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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30화 (29/1,567)

30화. 화산이 복덩이를 얻었구나. (5)

"흐음?"

저 멀리, 처마 위에서 장문인과 상인들을 보고 있던 청명이 재미있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미묘한 눈으로 장문인을 바라보던 청명은 피식 웃고 말았다.

모르겠다.

지금 장문인이 하고 있는 일이 저들을 진짜 지옥으로 밀어 넣기 위함인지, 그게 아니면 이런 상황에서마저 마지막 한 번의 온정을 베풀어 주기 위함인지.

어느 쪽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현 화산의 장문인인 현종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단순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겠지.'

보지 않았던가?

그 지하 비고의 문을 부여잡고 오열하던 장문인의 모습을.

속이 썩어 들어가도 겉으로는 화산의 장문인다운 모습을 유지했던 사람이다. 쓰러져 가는 문파를 그 등에 짊어지고 버티면서도 온화함과 기품을 잃지 않았다.

청명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장문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여서는 안 되지.'

인내심은 충분히 증명했다. 하지만 장문인이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은 인품과 인내심만이 아니다.

그런 것도 당연히 중요하겠지. 하지만 화산의……. 아니, 한 문파를 이끄는 장문인이라면 그것 외에도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냉정함.'

장문인이란 그런 자리다.

도인들이 살아가는 곳이라고 한들, 화산의 본질은 무파(武派).

본디 인성이 어떠하든 장문인으로서 문파를 이끄는 이는 반드시 냉정함을 갖춰야 한다. 화산의 영화를 위해서라면 이해득실에 철저히 몸을 맡길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과연 현종은 장문인으로서의 독심(毒心)을 갖추었을까?

처마에 엎드려 턱을 괸 청명이 살짝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우드드드득!

그러자 등에서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난다.

"아으윽……."

앓는 소리를 낸 청명이 허리를 부여잡고 다시 처마에 납작 엎드렸다.

'아이고 죽겠다.'

몸이 제대로 축나서인지 전신에 멀쩡한 곳이 한 군데도 없다. 꾸준히 운기를 하고 정양을 하고 있음에도 축난 선천지기가 되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머리로는 한 석 달이면 본래의 상태를 되찾을 수 있겠다는 계산이 끝났지만, 그 석 달을 버티는 게 문제였다. 안 그래도 약해 빠진 어린놈의 몸으로 들어와 답답해 죽을 지경인데, 이제는 그 약한 몸조차 제대로 활용할 수가 없잖은가?

"끄응……. 뭔가 대책을 세워야겠어."

청명이 한숨을 푹푹 내쉬고는 고개를 슬쩍 들었다.

일단 그의 몸은 나중 문제다. 저 상황이 어떻게 끝나는지 지켜봐야 한다.

"변제 기일을 늦춰 달라고 하셨습니까?"

공문연이 자신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뭔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그는 결코 화산의 저력을 얕보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문파들이 생겨나고 사라진다. 그 복마전 속에서 수백 년을 이어 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이야 화산의 처지가 예전만 못하다지만, 긴 역사를 이어 온 문파엔 그만한 저력이 있기 마련이다.

한데…….

'그 저력이라는 게 겨우 이거란 말인가?'

헛웃음이 나온다.

'내가 화산을 너무 과대평가한 건가?'

생각해 보면 저들에게 저력이 남아 있었다면 이 상황까지는 몰리지 않았을 것이다. 공문연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장문인. 더는 변제일을 늦춰 드릴 수 없다고 일전에 분명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해하지 마시오. 본도는 지금 공 루주에게 부탁드리고 있는 게 아니오."

"……예?"

현종이 가만히 공문연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화음 상계의 입장은 충분히 알았소이다. 그렇기에 본도는 지금 여러분들 모두에게 직접 부탁을 드리고 있는 것이외다. 십만 냥이라고 한들 각자 받아야 할 액수는 따로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그러니 개인적으로 변제 기일을 늦춰 주실 수 있는 분이 있는지를 여쭙는 것입니다."

공문연이 눈을 찌푸렸다.

'얕은 수를.'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변제 기일을 늦추지 못하겠다 하는 이들에게는 돈을 갚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예?"

공문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화산이 예전만은 못하다 하더라도 화산에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분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십만 냥을 모두 마련하지는 못했지만, 일부는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도와주신다면 화산은 그 이름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오늘 화산의 사정을 봐주시는 분들께는 반드시 화산의 이름으로 보답을 할 것입니다."

장문인이 다시 한번 포권을 했다. 자세는 낮았지만 당당함이 느껴진다.

그 모습을 보며 공문연이 자신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러니까."

그 순간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유종산이 공문연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졸지에 말이 끊긴 공문연으로서는 눈살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변제일을 늦춰 주면 후사하겠다는 겁니까?"

"그렇소이다."

"장문인. 솔직히 까놓고 말합시다."

유종산이 씁쓸한 얼굴로 말을 잇는다.

"화산이 당장 내일 망할지도 모른다는 건 우리도 알고 장문인도 아는 일 아닙니까. 그런데 장문인의 말만 믿고 변제일을 미뤄 달라는 건 그 돈을 받지 못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라는 말 아닙니까?"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공문연이 안색을 다시 정비했다. 유종산이 그의 말을 끊어 버린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이 체면 때문에 할 수 없는 말을 대신 해 주고 있었다. 그럼 차라리 유종산이 나서는 게 낫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유종산을 달래 상황을 진정시켰겠지만, 이번만큼은 공문연도 침묵을 지켰다. 지금은 장문인을 조금 더 몰아붙일 필요가 있다.

'이제 다 끝났다.'

이 자리에서 화산은 그 긴 역사의 종언을 고할 것이다.

무파인 화산이 타문파의 무력이 아닌 돈의 힘에 의해 무너진다는 것은 지켜보는 이들의 입맛을 씁쓸하게 만드는 일이겠지만, 그렇기에 더욱 의미가 있는 일이기도 하다.

"유 점주님."

"예. 장문인."

"본도가 내어 드릴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예?"

현종이 어깨를 폈다.

어디선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을 맞으며 현종이 빙그레 웃는다.

"화산에는 남은 것이 없습니다. 이제 화산에 남아 있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화음과 섬서를 지탱해 왔다는 명예뿐입니다. 제가 걸 수 있는 것 역시 화산의 이름뿐입니다."

"거……."

"무엇을 보고 믿어야 하느냐 물으신다면 대답은 이것뿐입니다. 화산의 이름. 화산의 역사. 그것만으로는 어렵겠습니까?"

유종산은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어 버렸다.

화산의 이름.

화산의 역사.

그래. 어쩌면 의미가 있는 말인지도 모른다. 이곳에 모인 이들이 상인이 아니라면 말이다.

상인에게 이름이나 역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상인들에게 있어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오로지 금전뿐이다. 돈이 되는가, 돈이 되지 않는가. 그 하나에 모든 것을 건 이들이 바로 상인이다.

그런데 상인들에게 이름값과 역사를 담보로 잡아 달라?

"허허."

유종산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장문인, 억지가 너무 심하시지 않습니까."

"억지라고 하셨습니까?"

현종이 가만히 유종산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의 무거움에 유종산은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억지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 무거운 눈빛과는 다르게 현종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부드럽기만 했다.

"하지만 억지를 부려 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화산이, 수백 년간 섬서와 화음을 지켜 온 화산이 세상에 남긴 이름이 헛되지 않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

"거꾸로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에게 화산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정말 화산의 이름에, 화산의 역사에 그만한 가치도 존재하지 않습니까?"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화산.

누가 감히 그 이름을 가볍다 할 것인가? 그리고 누가 감히 그 역사를 헛되다 할 것인가?

이제는 흔적만이 남아 바래 버린 이름이지만 누구도 감히 화산의 이름을 가벼이 여길 수 없다. 더구나 화음에 뿌리를 묻고 살아온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기에 누구도 선뜻 대화를 이어 가지 못했다.

단 한 사람을 빼고는 말이다.

"이야기가 좀 샌 것 같은데."

공문연이 분위기를 환기하고 나섰다. 현종의 시선이 공문연에게로 향한다. 조금 허허로운 현종의 눈빛과는 다르게 공문연의 눈빛은 전에 없이 날카로웠다.

"정리하자면 개인적으로 변제 기일을 미룰 사람은 미뤄 주고, 그러지 않을 사람은 오늘 이 자리에서 돈을 받아 가라 이 말씀이시군요."

"그리 되는구려."

"좋습니다."

공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라면 화음 상인 연합의 이름으로 반대해야 할 일이지만, 저도 도의를 아는 사람이니 허가하겠습니다. 원하시는 분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변제를 미루셔도 됩니다. 하나!"

공문연이 날카로운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에 따른 책임은 본인이 지셔야 합니다. 변제일을 미루신 분들은 상인 연합에서 따로 보호를 해 드리지 않습니다. 설사 돈을 떼인다고 하더라도 말이지요."

은근한 압박이었다.

"선택하시면 됩니다. 변제일을 지키실 분은 이곳에. 그리고 변제일을 늦춰 주겠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저쪽으로 가십시오."

공문연의 손이 옆쪽을 가리켰다.

"이걸로 됐습니까? 장문인?"

"그렇습니다."

현종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장문인의 의견을 마지막까지 존중해 드리겠습니다. 이제는 사라질 화산이라고는 하나 화산의 장문인이란 존중받아야 할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현종은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맙소."

공문연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슬쩍 도발을 해 보았음에도 현종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다.

'그 태도를 무너뜨려 주지.'

잠시 뜸을 들인 공문연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어떻습니까? 안타깝게도 변제일을 늦춰 줄 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만?"

"……."

"보십시오."

공문연이 뒤를 가리켰다. 현종의 시선이 공문연을 따라 상인들에게로 향한다. 현종과 시선이 마주친 이들은 다들 슬쩍슬쩍 눈을 돌려 시선을 피했다.

"시간이 더 필요하십니까?"

현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아 버렸을 뿐이다.

"아무리 기다린다고 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바래 버린 화산의 이름 때문에 거금을 포기할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러니 이제 그만하십시다, 장문인. 전각을 내어 놓고 물러나십시오. 장문인은 충분히 할 만큼 하셨습니다."

승리감에 도취된 공문연이 자신도 모르게 양팔을 벌렸다.

"자, 이제 이걸로……."

"쯧."

그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터덜거리는 발소리가 들린다. 공문연이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유 점주?"

유종산이 뭐라도 씹은 것 같은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 옆쪽으로 옮겨 가고 있었다.

변제일을 늦출 이들이 가기로 한 자리로 말이다.

"대체 뭔……."

공문연의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보며 유종산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보시오. 유 점주.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요?"

공문연의 노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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