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종남에서 오셨습니까? (1)
화음현(??
縣).
오악(五岳)중 하나인 화산을 품고 있는 마을로서 섬서에서 가장 큰 마을 중 하나다.
과거 화산이 사해만방에 그 이름을 떨칠 때는 화음에도 활기가 넘쳐났다. 행상은 끝을 모르고 줄을 이어 화음에 방문했고, 화산을 구경하고자 하는 이들의 발걸음도 끊이지 않았다.
덕분에 화음에 사는 이들은 화산의 이름만으로도 먹고살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달이 차면 기우는 법.
화산이 그 명성을 잃어 가면서 화음현도 그 활기를 잃기 시작했다.
그나마 아직은 화음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주루가 바로 태화루였다. 그리고 그곳의 최상층에 지금 십여 명의 상인들이 모여 있었다.
"하하하핫."
커다란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다.
"장문인이 굉장히 당황한 것 같았습니다. 그 얼굴 보셨습니까?"
"당황할 만하지요. 어쨌거나 이쪽에서는 최후통첩을 날린 거니까요."
"해도 해도 너무한 일이 아닙니까! 그들이 가져간 금자만 해도 십만 냥입니다! 그 돈이면 웬만한 주루를 몇 개는 사고도 남습니다! 선대의 인연이 있어 도와주기는 했지만 사람이 양심이 있으면 벌써 갚았어야지요."
"암요. 당연합니다. 그게 사람의 도리지요."
태화루의 루주. 공문연(恭問連)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사뭇 사람 좋은 얼굴을 해 보였다.
"이(利)를 쫓는 상인이라고는 하나, 선대로부터 인연이 이어진 곳을 너무 타박한 것 같아 마음이 그리 편치는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 루주! 공 루주께서는 하실 만큼 하셨습니다. 애초에 저들이 변제일을 몇 번이나 어겼음에도 편의를 봐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정도면 누구도 공 루주를 탓하지 못할 겁니다. 되레 공 루주의 자비로움을 칭송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공 루주가 말을 아끼며 술잔을 기울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눈앞에 앉은 이들을 향해 조소했다.
'속 편하군.'
저리 간단히 생각하며 살 수 있다니 말이다.
'화산의 저력은 만만치 않다.'
화산의 진정한 힘은 무력에서 나오지 않는다. 화산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그들이 쌓아 온 역사다.
그만한 문파가 수백 년 동안 존속하다 보면 싫든 좋든 인연을 쌓는 이들이 생긴다. 적어도 섬서 내에서라면 화산과 인연이 없는 이들을 찾는 게 더 어렵다.
'있을 때는 모르는 법.'
화산의 존재감은 이제 티끌만도 못하니, 사라진다고 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화산이 사라졌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는 순간 '이유'를 찾으려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다. 그들에게 제대로 명분을 보여 주지 않는다면 화음현 따위는 순식간에 박살이 날 수도 있다.
화산과 인연을 이은 이들은 대부분 밭이나 가는 무지렁이가 아니라 신분과 지위가 있는 이들이니까.
'하지만 이정도면 괜찮겠지.'
먹어도 체하지 않을 정도로 느릿하게 뜸을 들였다.
이정도로 오래 삶았으면 젓가락만 대도 살이 찢어지는 오리처럼 야들야들해졌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공 루주님."
"예."
"굳이 그 화산의 전각을 빼앗아서 뭘 하실 생각이십니까?"
"음."
공 루주가 가볍게 웃었다.
"그 전각은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단순히 오래된 전각에 불과해 보이겠지만, 좋은 매물이지요."
"이해가 잘 안 갑니다만?"
멍청한 놈들.
살짝 표정이 바뀔 뻔했지만, 공 루주는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멈추는 데 성공했다.
"화산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힘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적당히 관광지로만 써도 많은 이들이 화산을 방문하려 들 겁니다."
"하나……."
화음에서 비단을 파는 유종산이 마뜩찮다는 얼굴을 했다.
"그 험한 화산에 사람이 들어봐야 얼마나 들겠습니까. 차라리 전각 같은 것보다는 다른 것을 받는 게?"
"마땅히 받을 것도 없지요."
"으음."
공 루주가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리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대놓고 말하기는 뭐하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전각이라도 높은 돈을 주고 살 곳은 분명 있으니까요."
"그런 곳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만큼 화산에 애정이 있는 곳이……."
"그 반대 아니겠소이까?"
"아……."
유종산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웃돈을 주고서라도 남은 전각을 사서라도 화산의 존재를 지워 버리고자 하는 문파.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곳만 해도 두어 곳은 된다.
"그러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돈은 제가 확실히 회수하겠습니다."
"크하하하. 걱정이라니요. 저희야 언제나 공 루주를 믿고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화음의 상인들이야 당연히 공 루주를 믿고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 루주, 즉 공문연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심은 전혀 달랐다.
'이런 것들과 거사를 도모할 수는 없지.'
화음은 죽어 가는 땅이다.
화산이 천하에 그 이름을 떨쳤을 때는 충분히 가치 있는 곳이었지만, 이제 화음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선대부터 화산을 쪽쪽 빨아먹은 덕분에 이제 화산은 껍데기만 남아 버렸다.
그리고 그것이 되레 화음의 목을 죄고 있었다.
애초에 화음이라는 곳은 요지도 아니고 사람이 많은 곳도 아니다. 그럼에도 화음이 유명해지고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곳에 화산이 있었다는 이유 하나뿐이었다.
화산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화음 역시 유지될 리가 없다.
'늦기 전에 정리하고 떠나야 한다.'
화산의 전각을 팔아 막대한 돈을 손에 쥘 수 있다면, 거상으로 거듭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일단 그러기 위해서는…….
"음?"
그 순간 공문연이 고개를 획 돌렸다.
"누구냐!"
그가 소리치기 무섭게 주루를 지키던 호위무사들이 주루 밖으로 뛰쳐나간다.
"누, 누가 있소이까?"
"여기에 누가?"
공문연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호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창을 열고 호위들이 돌아온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
공문연이 바로 대답을 하지 않자, 유종산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공 루주. 이곳은 태화루의 최상층이 아닙니까. 여기에 누가 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있었다면 저들이 찾아냈겠지요.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닐진대, 여기서 몸을 숨길 수야 있었겠습니까?"
공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이 날카로웠나?'
그럴 만도 하다. 그의 오랜 비원을 이루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제가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좀 더 즐기고 싶지만 오늘은 여기서 파하는 게 맞을 듯싶군요."
그의 말에 모두가 수긍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공문연은 그들에게 다소 피곤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한번 곤두선 신경은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조금 쉬어야 할 듯하다.
* * *
"어흐흐흠!"
유종산이 비틀거리며 거리를 걸었다.
"좋구나!"
술이 좀 과하게 들어간 모양이다. 조금 전부터 흥이 멎지 않는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어마어마한 돈이지.'
화산에서 받아 낼 돈은 굉장한 수준이다. 오래전부터 이자에 이자가 쌓여 처음 빌려준 돈 따위는 티끌에 불과할 정도로 불어났다.
그 돈만 회수할 수 있다면 평생 놀고먹는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공 루주는 신뢰할 수 없는 자지만, 돈에 얽힌 일만큼은 정확하다. 그가 뒤로 무슨 일을 꾸미든 말든 유종산은 돈만 받으면 그만 아닌가?
"달도 밝……. 뭐야? 달이 없어? 에이. 그믐이군."
유종산이 피식 웃고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으슥한 게, 강도당하기 딱 좋아 보인다. 이런 날은 이런 구석진 곳이 아니라 대로로 다녀야 하는 법인데, 술기운에 이런 곳으로 와 버렸다.
허허.
생각이 짧았다. 이런 순간 앞에서 칼 든 강도라도 나타난다면…….
"거기 잠깐."
"……."
유종산이 눈을 감았다 떴다.
어두운 골목 앞을 누군가 막고 있었다. 검은 야행복에 검은 복면까지. 그야말로…….
'그린 듯한 강도네.'
강도치고는 체구가 작아서 위압감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저 복장에서 명백한 의사가 느껴진다.
아니, 그런데 보통 저런 복장으로 강도짓을 하나? 강도라는 건 될 수 있으면 은밀하게 일을 처리해야 하는 법인데, 저건 누가 봐도
'나는 강도다!'
라고 외치는 복장이 아닌가?
유종산은 헛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이거 강도라도 되시는 건가?"
"돈 같은 건 관심 없다."
야행인이 앞으로 한 발 나섰다.
"묻는 말에 대답만 잘 해 주면 곱게 보내 주지."
"호오?"
유종산이 피식 웃었다.
"대답을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거 조금 곤란하게 됐습니다그려."
그의 말에 야행인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꽤나 딸린 식구가 많아서 말입니다. 혼자 돌아다니는 것도 마음대로는 되지 않거든요."
스으으읏.
작은 파공음과 함께 유종산의 주변에 몇몇의 무리가 나타났다. 검을 차고 있는 무사들. 아무래도 상단의 호위무사인 모양이었다.
"나야 대답을 해 주고 싶지만, 이들이 내가 대답하는 걸 그리 반기지 않을 것 같군요. 아쉽게도 말입니다."
야행인이 대답 없이 가만히 유종산을 바라보았다.
흥이 떨어진 유종산이 침음을 내며 입을 닫았다. 그 대신 호위들이 입을 연다.
"어찌합니까? 죽입니까?"
"흐음."
유종산이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굳이 야행복을 하고 내 앞을 막아섰다는 것은 아무나 잡아서 강도질을 하는 게 아니라, 내게 목적이 있어서 왔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럼 그 목적을 들어 보아야 도리겠지. 잡아 와라. 말은 할 수 있게 해서."
"예!"
호위무사들이 앞으로 달려들려던 순간이었다.
"잠깐."
야행인이 손을 들어 그들을 막는다.
"응?"
"될 수 있으면 사고를 치고 싶지 않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냥 묻는 말에만 대답하면 좋게좋게 끝낼 수 있다. 그러니까……."
"헛소리를 언제까지 듣고 있을 셈이냐? 끌고 와라!"
"예!"
호위무사들이 비호 같은 기세로 야행인을 포위했다.
'멍청한 놈.'
그 모습을 보며 유종산이 고개를 돌렸다. 본디 그는 폭력적인 광경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저들은 거금을 주고 계약한 이들이다. 본래 이런 일을 할 이들이 아니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호위들보다 손속이 과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보나마나 순식간에…….
콰앙!
그렇지.
콰아앙!
어이쿠야. 너무 심한데.
콰아앙!
유종산이 눈을 찌푸렸다. 이건 손속이 과해도 너무 과한 면이 있었다.
"말은 할 수 있게 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아? 그래?"
"그렇다. 내가 분……. 어?"
지금 누가 대답한 거지?
유종산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
그의 눈에 게거품을 물고 쓰러진 호위들의 모습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 호위들을 일격에 박살을 내 버렸을 것이 분명한 야행인이 고개를 꺾으며 그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은 말귀를 알아먹어야 사람인데. 이상하게 꼭 말귀를 못 알아 처먹더라고."
"……."
야행인이 손가락을 까딱한다.
"이리 와. 이리."
"……."
유종산이 홀린 듯이 야행인에게 다가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대답만 잘 해 주면 아무 일 없다. 이해했어?"
"예!"
대답은 칼같이 나왔다.
"자, 그럼 대."
"……예?"
뭘요?
"처음에 대답했으면 그냥 묻고만 갔을 건데, 싸우려고 했으니 맞아야지."
"예?"
"걱정하지 마. 말은 할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
유종산의 인생에 암흑이 펼쳐진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