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32화 (33/1,567)

32화. 너 이 새끼? 종남파 놈이냐? (2)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현종의 입에서 나온 선언이 너무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현종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 이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고, 아직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이들도 분위기에 짓눌려 감히 입을 열 수 없었다.

"자, 장문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문인?"

소란은 급격하게 터졌다.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상인들이 악을 쓰듯 소리를 질러 댔지만 현종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평소 그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싸늘한 얼굴이 상인들을 짓누른다.

"말 그대로요."

"하, 하지만……!"

"저희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그때였다.

"조용."

공문연의 싸늘한 목소리가 상인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현종과 공문연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힌다.

"장문인."

"말씀하시오. 공 루주."

태도는 달라진 게 없었지만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현종은 더 이상 여유로운 태도로 일관하지 않았고, 공문연의 안색에서도 예의상 걸었던 부드러움이 사라졌다.

"장난이 너무 심하신 것 같습니다."

"장난이라 하였소?"

"그렇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 든다. 평소라면 부드럽게 넘겼을 현종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대 화산의 장문인 자리가 그대와 농을 나눌 정도로 한가해 보인다면 유감이오."

공문연이 입을 꾹 다문다. 그의 입매가 평소와 달리 이지러진다.

"확실히 이 장부에 따르면, 화음 상인 연합의 사업체 대부분은 화산의 소유가 됩니다. 저희가 화산에 정당한 대가를 주고 사업을 인수했다는 증좌를 내밀지 못한다면 재산을 몰수당해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잘 알고 있구려."

"하나."

공문연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지금까지 그가 보여 주던 미소와는 확연히 그 느낌이 달랐다. 억지로 지어낸 듯 어색한 미소다.

"그건 이 장부가 진짜일 때의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현종이 말없이 공문연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공문연은 그 눈빛에도 눌리지 않고 제 말을 이어 갔다.

"갑자기 튀어나온 이 장부가 진품인지 아닌지를 어찌 증명한다는 말입니까?"

"그 말인즉슨……."

현종이 눈을 가늘게 떴다.

"화산이 지금 거짓 증좌를 내어 놨다고 말하는 것이외까?"

"화산이 그럴 리는 없겠지요."

공문연이 살짝 한발을 뺐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태도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화산 역시 이 거짓 장부에 속고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장부가 진품인지 검증되지 않는다면 저희는 이 장부를 믿을 수 없습니다."

"옳소이다!"

"지극히 상식적인 말입니다!"

상인들이 옳다구나 공문연의 발언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현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현영을 바라보았다.

"재경각주."

"예, 장문인!"

"어찌 생각하는가?"

"저들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재경각주 현영이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을 했다. 그 모습이 상인들이 쾌재를 불렀다.

"하면 어찌해야 하는가?"

"장문인. 논의가 잘못되었습니다."

"음?"

현영이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장부가 진품인지 아닌지 가리는 것은 우리와 저들의 일이 아닙니다. 이럴 때 시시비비를 가리는 곳이 바로 관아(官衙)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현영이 포권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이미 화음의 관아에 장부의 절반을 맡겨 진품임을 검증받고 있습니다. 장부가 진품임이 검증된다면 관에서 친히 저들의 사업장을 몰수할 것입니다."

공문연이 눈을 부릅떴다.

"이, 이미 맡겼다고 하시었소?"

"그렇소이다. 왜?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현영의 태연한 반문이 공문연의 체온을 낮춘다. 등골에서 식은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당했다.'

그들이 화음에 있었다면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화산에 있다. 그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관병들이 사업장으로 몰려가 점거를 시작한다면 남아 있는 이들만으로는 대처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저 작자가!'

현종을 노려보는 공문연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현종은 애초부터 이럴 작정으로 그들을 화산으로 불러 모은 것이다. 장부를 상인들에게 직접 보여 주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건 눈 가리기에 불과했다. 저들이 진정으로 노린 것은 그들을 화음에서 떨어뜨려 놓는 것이다.

"관에 장부를 맡긴 게 언제요?"

"이틀 전이외다."

"……이."

공문연이 이를 갈았다.

이틀이면 장부를 모두 검증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절반을 맡겼다고는 했지만, 장부라는 게 어디 절반으로 대조가 가능한 것이던가. 지금 궤짝에 들어 있는 장부는 이미 검토를 마친 것임에 분명했다.

그 말인즉슨, 산 밑에선 이미 장부의 진위를 가리고 사업장을 몰수할 준비를 마친 관군들이 대기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화음의 관아는 대대로 화산에 친화적인 곳. 만약 장문인이 화산의 인맥을 동원하여 위에서부터 압박을 했다면, 화음 현령이 어찌 나올지는 불을 보듯 빤하지 않은가?

아마 지금쯤이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장문인!"

공문연의 입에서 절로 노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현종은 더 이상 그가 알던 너그러운 장문인이 아니었다.

"목소리를 낮추시오."

현종의 전신에서 준엄한 기세가 뿜어져 나온다. 좀처럼 사람에게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는 공문연이지만, 현종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는 일순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화산이라는 이름.

이제는 거죽밖에 남아 있지 않은 그 이름을 짊어진 이에게서 뿜어지는 기세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대들에게는 입을 열 자격이 없소."

현종이 차가운 눈으로 상인들을 응시한다. 그 시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몇몇은 고개를 떨구며 현종의 눈을 피했다.

"진정한 친우란 힘들 때 손을 내미는 이요. 힘이 들 때 칼을 들이미는 이들을 친우로 대할 필요는 없겠지. 돌아가시오. 화음에 내려가면 모든 것이 끝나 있을 것이오. 본래대로라면 그대들의 모든 것을 회수하여야겠으나……."

현종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의 노고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러니 각자 수레 한 대분의 재물을 가져가도록 허가하겠소."

"자, 장문인."

아무리 눈치가 없는 이들이라 해도 이쯤 되면 상황이 어찌 흘러가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나는 그대들에게 최대의 호의를 베풀었소."

그때 재경각주 현영이 입을 열었다.

"장문인. 이들은 화산을 능멸하고 그 재산마저 빼돌린 이들입니다. 그에 그치지 않고 화산이 베푼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 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그만한 호의는……."

"짐승이 물어뜯으려 했다 해서, 같이 이를 드러내면 나 역시 짐승이 되는 것이다."

현종이 손을 내저었다.

"내 이미 정했으니 재경각주는 더 이상 이 일을 언급하지 말게나."

"예, 장문인."

현영이 고개를 숙였다.

"내려들 가 보시오. 그대들의 눈으로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하지 않겠소?"

공문연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이를 드러낸 그는 숫제 죽일 듯 현종을 노려보았다.

"장문인. 그 부드러운 얼굴 뒤에 독심(毒心)을 숨기고 계셨구려."

"독심이라……."

현종이 빙그레 웃었다.

"독심이라면 독심이겠구려. 어디 그대들에 비할 수 있겠냐만."

"……이 빚은 잊지 않겠소이다."

"그러시오. 운암. 이분들을 모셔다 드려라."

"예. 장문인!"

공문연이 몸을 획 돌렸다. 그리고 운암의 안내를 기다리지도 않고 산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둘의 눈치를 살피던 상인들도 다급하게 공문연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한시라도 빨리 산을 내려가 화음이 어떻게 됐는지 확인해야 한다.

산문으로 향하는 상인들을 보며 현종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장문인! 고생하셨습니다."

"암."

현종이 현영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이제 화산은 됐습니다. 됐고말고요!"

"너무 그렇게 기분 내지 말게나. 이제야 산 하나를 넘은 걸세."

"그보다 큰 산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제 다 잘될 것입니다."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는 현영을 보며 현종은 빙그레 웃고 말았다.

재경각주가 저리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게 몇십 년 만이다. 모두 제각기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다 그 아이 덕분이지.'

가히 화산의 홍복이라 할 수 있겠다.

큰 상을 내려야 할 텐데 대체 어떤 상을 주어야 이 공로를 모두 치하할 수 있을까?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현종의 시선이 유종산과 나머지 상인들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장문인의 눈을 본 이들이 즉각 고개를 숙인다.

"그대들은 마지막까지 인의를 잃지 않아 주었소이다."

현종의 태도는 조금 전 다른 상인들을 대하는 것과 사뭇 달랐다. 엄중함을 잃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부드럽다.

"장문인. 저희는 이게 뭐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그대들의 사업장이 화산의 것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소. 당연히 화산의 것은 화산에게로 돌아와야겠지. 하지만 그대들이 앞으로도 사업장을 운영하며 그 대가를 받을 수 있게 해 주겠소이다."

"……."

유종산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당장 지금 산을 허둥지둥 내려가고 있을 이들보다는 처지가 낫기는 하지만, 사업장을 빼앗기는 것은 마찬가지다. 당장 유종산만 하더라도 포목점의 점주에서 대리인이 되어 버리지 않는가?

"하면……."

유종산이 항의를 하려는 순간, 현영이 슬쩍 입을 열었다.

"과한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이지요."

"……."

"본디 자신의 것이 아닌 재산으로 타인을 압박했으니, 이 역시 죄입니다. 화산은 그저 여러분께 그 죄의 무게를 덜 기회를 드린 것뿐이지요."

한숨이 새어 나온다.

만약 이 모든 것이 가짜에서 비롯되었다면 현영의 말이 맞다.

'할아버님.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새삼 부끄러워졌다.

"재경각주."

"예, 장문인."

"하나 이분들께서 화산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마지막 순간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 아닌가."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함께 논의해 보시게. 좋은 방향이 있는지. 화산은 친우에게는 여전히 따뜻한 곳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예, 장문인.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현영이 슬쩍 앞으로 나서 상인들에게 손짓했다.

"이쪽으로 오시오. 재경각으로 가 앞으로의 일을 논의해 보도록 합시다."

"……예."

상인들이 현영을 따라 걸었다. 얼굴에 복잡한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었다.

모두가 멀어지는 가운데, 현종은 홀로 남아 가만히 화산을 둘러보았다.

하루하루 이 광경을 눈에 담지 않은 날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그의 눈에 들어오는 화산은 어제와는 확연히 그 느낌이 달랐다.

삭막하고 바래 가던 전각들이 오늘따라 생기가 넘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인가?'

아니. 그렇게만 끝나지는 않는다.

언제나 비보만 접해 왔던 화산이 몇십 년 만에 받은 낭보다. 흐름이라는 것은 묘한 면이 있어서, 한번 그 방향을 바꾸면 인력으로는 되돌리는 일이 쉽지 않다.

좋은 쪽으로 물꼬가 트였으니 이제 화산도 이전과는 달라질 것이다. 현종은 그리 믿었다.

어쩌면 오늘을 계기로 잊혔던 화산의 영광이 되돌아올지도 모른다.

'반드시 그리 되어야지.'

주름 가득한 현종의 얼굴에 수심 하나 없는 맑은 미소가 피어났다.

"……저, 저……."

그리고 주름 하나 없는 깨끗한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저 호구 새끼!"

청명의 눈에 불꽃이 튄다.

뭐? 수레 한 대분?

짐승이 뭐 어쩌고 저째?

"오냐. 짐승이 뭔지 내 확실하게 보여 주마!"

현종은 그들을 그리 보냈으나.

청명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다.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