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너 이 새끼? 종남파 놈이냐? (1)
"대체?"
"그런 얼굴로 보지 마시오. 나도 내가 병신 짓을 하고 있다는 건 아니까."
유종산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젓는다.
"아는 사람이 왜?"
"이보시오. 공 루주."
"……."
"당신은 화음 사람이 아니잖소."
공문연의 얼굴이 멍해졌다.
이게 무슨 소린가?
"당신이야 화음에 사위로 들어온 사람이니까 모르겠지. 화음에서 화산이 어떤 의미인지 말이요."
"아니!"
공문연이 입을 뻐끔거렸다.
이게 무슨 개소리라는 말인가? 화음 사람이고 아니고가 지금 왜 중요한가?
"이보시오. 유 점주."
"아아. 됐소이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니까."
유종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돈이면 나라님도 팔아먹는 세상에 화음이 어쩌고 하는 게 같잖아 보인다는 건 잘 알고 있소."
공문연이 황당한 얼굴로 유종산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하다.
"그런데 나는 화음 사람이란 말이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요?"
"화음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다들 화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라오. 젖먹이를 벗어나면 너도 화산에 입산해서 천하의 고수가 되어야지라는 말을 듣고, 재능이 없어 화산에 들지 못한다는 걸 알아 버린 뒤에도 화산이 어찌 천하와 섬서를 지켜 왔는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란다는 말이오."
공문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나뿐만이 아니오. 내 아버지도, 내 할아버지도 그리 자랐소이다. 화산은 섬서의 자부심이고, 화음의 자부심이오. 그리고……."
유종산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나는 아니더라도, 내 아버지나 내 할아버지의 자부심이기도 했소이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거요?"
"그런데 내가 돈 좀 벌겠다고 화산을 무너뜨리면? 내가 저승에 가면 우리 아버지가 날 가만히 내버려 두시겠소? 몇 날 며칠을 처맞고 또 처맞겠지."
낮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공문연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다들 입을 닫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래서? 겨우 그런 이유 때문에 거금을 포기하겠다는 거요?"
"포기는 뭔 놈의 포기요. 장문인께서 보상해 주시겠다는 말을 못 들었소이까?"
"그 말을 믿는단 말이오?"
"믿고 말고 할 것도 없소. 막말로 그 돈은 받아서 뭐 할 거요."
유종산이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돈 받아서 떠나 버릴 당신 같은 사람이야 그 돈 써먹을 데가 많겠지. 항주 같은 곳으로 가면 돈 쓸 곳이야 널렸으니까. 하지만 내가 돈을 벌어 어딜 가겠소. 평생을 화음에서 땅 파먹고 산 내가 이제와 항주? 소주? 웃기지도 않는 소리지."
유종산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다. 화산을 오를 때만 하더라도 그는 돈을 받아 내어 떵떵거리며 살 생각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 이런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미친 거지.'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이 지금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유종산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 후회할 거요."
"당연히 후회하겠지. 빌어먹을! 내가 후회한다는 걸 몰라서 이 지랄을 하는 것처럼 보이시오! 내가 당신보다 더 잘 알고 있소! 당연히 후회하겠지!"
유종산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런데 내 손으로 화산을 망하게 하는 것보다는 덜 찝찝할 거란 말이오!"
공문연이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유종산을 바라본다.
유종산 역시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지,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하고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이보시오. 공 루주. 나는 지금도 나름 먹고살 만하단 말이오. 내가 지금 여기서 화산을 지키려 든다면 나는 돈을 떼이겠지. 그럼 그냥 그때 돈이나 챙길 걸 하면서 궁상맞게 살 수는 있단 말이오. 하지만 여기서 내가 화산의 기둥뿌리마저 뽑아 버린다면 나는 죽는 그날까지 쓸데도 없는 돈을 안고 후회하며 살게 될 거요.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소."
공문연이 유종산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제정신인가?'
도대체 유종산이 무슨 말을 늘어놓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굳이 이해할 필요도 없지.'
제 발로 불구덩이에 들어가겠다는데 무슨 의리로 말린다는 말인가? 저 한 사람 빠진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마음대로 하시구려. 당신 하나 빠진다고 달라질 것도 없으니까."
"누가 하나라고 하더이까?"
공문연의 움직임이 덜컥 멎었다. 그러다 이윽고 고개가 천천히 돌아간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그의 머리가 그가 지금 얼마나 열이 올랐는지를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서문 장주."
서문종이 저벅저벅 걸어 유종산의 옆에 가 섰다.
"지금 뭐 하는 거요?"
"보시면 모르겠소?"
공문연이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선 이는 서문종만이 아니었다. 유종산의 목소리가 계기가 되었는지 함께 올라온 이십여 명 중 다섯이 유종산 쪽에 가 섰다.
"허어, 거참."
공문연이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저런 한심한 작자들을 보았나?'
명색이 상인이라는 작자들이 어찌 저리 멍청한 선택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긴, 그러니 이런 시골에나 처박혀 빌어먹고 사는 것이겠지.
'아니, 아니지.'
한심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던 공문연의 얼굴이 금세 신중하게 굳어졌다.
'상대가 화산이 아니었다면 저들도 절대 저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이나 아직도 화음에 화산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라는 거겠지.'
감정에 휘둘리면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게 된다. 상대를 경시하는 것은 상인이 절대로 하지 않아야 할 일이다. 그가 그토록 우려하던 화산의 저력이 이 순간 발휘되었다고 생각하는 게 옳다.
공문연은 옆쪽으로 넘어간 이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들 못내 아쉬워하면서도 후련함이 담긴 얼굴들을 하고 있다.
'어리석은 것들.'
마지막까지 화산을 버리지 않았다는 자부심?
그런 건 화산이 존속할 때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저들이 변제일을 미뤄 준다고 해도 화산은 나머지 돈을 갚을 여력이 없다. 저들은 결국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거금을 날린 것이다.
판단을 끝낸 공문연이 차분하게 물었다.
"더는 다른 생각을 하시는 분이 없소이까?"
남아 있는 상인들은 현종과 공문연의 눈치를 살피고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장문인."
"……."
공문연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화산의 이름이 아직 이리 드높을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인 듯하군요. 남은 이들은 변제일을 미룰 생각이 없으니, 이제 그만 저희가 빌려준 돈을 갚아 주셨으면 합니다."
현종이 허허롭게 웃었다. 그의 시선은 공문연이 아니라 그 뒤의 상인들에게로 향해 있었다.
"정말 더는 화산을 도와주실 분들이 안 계십니까?"
"……."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요."
"장문인."
"재촉하지 마시오. 공 루주."
공문연이 움찔했다.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현종의 목소리에는 감히 항거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
옆쪽에 따로 선 유종산과 상인 몇을 돌아본 현종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아직 화산에 뜻을 둔 이들이 남아 있다는 걸 확인한 것만으로 족하외다. 세상이 아직 화산을 버리지는 않았다는 뜻 아니겠소?"
공문연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현종이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운암!"
"예. 장문인!"
"가져오너라!"
"예."
운암이 고개를 숙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어딘가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공문연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준비가 되었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공문연이라고 해서 두 손 놓고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화산에 그만한 돈을 빌려준 이가 있었다면 반드시 공문연의 귀에도 들어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허세란 말인가?
아니, 그것도 말이 안 된다. 허세라는 것은 뒤가 있을 때, 부리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화산에는 뒤가 없지 않은가? 허세를 부려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공문연이 채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운암이 돌아온다. 갈 때는 혼자였지만, 돌아오는 사람은 모두 셋이었다.
'현자 배인가?'
운암과 함께 오는 이들의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걸로 봐서는 화산의 장로들인 모양이었다. 그들 중 하나의 손에는 커다란 궤짝이 들려 있었다.
"장문인, 가져왔습니다."
현종이 턱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내려놓게."
"예."
턱.
궤짝이 바닥에 놓인다.
공문연은 궤짝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것은……?"
"그 안에 그대들에게 갚아야 할 재물이 들었으니 확인해 보시오."
"……지금 재물이라 하셨습니까?"
"그렇소이다."
공문연이 의혹에 찬 눈으로 궤짝을 바라보았다.
'설마 나와 농을 하자는 건 아닐 테고.'
그가 아는 현종은 이런 상황에서 농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저 안에 정말 재물이 들었다는 말인가?
여러 가지 생각이 앞다투어 들었지만, 지금은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바로 눈앞에 궤짝이 있는데 생각을 해서 무엇 한다는 말인가?
공문연이 홀린 듯이 궤짝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안에 든 물건을 확인한 그의 눈이 확 가늘어진다.
"이건……."
재물?
이 책이 재물일 리는 없을 텐데?
"장문인. 지금 저를 놀리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소? 나는 분명 그대들이 원한 것을 주었소이다."
"이게 무엇입니까?"
"읽어 보면 알 것이오."
태연한 현종의 얼굴을 본 공문연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궤짝 안에 든 서책 중 한 권을 뽑아 들었다. 그러더니 선 자리에서 그 내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사라락.
사라락.
책장 넘기는 소리가 고요한 화산에 퍼져 나간다. 한 장 한 장이 더 넘어갈 때마다 공문연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어 갔다.
"이, 이건……."
얼굴색이 완전히 변해 버린 공문연이 책을 쥔 손을 덜덜 떨며 현종을 바라보았다.
"이, 이게 무슨……."
공문연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공문연의 눈치를 살피던 상인들이 슬그머니 공문연 쪽으로 다가왔다.
"그게 뭡니까? 공 루주?"
"저희도 좀 봅시다."
"……."
공문연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상인들이 슬쩍 궤짝을 바라보았다. 안에 아직 여러 권의 서책이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 이들이 슬쩍 손을 뻗어 서책들을 꺼낸다.
"대체 이게 뭐기에……."
살짝 긴장한 얼굴로 내용을 확인한 이들의 얼굴이 이내 의문으로 물들었다.
"이건 장부가 아닙니까?"
"그렇소."
현종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옛날 장부 같은데, 이걸 갑자기 왜……?"
현종이 빙그레 웃었다.
"여러분이 보고 계시는 장부는 화산의 전대가 사업체의 관리를 위해 만들어 둔 장부요."
"……예? 그게 대체?"
현종의 눈이 조금 가라앉았다.
"공 루주. 확인하셨소?"
"……."
현종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진다.
"그 장부에는 지금 여러분들이 운영하고 있는 화음의 사업체의 원주인이 화산임을 증명하는 내용이 들어 있소이다."
"예?"
"아, 아니,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장문인?"
"조용."
현종이 단호하게 그들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아직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이들을 향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화산은 그대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소. 하나 그대들은 은혜를 원수로 갚았구려. 아무리 화산이 선을 숭상하는 문파라고는 하나, 은혜를 모르고 주인을 물어뜯는 쥐새끼들에게까지 호의를 보일 만큼 우스운 곳은 아니오."
준엄한 현종의 질책이 날카롭게 쏟아진다.
"이에 화산은 이 장부를 바탕으로 여러분이 운영하고 있는 사업체는 물론, 지금까지 여러분이 그 사업을 토대로 모아 온 재산까지 모조리 몰수하도록 하겠소."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