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종남에서 오셨습니까? (5)
'그 전에 일단 주변부터.'
천려일실을 만들면 안 되니까.
청명이 고개를 획획 돌렸다. 혹시나 문을 열었을 때 다른 기관 같은 게 작동하지 않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장문사형이라면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비동을 열었을 때, 신호가 가게 만들어 두었을 수도 있다. 워낙에 조심스러운 양반이니까.
'딱히 뭔가 보이는 건 없네.'
장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청명의 시선이 복도의 위쪽에 고정되었다.
어린아이 주먹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뚫려 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십여 장 간격으로 하나씩.
"쯧."
원래는 저곳에 야명주가 박혀 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두운 복도가 아니라 야명주가 빛을 발하는 밝은 복도였겠지.
그걸 돈이 부족할 때마다 하나하나 뽑아 판 것이다. 그럴 때마다 이 복도는 점점 더 어두워졌을 것이다.
들어올 때마다 더 어두침침해지는 복도를 보며 장문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복도가 어두워지는 만큼 화산의 미래 역시 그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끄으으응."
청명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안 보는 게 나을 뻔했다."
무겁다. 무거워.
알고는 있었지. 바보는 아니니까.
장문인이나 일대제자들이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속내를 아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건 아니다. 다들 지금쯤 화산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와 자신의 대에서 화산이 망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에 잠도 제대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압박을 평생 동안 받아 왔겠지.
'불공평하다니까.'
일을 저지른 건 그만이 아니다. 사실 그가 매화검존이라 불리며 화산의 명성을 드높인 건 사실이지만, 화산의 대소사는 그가 아니라 장문인과 장로들의 결정으로 돌아갔으니까.
일은 다 같이 저질렀는데, 그 뒤치다꺼리는 청명이 다 해야 한다니 이런 억울한 경우가 어디에 있는가?
청명이 혀를 차며 문으로 다가섰다.
불평이야 이 정도로 해 두시고, 일단 문을 열어 보실까?
"그런데…… 이거 어떻게 여는 거지?"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문에 손잡이가 없다. 가운데 길게 갈라진 선이 문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할 뿐이지, 그 선만 없다면 그냥 벽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 선들은 또 뭐야?"
중앙에 길게 갈라진 것은 문이 맞물린 흔적이다. 그렇다면 종횡으로 어지러이 그어진 이 선들은 뭐란 말인가? 마치 누가 벽에다 대고 검술 연습을 한 것 같은 모습이다.
"……문은 맞나?"
벽인지 문인지 알 수 없는 곳에 손을 댄 청명이 가만히 안쪽으로 기운을 흘려 넣었다. 하지만 이내 손을 떼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미친."
기운이 뻗어 나가지를 못한다. 평범한 바위라면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없다. 이 바위 바로 뒤에 무시무시한 게 있다.
'만년한철.'
그것도 두께가 최소한 한 뼘은 된다.
"……돈이 썩어 나나."
그 비싼 만년한철로 창고를 만들고 그 위를 바위로 둘러싼 게 틀림없다.
"이러니 장문인이 열어 볼 엄두도 못 냈지."
만년한철이 무엇이던가.
검으로 제련하면 천하의 보검을 만들어 낼 수 있고, 갑옷을 만들면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는 절세의 보갑을 만들 수 있는 천하제일의 금속이다.
거기에 같은 무게라면 황금보다 더 비싼 보물덩어리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만년한철로 비동을 만들다니.
"허허허."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장문인이 멍청해 보일 수도 있다. 이 비싼 금속을 이대로 내버려 두고 있었다니.
하지만 청명은 장문인이 왜 이 비동을 건드리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만년한철은 말 그대로 천하에서 가장 단단한 금속이었다. 이걸 잘라 내는 건 지금의 청명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두께가 한 뼘이나 되는 만년한철이라면 과거 매화검존이던 청명이 나서야 겨우겨우 잘라 낼 수 있다. 그러니 이 비동을 잘라 내려 한다면 천하제일급의 고수를 불러들여야 한다.
그런데 그런 이가 과연 이 보물을 보고 그대로 물러날까?
'절대 그럴 리가 없지.'
이가 빠진 화산이 보물을 가지고 있다면 그 자체로 죽을죄가 된다. 힘이 있는 이는 약자가 보물을 정당하게 팔아넘기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물을 챙기려 들 것이다.
어설프게 외부인을 끌어들였다가는 화산이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었다.
'장문인의 선택은 나쁘지 않았어. 당장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수를 불러들이는 건 늑대를 피하기 위해 범을 불러들이는 격이지.'
안에 무엇이 들었는가도 중요하지만, 만년한철은 그 자체로 보물이다. 이만한 양의 만년한철이라면 천금에 맞먹는다.
"문제는 나도 이걸 못 자른다는 건데……."
청명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예전의 그였다면 이따위 만년한철이야 맨손으로도 잘라 버릴 수 있다. 그는 누가 뭐라고 해도 매화검존! 검의 극에 달한…….
"됐고!"
의미도 없는 과거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청명은 안력을 돋워 벽에 새겨져 있는 난잡한 무늬들을 주시했다. 이게 문이고 장문사형이 이 안에 드나들었다면 반드시 여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장문사형의 무공 수위는 그보다 높지 않았다. 그러니 방법만 알아낸다면…….
"어? 이거?"
이십사수매화검법?
벽에 새겨진 무늬, 아니! 검로!
그 검로 중 일부가 이십사수매화검법과 닮아 있다. 그리고 실마리가 풀리자 다른 무늬들의 정체도 알아챌 수 있었다.
"이건 죽엽수. 이건 매화검결. 그리고 이건 육합권이군."
얕은 무늬부터 짙은 무늬까지.
화산의 제자가 아니라면 익힐 수 없는 무학의 투로들이 한곳에 새겨져 있다.
'이러니 장문인이 열 수가 없지.'
매화검결과 이십사수매화검법은 당금의 화산에는 전해져 내려오지 않으니까. 무학을 아는 이가 투로를 따라갈 수는 있지만, 투로만을 보고 무학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이 깊이는……."
청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하강기로군."
자하강기를 기반으로 육합권과 죽엽수, 그리고 이십사수매화검법으로 이은 뒤 매화검결을 펼쳐 낸다.
그게 이 문을 여는 방법이었다.
정확하게 투로를 따라 검을 펼치면 자체적으로 문이 열리게 만들어진 모양이다. 도대체 무슨 수로 이런 기관을 만들어 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실마리는 풀었다.
남은 문제는 단 하나다.
"……이걸 무슨 수로 펼치라고?"
과거의 청명이면 문제없겠지. 아니, 청명이 아닌 장로들도 별 무리 없이 문을 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청명은 이십사수매화검법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애송이에 불과했다.
검의 형식은 따라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검결에 내공을 담고 단숨에 펼쳐 내는 건 지금의 그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후우."
청명이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안 되면 되게 하라. 세상에 방법이 없는 일은 없다. 다만 어려울 뿐이다.
청명이 이를 갈고 단전에 손을 모았다.
"……진짜 하고 싶지 않은데."
생사대적을 앞에 두었다면 모를까. 이런 일로 무리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밖에 없었다.
"한 한 달 정도는 요양한다고 생각하고."
청명이 이를 빠득빠득 간다. 그리고는 내력을 운용해 단전 속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선천진기를 톡톡 건드렸다.
선천진기.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 품고 있는 힘.
내력과는 다른 힘이다.
내력을 모두 잃는다고 해도 사람은 죽지 않는다. 그저 큰 무력감이 시달릴 뿐, 살아가는 데는 지장이 없다. 애초에 내력이란 인간이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천진기는 다르다.
선천진기를 잃은 인간은 더 이상 생명을 유지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선천진기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다.
무학의 경지에 오른 이들은 선천진기를 내력처럼 끌어 쓸 수 있다. 하지만 선천진기는 생명을 유지하는 힘. 끌어 쓴다면 반드시 그 대가를 각오해야 한다.
과하게 소모한다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적절히 소모한다고 해도 원기가 크게 상해 몇 달간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
'진짜 조금만 쓸 거야. 진짜 조금만.'
화산을 살리겠다고 청명이 죽어서야 의미가 없지 않은가. 지금 청명은 어쩌면 화산 전체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었다.
톡톡.
아주 조심스레 선천진기를 자극한다. 너무 많이 나와도 안 된다. 딱 쓸 만큼만! 정말 딱 쓸 만큼만!
자극을 받은 선천진기가 격동하기 시작했다. 들고 일어난 선천진기가 단전으로 밀고 들어온다.
'생각보다 조금 많은데.'
청명이 잡념을 날려 버리고 검을 움켜잡았다.
가능할까?
가능해야 한다!
선천지기와 내력을 뒤섞어 웅대한 힘을 만들어 내고 자하강기의 운용법을 따라 내력을 전신으로 돌린다. 익숙하지 않은 경로로 흐르기 시작한 내력이 전신을 뒤흔들었다.
"끅!"
비명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다.
끔찍한 격통이 이어졌지만 청명은 오히려 눈을 빛냈다.
'딱 한 번이다! 한 번에 해내야만 해.'
그의 손끝에 자줏빛 검기가 어린다.
정상적으로 무학을 익힌 게 아니다. 머리가 기억하고 있는 무공과 투로를, 익숙하지 못한 몸으로 어설프게 재현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 두 번은 없다.
청명의 손이 빛살처럼 허공을 누빈다.
자줏빛의 궤적이 벽을 파고들었다.
그그그극! 그그그극!
벽을 긁어 대는 소리가 고요한 동혈을 울린다. 단숨에 펼쳐 내야 하는 무결이지만, 육체와 내력의 한계 덕분에 더디기 그지없다.
"흐으…… 윽!"
단전이 찢어질 듯 아파 온다.
하지만 청명은 멈추지 않고 손을 휘둘렀다. 무리한 동작이 이어짐에 따라 근육이 끊어질 듯 아파 오고, 얼굴은 터져 나갈 듯 달아올랐다.
'내가 매화검존이다!'
능력이 안 되면 오기로라도 채운다.
날아가려는 의식을 혀를 깨물어 가며 부여잡은 끝에 청명이 마침내 모든 투로를 풀어내었다.
우뚝.
그의 손이 허공에 멈춘다.
'됐나?'
다리가 후들거리고 가슴이 터질 듯 숨이 가빴지만, 지금은 몸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다. 이러고도 열리지 않으면 진짜 패망이다.
그때였다.
끼리리릭!
기이한 쇳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거대한 문이 반 치쯤 앞으로 살짝 움직인다.
"아!"
열렸다!
기관이 움직여 문이 저절로 열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잠금장치 정도만 풀린 모양이다.
하지만 그거라도 어딘가. 이제 저 안으로…….
"우웨에에에에엑!"
돌연 청명이 배를 움켜잡으며 몸을 구부렸다.
입에서 선지 같은 피가 줄줄 흘러나온다. 도로 삼킬 수도 없는 기세로 피가 목을 타고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쯔읏."
청명이 소매로 입가를 문질러 닦았다.
아무래도 생각 이상의 선천지기를 끌어 쓴 덕에 몸이 크게 상해 버린 모양이다.
이 정도라면 적어도 두 달 동안은 내상을 입은 채 정양에 들어야 한다.
"하……. 화산파 살리기 더럽게 힘드네."
입 안의 피를 마저 뱉어 낸 청명이 혀를 차며 비동의 문을 힘껏 밀었다.
끼이이이익!
오랜 세월 닫혀 있던 비동의 문이 좌우로 활짝 열렸다.
"자, 장문사형이 뭘 꼭꼭 감춰 뒀는지 확인해 볼까?"
청명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비동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