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화산이 복덩이를 얻었구나. (4)
"거참, 산세 하고는."
유종산이 절로 앓는 소리를 내었다.
화산의 산세는 화음에 사는 사람들마저도 억 소리를 낼 만큼 험했다.
그나마 산행을 도와주는 호위들이 있기에 산을 오를 수 있는 거지, 평범한 이라면 감히 화산의 정상에 오를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그 험한 산을 일주일도 되지 않아 다시 올라야 한단 사실이 유종산의 몸과 마음을 둘 다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끄으으응."
"유 점주님. 힘내십시오."
"힘은 이미 내고 있어!"
유종산의 목소리에 짜증이 어렸다. 호위들이 그를 밀어 주고 있지만 이 가파른 길을 오르는 게 쉽지가 않다.
도무지 사람이 지나갈 수 없는 경사의 절벽을, 낡아 빠진 외줄에 의지하여 올라야 한다. 이러니 화산이 발전하려야 발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돈만 받으면 다시는 이 험한 곳에 오를 일은 없을 거다.'
이제 화산은 꼴도 보기 싫으니까.
겨우겨우 절벽을 오르자 조금 평탄한 곳이 나왔다. 태화루주 공문연이 슬쩍 뒤를 돌아보더니 모두가 올랐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여기서 잠시 쉬어 가도록 합시다."
"아이고. 공 루주님. 잘 생각하셨습니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유 점주는 운동 좀 하셔야겠습니다."
"허허허. 저도 어디서 체력이 부족하다 소리는 듣지 않는 사람인데, 이놈의 산은 아무리 올라도 익숙해지질 않습니다그려."
"그러니 오악 아니겠소."
유 점주가 고개를 휘휘 젓고는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그런데 공 루주님."
슬슬 눈치를 살피던 화산다루의 루주 방염이 공문연에게 다가간다.
"왜 그러시오?"
"장문인이 왜 갑자기 화산으로 오라고 하는 걸까요?"
다리를 주무르던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공문연에게 꽂혔다.
"혹여 돈을 마련한 것 아닐까요?"
공문연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십만 냥은 그리 작은 돈이 아니외다."
공문연이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빌리기라도 한 거라면……."
"망해 가는 화산에 십만 냥을 빌려줄 이는 천하에 없소. 그런 마음 좋은 사람이라면 그리 부자가 되지도 못했을 거요."
"확실히……."
유종산이 어깨를 으쓱한다.
"그럼 공 루주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장문인이 왜 우리를 부른 것 같으십니까?"
"사정하려는 것 아니겠소?"
"사정이요?"
공문연이 고개를 돌려 화산의 정상을 바라본다. 저 위에 화산파가 있다.
"돈이 나올 구석은 없고, 변제일이 되어서 돈이 없다고 사정해 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을 테니, 미리 불러서 다른 수를 강구해 보려는 생각이 아니겠소이까."
"허어."
유종산이 혀를 찼다.
"그럼 갚을 돈도 없는 사람이 이리 오라 가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허어. 살다 살다 이리 뻣뻣한 빚쟁이는 처음 봅니다그려."
"재물 때문에 곤혹을 겪고 있다고는 하나. 애초에 대 화산의 장문인이외다. 너무 험한 말은 마십시오."
"공 루주님은 참 속도 좋으십니다. 돈을 빌려 가 몇십 년 동안 갚지도 않고 있는 사람을 아직도 그렇게 좋게 생각해 주고 싶으십니까?"
공문연이 머쓱하게 웃었다.
"예의는 지켜 주자 이 말이지요. 어차피 곧 화산이라는 이름이 세상에서 사라질 텐데, 마지막까지 비참하게 만드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습니까?"
"공 루주의 마음씀씀이를 천하가 다 알 것입니다."
"역시 인품이 다르시군요."
"별말씀을."
공문연이 포권 하여 예를 표했다.
유종산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꼴값하고 앉아 있네.'
어차피 건물을 압류하고 내쫓을 생각이면서, 예의는 뭔 놈의 예의란 말인가? 당하는 이들이 예의 차려 줘서 참 고맙다고 하겠다.
'그나저나…….'
유종산이 고개를 들어 정상을 바라보았다.
'돈을 떼일 일은 없겠지.'
저 전각들을 받아 온다고 과연 제값에 팔아먹을 수 있을까 늘 고민이었다. 공문연은 호언장담을 했지만, 돈이 걸린 일이라면 일단 걱정부터 해 보는 게 상인 아니던가?
하지만 이제 유종산은 걱정하지 않았다.
'종남에서 사람이 온 걸로 봐서 분명 관심이 있다는 말이렷다?'
과거 화산과 종남이 견원지간이었다는 사실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었다.
화산의 존재가 잊히고, 종남이 천하에 욱일승천하고 있는 지금에 와서야는 빛바랜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수백 년 동안 이어 온 그 원한이 쉽게 가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 종남을 이끄는 수뇌부는 과거 화산이 종남을 짓누르던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이 아닌가? 그 원한이 여전하다면, 저 화산의 건물들이 세상에 남아 그 역사를 증명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게 뻔했다.
'공 루주도 분명 종남에 전각을 팔아먹을 생각이겠지.'
유종산의 마음이 훈훈해졌다.
십만 냥.
그중 그가 받아야 할 돈이 무려 오천 냥에 달한다.
오천 냥이 얼마나 큰돈이던가. 은자 하나면 평범한 일가족이 한 달은 먹고살고도 남는다. 그런데 은자도 아니고 금자가 무려 오천 개다!
그 돈만 있으면 장사 같은 건 안 해도 된다. 적당히 쓰고 또 써도 대대손손 쓰고 남는 돈이다.
이제야 길고 길었던 줄다리기가 끝난다. 마침내 돈을 받아 낸다는 생각에, 유종산의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장문인이 어떤 얼굴일지 궁금하군.'
그 근엄한 얼굴이 일그러질 것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조금 씁쓸한 감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유종산은 슬그머니 솟아오르는 측은지심을 내리눌렀다. 돈 앞에서는 가족도 친구도 없는 법 아닌가?
"자, 이제 그만 올라갑시다."
"예."
다들 힘든 기색이 역력했지만, 조금 더 쉬어 가자고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돈에 눈이 먼 망자들이 다시 화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볼 때마다 여기는 영 이상하다는 말이지."
누군가가 너스레를 떨었다.
"거참 다 쓰러져 가는 건물일 뿐인데."
말투에 꺼림칙함이 담겨 있다.
다 쓰러져 가는 건물들과 담벼락. 그리고 문짝이 떨어져 나간 정문.
누가 봐도 망해 가는, 혹은 이미 망해 버린 문파의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이상하리만치 보는 이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다.
수백 년의 세월 간 섬서를 지켜온 화산이 가지는 무게감.
말은 하지 않지만, 모두가 같은 느낌을 공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외면한다.
그들은 지금 그 화산의 숨통을 끊으러 왔다. 오늘 그들이 장문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화산은 불과 칠 주야를 버티지 못할 것이다.
수백 년 간 화음을 수호해 온 화산의 명맥이 마침내 끊기는 것이다.
"크흠."
"으흐흐흠!"
그 일이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를 아는지. 다들 말없이 헛기침만을 해 댔다.
돈이라는 현실을 외면할 생각은 없지만, 화음 태생인 그들에게 있어서 화산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곳이다. 그런 곳의 숨통을 자신의 손으로 끊는 상황이 오니 주저할 수밖에 없다.
"들어가십시다."
유일하게 공문연만이 태연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다. 그가 앞장서서 들어가자 다들 머뭇거리다 이내 어색한 얼굴로 그의 뒤를 따랐다.
"오셨습니까?"
정문 안으로 들어가자 운암이 그들을 맞이한다.
"운암진인. 오랜만에 뵙습니다."
"저는 아직 진인이라 불리기에는 부족한 몸입니다. 운암이라 불러 주십시오."
"하면 도장이라 하겠소. 괜찮겠소이까?"
운암이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장문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음."
공문연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여유가 있어 보이는데?'
일전에 왔을 때, 운자 배들은 사색이 된 얼굴로 그들을 막아섰다. 그런데 지금 운암의 모습에서는 일전과 같은 다급함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장문인이 그들을 불렀고 이때쯤 도착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는 하나, 기본적인 불편함은 엿보이는 게 정상적이지 않은가?
공문연이 가만히 운암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모르지. 어쩌면 이게 화산의 본모습일지도.'
어쩌면 모든 것이 끝나 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놓아 버린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전처럼 돈에 연연하고 불편해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화산의 도인, 그 본연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일 수도 있다.
'잔걱정이 많아졌군.'
아마도 마침내 원한 모든 것이 이뤄지는 순간이 왔기 때문이리라. 평범한 이들은 목표에 도달한 순간 방심하기 마련이지만, 공문연은 이럴 때일수록 신경을 더욱 곤두세우는 사람이니까.
가만히 운암을 따라 걷자 장문인의 처소가 나왔다. 그리고 그 앞에는 이미 화산 장문인 현종이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문인을 뵙습니다."
공문연이 먼저 포권을 하자 그를 따르던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 가는 길이니, 예의만은 지켜 주자던 그의 말을 제대로 새긴 모양이다.
"어서들 오시오. 험한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화산 장문인 현종이 부드럽게 웃으며 모두를 향해 인사를 했다.
"다망하신 와중에 시간을 뺏게 되어 죄송합니다. 직접 내려가야 예의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지키지 못한 노도를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별말씀을. 저희가 바쁘다고는 하나 설마 장문인보다 바쁘겠습니까? 당연히 저희가 와야지요."
공문연 역시 미소로 현종의 말을 받았다.
"그보다 무슨 일로……?"
"하하. 그리 급할 것 있겠습니까? 산을 오르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차라도 한잔……."
"장문인."
공문연이 정중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허리를 잘랐다.
"차를 즐기고 담소를 나누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저희는 천한 상인입니다. 풍류보다는 일에 관련된 문제를 먼저 논하고 싶습니다."
"으음."
"상인이라는 놈들은 해결해야 할 문제를 껴안고는 밥을 먹어도 체하고, 차를 마셔도 사레가 들리는 족속들입니다. 장문인께서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오. 내가 내 생각만 했구려."
현종이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는 가만히 상인들을 바라보았다.
"시간 끌 것 없이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감사합니다."
공문연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들을 모신 것은, 다름 아니라 화산의 입장을 전달하기 위해서요."
"화산의 입장이라 하시면?"
현종이 살짝 공문연의 눈치를 보았다.
그 작은 동작에서 공문연은 다음에 나올 말이 무엇인지를 미리 알 수 있게 되었다.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 보았지만, 화산에 돈을 빌려줄 이를 찾지 못했소. 다시 말하자면 이제 무슨 수를 써도 변제 기일 내에 돈을 갚을 수가 없을 것 같소이다."
"으으음."
현종의 말에 공문연이 눈을 찌푸렸다.
"장문인. 저희는 시간을 충분히 드렸습니다. 저희도 벌어야 먹고사는 상인. 또 기일을 늦춰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오."
현종이 모두와 시선을 맞추고 입을 열었다.
"더는 늦출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소이다. 하지만 변제일에 십만 냥이라는 돈을 모두 갚는다는 건 화산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오. 그러니 부탁드리오."
현종이 몸을 숙이며 포권을 했다.
"그 모든 돈을 갚을 수는 없지만, 일부는 갚을 수가 있소. 그러니 이곳에 계신 분들 중에 개인적으로 변제 기일을 늦춰 주실 수 있는 분이 있다면 화산에 도움을 주시길 바랍니다."
장문인이 고개를 숙였다는 사실에 모두가 당황하여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였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