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24화 (23/1,567)

24화. 종남에서 오셨습니까? (4)

"끄으으으응."

청명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이고 죽겠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작은 동산이라고는 해도 산은 산이었다. 산을 뒤지고 다니는 게 쉬울 리가 없다.

더구나 사숙이나, 사숙조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어두운 밤을 틈타 다니다 보니 도둑질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빌어먹을 몸뚱어리.'

이 몸은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는다. 과거의 청명이라면 사흘 밤낮 경공을 전개해도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약해 빠진 몸뚱이는 조금만 움직여도 헉헉대기 일쑤였다.

화음에 내려가 유종산을 심문할 때도 그랬다. 그 목소리 큰 칼쟁이를 상대하는 것보다 산을 내려갔다 올라오는 일이 열 배는 더 힘들었으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더구나 지금 청명이 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후우우우우."

바닥에 손을 댄 청명이 깊게 숨을 들이켜고는 땅속으로 기운을 밀어 넣었다.

아닌 밤중에 뭔 짓거리냐고?

"그러게, 젠장."

창고는 이 아래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아래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는 점이다.

방법은 한 가지. 일일이 확인하는 것뿐이다.

덕분에 지금 청명은 산을 기어 다니며 지점 지점마다 기운을 밀어 넣으며 빈 공간을 찾는 중이었다. 산 아래 빈 공간이 있다면 그곳이 반드시 창고일 테니까.

말은 쉽다.

말은 쉬운데…….

"이게 사막에서 바늘 찾기지."

청명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과거의 그였다면 이만한 작은 산쯤이야 손 하나만 까딱해도 기운으로 뒤덮어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기껏해야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기운을 길게 내어 쏘는 게 한계였다.

"아이고오! 죽겠다아!"

게다가 그만한 기운을 계속해서 쏘아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밤톨을 형님이라 불러야 할 그의 내단은 몇 번 쓰지 않았음에도 금세 바닥을 드러내었다. 그럴 때마다 다시 운기를 해서 기운을 모으고 쏘아 내기를 열댓 번째 반복 중이다.

'이러다가 없으면 그냥 뻘짓만 하는 거 아냐?'

몸이 피곤하니 잡생각이 끊이지를 않는다. 청명은 머리로 파고드는 잡념을 날려 버렸다.

아서라.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

"반드시 있다!"

장문사형의 성격과 모든 것을 감안하면 장부는 반드시 안전한 곳에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안전할 만한 곳은 이곳밖에는 없다.

지푸라기도 잡아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이만한 희망이라면 지푸라기보다는 물에 뜬 통나무에 가깝다. 잡지 않을 도리가 있는가!

한 번 더!

"아이고!"

한 번 더!

"나 죽네!"

한 번 더!

"뭐가 비었는데.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아이고."

한 번…….

아니. 잠깐만.

"뭐가 비어?"

청명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확인을 위해 기운을 쥐어짜고 한 번 더 쏘아 낸다.

'있다!'

이질적인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 아래 뭔가 비어 있는 공간이 있다. 아직은 내력이 약하여 저 공간이 누군가 만들어 낸 것인지, 아니면 자연히 빈 공간이 생긴 것인지는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무언가 비어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퉤!"

청명이 바닥에 침을 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옆에 둔 곡괭이를 움켜잡았다.

"눈으로 확인해야지!"

이제는 근성 싸움이다.

"끄으으응!"

한 삽.

"끄으으으으응!"

두 삽.

"끄아아아아아아!"

세 삽.

철푸덕.

청명은 그만 구덩이에 그대로 쓰러졌다. 입 안으로 흙이 마구 밀려들어 왔지만, 이제는 이걸 뱉어 낼 힘도 없다.

"죽는다, 죽어."

빌어먹을 몸뚱어리.

겨우 오 장을 파는 것만으로도 팔이 달달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허리는 칼이라도 한 방 맞은 것처럼 끊어질 듯 아파 왔다.

무학을 익히는 이란 무릇 고통에 익숙한 법.

하지만 고된 훈련과 상처로 인한 고통과, 노동으로 인한 고통은 그 궤를 달리한다. 안타깝게도 청명은 노동의 고통에는 그리 익숙지 못했다.

설사 노동의 고통에 익숙하다 하더라도 이건 어린아이의 몸으로 할 만한 일이 아니다.

멀쩡한 땅을 파는 일은 건장한 성인 남성도 힘들 만한 일이다. 게다가 이건 요령도 통하지 않는다. 순수하게 근력과 근성으로 해내야 하는 일이다.

"퉤!"

입 안에 들어온 흙을 뱉은 청명이 눈을 부라렸다.

"오냐.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한다면 매화검존이라는 이름이 울지 않겠는가!

"으라차!"

청명은 다시 힘차게 곡괭이질을 시작했다.

저 아래 공간이 있다면 반드시 거기에 도착하고 만다!

푸욱! 푸욱! 푸욱!

"으라차차차차차!"

푸욱! 푸욱! 탁!

"어?"

탁?

청명이 재빠르게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양손으로 흙을 벗겨 내기 시작했다. 몇 차례 흙을 파내자 손끝에 딱딱한 무언가가 만져진다.

'벽돌?'

청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손끝에 닿는 느낌이 이상하다. 중간중간 갈라진 곳이 느껴진다. 벽돌이다.

이런 산 아래에 벽돌로 쌓아 올린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좋은 징조일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인공적인 공간을 만들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청명의 생각은 달랐다.

이곳이 화산의 비동(秘洞)이라면 어설프게 벽돌 따위로 방비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 침입할 것을 대비하여 조금 더 단단하게 주변을 지켜 두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벽돌이라…….

'일단은 마저 파 보자.'

청명은 실망스러운 마음을 억눌렀다.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일단은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다.

사사사삭.

흙을 마저 걷어 내자 선명한 벽돌의 무늬가 드러났다. 아직 무공의 경지가 낮은 데다 그믐이라, 선명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이 아래에 뭔가가 있다는 건 확실해졌다.

'어디 보자.'

청명이 조심스레 벽돌 중 하나를 움켜잡았다.

꽤나 세월이 흘렀는지 벽돌끼리 단단히 맞물려 있다. 힘을 주어 벽돌을 잡아당긴다. 그러면서도 혹시 무너지지 않게 조심조심.

스르릉.

벽돌 하나가 위로 딸려 올라온다.

'옳지!'

조심스레 벽돌을 빼낸 청명이 아래로 드러난 구멍으로 얼굴을 밀어 넣었다.

'자, 여기…….'

안력을 돋워 아래를 확인한 청명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이럴 리가……. 아! 복도?'

주먹이 절로 쥐어진다.

잘못 찾은 게 아니다. 제대로 찾았지만, 조금 옆으로 온 것뿐이었다. 그가 찾은 곳은 비동이 아니라 비동으로 통하는 길이다. 아직 능력이 부족하여 길과 비동을 정확하게 구분해서 탐지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복도를 찾았다는 것은 비동으로 가는 길을 찾아내었다는 것!

'좋아!'

청명이 고개를 들고 벽돌을 마저 들어내려는 순간…….

저벅.

안쪽에서 낮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흡!'

청명은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누군가가 복도를 통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장문인?'

들이밀었던 고개를 뒤로 젖히고 빼낸 벽돌을 서둘러 덮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아차!'

벽돌을 빼내며 생긴 틈으로 빛이 새어 들어가고 있었다. 청명은 급한 대로 벽돌 위를 자신의 몸으로 덮고 호흡을 낮춰 귀식대법을 펼쳤다.

'왜 하필이면 지금!'

까딱하면 들킬지도 모른다. 산을 뒤지며 땅을 파고 이곳까지 도달한 그를 장문인이 발견한다면 무슨 말을 하겠는가?

절대 들키면 안 된다.

저벅. 저벅.

어두운 복도를 걷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그리 빠르지 않은 걸음이었다.

'장문인이 맞네.'

어둠 속에 드러난 모습만으로도 장문인이라는 걸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장문인은 다행히 이상을 느끼지 못했는지 청명이 내려다보고 있는 곳을 지나쳐 갔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새는 없었다. 장문인이 이내 걸음을 멈췄기 때문이다.

'저기에 벽이……?'

완전한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면서 안쪽의 모습이 좀 더 확연하게 보인다. 장문인이 걸음을 멈춘 곳 앞에 커다란 벽이 보인다.

아니. 벽이 아니다.

자칫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저긴 벽일 수가 없다. 길게 이어진 복도의 끝은 벽이 아니라 문이라고 부르는 법이니까. 장문인이 가만히 서서 문을 바라본다.

'알고 있었구나.'

그럴 수도 있을 거라 예상했다.

다른 이들이야 청명도 몰랐던 비동의 존재를 알 방법이 없었겠지만, 장문인만은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장문사형이 만일을 대비해 후대의 장문이 될 이에게 전했을 수도 있고, 처소를 쓰면서 우연히 발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상한 건 비동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어째서 화산이 이런 상태가 되었냐는 것이다.

비동에는 분명 장문사형이 만들어 둔 장부와 소장해 둔 보물들이 있었을 텐데?

그때였다.

장문인이 가만히 손을 들어 벽, 아니 문을 더듬는다. 마치 소중한 무언가를 만지는 듯 한참 동안이나.

'뭘 하는 거지?'

딱히 의미를 찾아낼 수 없는 동작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모습에 딴지를 걸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은 장문인에게서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문을 더듬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무언가를 하려는 게 아니다.

저건 하지 못하는 이의 모습이다.

청명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작다.

그리고 초라하다.

대 화산 장문인의 등은 언제나 넓고 따뜻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그의 등은 세월에 찌든 촌로의 그것처럼 굽어져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었던 등. 아무도 없는 이곳이기에 저런 등을 보일 수 있는 거겠지.

벽에 기댄 장문인의 등이 조금씩 떨리는 게 느껴진다.

'아…….'

알 것 같았다.

'열 수가 없었던 거구나.'

청명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저 등이 아프다. 너무도 시리고 아프다.

무너져 가는 화산파.

무학은 쇠퇴하고 재물은 떨어져 간다. 빚을 독촉하는 이들은 점점 험악해져 가고, 적의 칼날은 점점 더 날카로워져만 간다.

그런 상황에서 홀로 화산을 이끄는 것이 얼마나 절망적인 일이겠는가?

자신이 평생을 바쳐 온 화산이 무너져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장문인의 심정은 또 얼마나 참담하겠는가?

그럼에도 누구에게도 마음을 터놓을 수 없다. 장문인이란 문하들에게 의지가 되어야 하는 존재다. 타인을 의지할 수 있는 이가 아니다.

모두가 무너져 가더라도 그만은 대지에 너른 뿌리를 뻗은 거목처럼 단단히 이곳을 떠받쳐야 한다.

그러니…….

그러니 이런 곳에서 홀로 그 고통과 슬픔을 달래는 것이다.

열리지 않는 비동의 문을 부여잡고.

청명은 가라앉은 눈으로 장문인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그 두 눈에 새기려는 듯이.

한참 동안 문을 부여잡고 움직이지 않던 장문인이 가만히 고개를 든다.

빤히 문을 바라보던 그는 그제야 낮은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복도를 되돌아 나갔다.

청명은 장문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는 벽돌을 들어내고 복도 아래로 뛰어내렸다.

"……쯧."

딱히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을 보고 말았다.

'내 잘못이 크다.'

그뿐 아니라 선인들의 잘못이 컸다. 강호의 미래도 중요하지만 화산의 미래 역시 중요한 것이었다. 당장 눈앞에 다가온 위기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겨질 아이들도 생각했어야 했다.

"아직은 안 늦었어."

잘못이 있다면 되잡으면 된다. 청명은 이제부터 저들의 잃어버린 세월을 되돌려 줄 것이다.

"자, 그럼……."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이 빌어먹을 문부터 열어 보실까."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