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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20화 (19/1,567)

20화. 화산이 박살이 난 게 나 때문이라고? (5)

"시간이라니! 대체 얼마나 더 시간을 끌 생각이시오!"

"사람이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사정은 충분히 봐드렸소이다!"

현종의 얼굴에 수심이 잔뜩 드리워졌다.

"알고는 있습니다만……."

그때, 일행의 가장 뒤에 있던 사내가 조용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가 나서자 다른 이들이 일제히 입을 닫고 좌우로 물러났다.

'저놈이 대장인가?'

청명이 앞으로 나온 이를 보며 눈을 빛냈다.

전형적인 상인의 행색이다. 살짝 통통한 얼굴과 비싼 비단으로 치장한 의복.

'돈 많아 보이네.'

나선 이가 입을 열었다. 청명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장문인.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공 루주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공 루주라 불린 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런 일로 다시 장문인을 뵙게 되어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될 수 있으면 다시 화산을 오르지 않으려 했건만, 워낙 재촉하는 이들이 많아 어찌할 수 없었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송구할 따름입니다."

현종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공 루주가 지금까지와는 살짝 다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나 장문인. 다른 이들의 마음도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약조한 날짜가 이미 한참 지났습니다."

"으음."

공 루주가 살짝 어깨를 젖힌다. 청명의 눈에는 그 몸짓이 그렇게 거만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이미 저희는 여러 번 화산의 사정을 봐드렸습니다. 그럼에도 자꾸 이렇게 약속을 어기신다면 더는 봐드리기가 어렵습니다."

현종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겉으로는 평안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청명의 눈에는 현종의 얼굴이 미묘하게 꿈틀대는 것이 보였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화산의 장문인 신분으로 문파원들이 보는 앞에서 빚쟁이에게 시달리는 경험 같은 건 역대 장문인 중 누구도 겪어 보지 못했을 테니까.

"계약대로라면 지금 당장 계약을 어긴 대가를 받아 내야겠지만."

공 루주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저희 역시 화산의 은혜를 입으며 살아온 자들. 그리 각박하게 굴고 싶지는 않습니다."

"공 루주님!"

"저희는 이미 많이……."

"어허."

주변의 다른 상인들이 반발했지만, 공 루주가 입을 떼자 짠 듯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슬쩍 그의 눈치를 살핀다.

"은혜를 모른다면 짐승이나 다름없는 것이외다. 그대들이 베푼 은혜만을 생각하지 마시오. 화음(華陰)에 사는 이라면 누구나 화산의 은혜를 입고 자란 것 아니겠소? 선대의 일을 잊지 마시오."

"으음."

"그렇지요."

다들 이해했다고 생각했는지 공 루주가 활짝 웃으며 입을 연다.

"그래서 조금의 배려를 더 해 드리려고 합니다. 지금부터 칠 주야를 드리겠습니다. 칠 주야 동안 빌려 간 돈을 갚지 않으시면 처음의 계약대로 대가를 가져가겠습니다."

"고, 공 루주. 잠깐 기다려 주시……."

"장문인."

공 루주가 가만히 고개를 젓는다.

"더는 없습니다. 저는 금전을 움직이는 몸. 이것만으로도 최대한 편의를 봐드린 겁니다. 칠 주야 뒤에 돌아왔을 때도 대금이 준비되지 않는다면 약속대로 화산의 전각을 모조리 몰수하겠습니다."

"끅!"

난데없이 튀어나온 소리에 공 루주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야에 입을 틀어막고 있는 청명의 모습이 들어온다.

"아이 앞에서 못난 꼴을 보였군요."

공 루주가 가만히 손을 내밀어 포권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장문인. 다음에 다시 뵐 때는 서로 웃는 낯으로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럼."

공 루주가 몸을 돌리자 그를 따라왔던 상인들도 함께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돌려 현종을 쏘아보는 걸 잊지 않았다.

위풍당당한 기세로 산문을 빠져나가는 그들을 보며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들어 입을 연다.

"……허어."

조금은 허탈하고 조금은 힘 빠진.

그래서 더 무겁게 들리는 탄식이었다.

* * *

"그래서."

청명이 다리를 꼰 채, 턱을 괴고 있었다.

"화음현의 상인이라고?"

"그렇다니까."

"끄으으."

청명의 고개가 앞뒤로 덜컥거린다. 그 모습을 보며 도인명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저거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피해야지.'

그가 지금 청명의 앞에서 이런 일을 설명하고 있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굉장한 기세로 백매관으로 돌아온 놈이 상가의 자제들을 모조리 불러들이고는 화산의 상태를 아는 놈들을 선별해 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기준에 충족된 이가 바로 도인명이다.

덕분에 도인명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모조리 짜내서 화산의 상태를 청명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화음현이면 화산 아래 있는 마을 이름 아냐?"

함께 도인명의 말을 듣고 있던 조걸이 물어 왔다.

"그렇습니다, 사형. 예전에 제가 아버지와 함께 행상을 돌 때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럼 화산이 화음현의 상인들에게 돈을 빌렸다는 건가?"

"그것까지는 잘……."

도인명이 머리를 긁었다.

화산의 일이라고는 하나 삼대제자들이 그런 일을 속속들이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기껏해야 돌아가는 정황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 공 루주라는 사람은 화음현 태화루(太和樓)의 루주입니다. 화음에서 가장 큰 주루인데, 그곳을 바탕으로 여러 사업에 손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화음 제일의 거상이죠."

"으음."

"그러니 화산이 돈을 빌렸다면 그 사람에게 빌렸을 것 같은데……."

덜컥.

"응?"

조걸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이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청명의 목이 줄 끊어진 목각인형처럼 덜컥대고 있었다.

"사제! 정신 차려! 사제!"

"태, 태화루……."

"왜 그래?"

충격으로 넋이 나간 청명을 보며 조걸이 기겁을 했다.

물론 그들로서는 청명이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벌떡.

갑자기 생기가 돌아온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청명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도인명을 노려보았다.

"히익?"

그러고는 번개 같은 속도로 도인명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아까 그놈이 태화루의 루주라는 게 정말이냐?"

"그, 그렇다니까."

"태화루의 루주가 화산에 돈을 빌려주고 화산의 전각을 몰수하려 든다고?"

"지, 진정하게, 사제!"

"진정? 나보고 지금 진정하라고?"

야, 이놈들아!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냐?

청명이 도인명의 멱살을 잡은 손을 풀고는 머리를 마구 긁어 대고 쥐어뜯었다.

"사제 왜 그러는가?"

윤종의 물음에도 청명은 전혀 대답할 수 없었다. 이유야 간단하다.

설명할 수가 없으니까.

왜냐면!

'태화루는 화산 거라고! 미친!'

도인이라고 해서 풀만 뜯어 먹고 사는 것은 아니다. 중소 문파라면 향화객을 받으며 받는 금전으로 어느 정도 지속이 될지 모르나, 화산 같은 거대 문파는 그것만으로는 유지가 불가능하다.

애초에 검수니, 무사니 하는 놈들은 저 혼자 강해지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문파의 살림에는 동전 한 푼 보탬이 되지 않는 놈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식충이들을 단체로 먹여 살리려면 막대한 돈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화산은 화음현에 여러 사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사업장 중 하나가 태화루다.

그런데 그 태화루의 주인이 역으로 화산에 돈을 빌려주고, 그 빚으로 화산의 전각을 몰수한다고?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래…….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건 어디서부턴가 잘못되었다는 뜻이겠지!

"……조걸 사형."

"응?"

청명이 말없이 손짓을 한다. 조걸이 의아한 눈으로 청명을 향해 다가섰다. 청명이 조걸에게만 들리도록 뭔가 속삭이자 조걸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걸?"

"구할 수 있어?"

조걸이 살짝 더듬거린다.

"아, 아니. 구할 수 있기는 한데……."

"그럼 얼른 가져와."

"……진짜?"

"내가 지금 농담하는 걸로 보이나? 사형?"

"가, 가져올게."

조걸이 살짝 긴장한 얼굴로 방을 빠져나간다.

'뭘 하려는 거지?'

윤종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조걸의 반응이 심상치가 않다.

하지만 그리 깊이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채 반 각이 지나기도 전에 조걸이 무언가를 들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미묘한 얼굴로 청명에게 손에 든 것을 내민다.

'천?'

아니, 의복인가? 그런데 이 상황에 뜬금없이 왜 저런 것을?

조걸이 내민 옷을 받아 든 청명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걸치고 있던 도포를 훌렁훌렁 벗어 내던졌다.

"아?"

그러고는 조걸이 가져다준 옷을 재빠르게 입기 시작했다.

몸에 딱 달라붙는 검은 의복…….

"뭐, 뭘 할 생각이야?"

"물어봐야지."

"응?"

청명이 태연하게 대답한다.

"어차피 사숙들에게 물어 봐야 제대로 대답해 줄 리도 없고, 보나마나 애는 빠져 있으라고 하겠지."

당연하지 인마! 그게 맞는 말이니까!

"그러니까 직접 물어본다!"

"자, 잠시만!"

윤종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청명이 벌인 일은 화산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의 여지가 굉장히 많음에도 어찌어찌 수습이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 벌이려는 일은 화산의 일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마, 말려야 돼.'

운이 좋다면 적당히 정보를 얻어 내는 수준에서 끝날 수도 있겠지만…….

'그럴 리가 있나!'

청명은 말하자면, 후진이 없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놈은 반드시 사고를 친다! 목을 걸어도 좋다.

그리고 이놈이 산 아래로 내려가 사고를 친다면 그 여파는 걷잡을 수 없을 게 뻔하다.

여기서 말리지 못한다면 윤종의 책임도 있다. 이놈이 사고를 친 전말을 문파의 어른들이 알게 된다면 대사형인 윤종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말려야 하지?

말 몇 마디로 말릴 수 있다면 벌써 했을 것이다.

윤종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입을 열었다.

"너, 너 뭘 하려는 건데?"

"직접 물어본다니까?"

"대답 안 하면?"

"대답을 안 해?"

청명이 고개를 갸웃한다.

"보통은 그런 적이 없는데. 다들 제발 대답할 테니 그만하라고 하던데?"

뭘 그만해, 이 미친놈아!

윤종이 전력으로 머리를 짜냈다.

"너, 너 도사잖아?"

"응?"

"그래, 너 도인이잖아. 화산의 제자잖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청명 저놈은 도를 좇는다는 것과 화산의 제자라는 것에 나름 자부심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부분을 잘 자극하면?

"도인이 그런 짓을 하면 안 되지! 그래서야 흑도방파 무리와 다를 게 없잖아!"

그러자 청명이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말은 맞다. 도인이 그런 짓을 하면 안 되지."

확실히 이 한 수는 먹힌 것 같았다. 윤종의 얼굴이 한 줄기 희망으로 환해졌다.

"그, 그렇지!"

"하지만 사형! 잘 들어라!"

"엥?"

"불문에 이런 말이 있지!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

"그러니까! 진정한 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청명이 마지막으로 손에 들고 있던 검은 복면을 얼굴에 뒤집어썼다. 그러더니 너무도 당당하게 외쳤다.

"때로는 도를 어길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이.

"나는 간다! 진정한 도를 찾으러!"

"……."

청명이란 놈을 막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깨닫는 윤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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