뒷일을 맡기고 화음을 떠날 수밖에 없다.
"정녕 이렇게 떠나야 한단 말이오?"
"그럼 어쩌겠소?"
"항의라도 해 봐야……."
"항의?"
화영객잔의 진이산이 죽일 듯한 눈으로 조금명을 노려보았다.
"아까 초평 점주가 항의하다가 관아로 끌려가는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하는 거요? 우리는 사기꾼이오, 사기꾼! 장문인이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떠나는 게 아니라 옥에 갇힐 몸이었다는 말이외다! 그런데 뭘 어떻게 따진다는 말이오?"
조금명의 어깨가 축 쳐졌다.
"빌어먹을!"
진이산이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렸다.
"갑시다!"
"버, 벌써?"
"한 시진 내로 떠나지 않으면 옥에 가두겠다는 말을 못 들었소이까! 대책이고 나발이고 일단은 화음에서 벗어나야 하오!"
결국 조금명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켜보던 이들도 어두운 얼굴로 앞서 나가는 조금명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그들은 한참이나 수레를 타고 나간 끝에야 화음을 벗어날 수 있었다. 나무 그늘에 수레를 잠깐 세운 그들은 터덜터덜 수레에서 내려 모여들었다.
"……이쯤이면 되었겠지."
"아까부터 뒤에서 감시하던 관병들도 돌아간 것 같소이다. 이제는 마음을 놓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마음이 놓여야 말이지요."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급한 상황을 벗어나자 다른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조금명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공문연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그를 보니 안 그래도 터진 속이 문드러질 지경이다.
"공 루주!"
목소리가 날카롭게 튀어나온다.
"이제 어찌해야 하는 것입니까?"
조금명이 포문을 열자 다른 이들도 공문연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말 좀 해 보십시오!"
"공 루주만 믿으면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공 루주를 믿었다가 사기꾼이 되게 생겼습니다. 이 일을 어찌 책임지실 생각이시오!"
공문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그의 눈을 본 이들이 다들 입을 닫았다. 늘상 군자처럼 부드럽던 공문연의 눈이 살기로 번들대고 있다.
"지금 나를 탓하셨소?"
"……."
공문연의 기세에 눌린 이들이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났다.
"아,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대책을 세우자는 말이지요. 대책을……."
모두가 움찔하자 좌중을 압도한 공문연이 기세를 더욱 끌어올렸다.
"한심한 작자들 같으니."
"……."
"……."
공문연이 차갑게 일갈한다.
"어차피 화산과 척을 지자고 시작한 일이 아니오! 그대들 중 한 점 부끄럼 없이 떳떳한 이가 있소? 은연중에 다들 알고 있었을 텐데?"
대답이 없었다.
그래도 아직 부끄러움을 아는 이들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했다.
공문연은 조금 기세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호들갑 떨 것 없소. 지금은 그저 비를 피하는 것뿐이니까. 절대 이대로는 끝나지 않소."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그 장부가 진짜일 리 있겠소?"
"……."
"보나마나 위조한 장부겠지."
"하, 하나 관아에서……."
"현령과 말을 맞췄다면 그깟 장부의 진위를 조작하는 게 뭐 별거겠소! 재물을 현령과 나누기로 했겠지!"
"아!"
상인들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럼?"
"일단은 낙양으로 갑시다. 낙양까지만 가면 손을 써 볼 수 있소. 저놈들이 권력으로 사람을 누르려 한다면 더 큰 권력으로 상대해야지! 저 간악한 현령과 화산의 장문인에게 반드시 벌을 내리고 말 것이오!"
"오오!"
"그럼 그렇지! 갑자기 백 년 전 장부가 나온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저 사기꾼들의 수작을 밝혀야 합니다!"
상인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중이다.
저 장부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공문연의 말처럼 권력의 힘을 이용할 수 있다면 진짜 장부도 가짜로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재산을 돌려받는 일 정도는 별게 아닌 것이다.
달라진 반응을 보며 공문연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걱정할 것 없소이다. 다 내가 해결할 테니 믿고 따라오기나 하시오."
"저희는 루주만 믿습니다!"
"처음부터 믿고 있었지요! 암요."
'한심한 것들.'
공문연이 슬쩍 눈을 찌푸렸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긴 하지만 아직은 이놈들이 필요하다. 혼자보다는 같이 목소리를 내어 주는 이들이 있는 편이 유리하니까. 일단 이들을 이끌고 낙양으로만 가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 그에게는 확실한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뒷배가…….
"지랄하고 있다."
그때, 낯선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공문연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