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화산이 박살이 난 게 나 때문이라고? (4)
대충 상황이 짐작이 갔다.
대산에 오른 결사대는 분명 전멸했다. 하지만 대산을 지키던 마인들 중에서는 살아남은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십만대산은 그들의 본거지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니 그곳에서 청명이 천마의 목을 베는 모습을 목격한 이가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에라이! 씨!"
청명이 손에 들었던 종이를 집어 던졌다.
알아줘야 할 놈들은 다 뒈져서 한 놈도 못 보고, 보지 말아야 할 놈들이 봤다. 이게 뭔 개 같은 경우인가!
조걸이 찔끔해서 물러났다.
"왜 갑자기 화를……."
"끄으으으응."
청명이 얼굴을 벅벅 비볐다.
'진정해라.'
앞에 조걸을 두고 화를 낼 일이 아니다. 화는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낼 수 있다.
"그래서 마교 놈들이 쳐들어와서 화산을 싹 쓸어버렸다고?"
"피해가 어마어마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 그놈들도 사천을 뚫고 섬서로 오면서 힘을 많이 소비했으니까. 그런데 전각이 꽤 많이 불탔다고 들었어. 그러면서 무공이 엄청 유실되었다고 하더라고."
그럼 그렇지. 나름 납득이 간다.
아무리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고 한들, 비급만 있었다면 이 같은 꼴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스승의 존재 없이 비급만으로 무학을 익히는 게 지옥같이 힘들다고 해도 없는 것보다는 백배 나으니까.
그 비급마저 유실된 거라면 화산이 이렇게 쾌속으로 몰락한 이유가 설명이 된다.
"설명은 되는데……."
명쾌하게 설명이 되는데 왜 시원하지가 않고 속이 터진다는 말인가?
"끄으응. 일단 알았어."
청명이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산책. 잠깐 머리를 좀 비워야겠어."
"곧 사숙이 확인하러 오실 거야. 혼나도 난 모른다."
"그래그래. 고맙다."
비척이며 자리를 비우는 청명을 보며 조걸이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하여튼 이상한 놈이야.'
* * *
"미친."
속에서 천불이 난다.
에라, 얼어 죽을!
목숨 걸고, 아니 진짜 말 그대로 목숨을 버려 가며 천마 놈의 모가지를 잘라 놨더니, 잇속은 다른 놈들이 다 쏙쏙 빼먹고 화산은 망했다고?
뭐 이런 개 같은 결과가 다 있냐? 이 세상엔 인과응보도 없나!
생각할수록 속이 뒤집어졌다.
"허……."
이제는 이놈들의 한심한 모습을 봐도 제대로 화를 내기 어려워졌다. 다 청명 때문이라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니. 마인 놈들이 무슨 의리가 그렇게 있다고!"
천마가 뒈졌으면 구석에 찌그러져서 얌전히 살면 되지. 그걸 복수하겠다고 섬서까지 쳐들어오네.
화산이 섬서가 아니라 사천쯤에 붙어 있었으면 아예 기둥뿌리가 뽑히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걸 다행이라고 할 수도 없고."
애꿎은 머리카락만 뽑혀 나갔다.
"하아."
그래도 처마 위에 홀로 앉아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하늘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다.
'세상 일이 다 그렇지.'
청명이 정말 짜증이 난 이유는 그가 벌인 일이 화산에 해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화가 난 이유는 그가 벌인 일의 대가를 후인들이 모조리 뒤집어썼기 때문이다.
청명이 살아 그 일의 여파를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얼마든지 달게 감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죽어 버렸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제자들이 여파를 뒤집어쓰지 않았는가? 지금 화산의 몰골이 그 대가라고 생각하니 끓어오르는 속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다.
"쯧. 뭐 어쩌겠어."
누구도 청명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그가 천마를 죽인 덕분에 화산이 좋지 않은 꼴을 당했다고는 하나, 그때 천마를 죽이지 못했다면 화산은 물론이고 전 중원이 무너졌을 것이다.
청명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설사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청명은 망설임 없이 천마의 목을 벨 것이다.
하지만…….
"묘하게 찝찝하네."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이.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지. 무너졌으면 다시 세워 주면 그만이지!"
그에게 책임이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책임이 있건 없건 어차피 그가 해야 할 일은 동일하지 않은가? 화산을 되살리기만 하면 된다.
"생각해 봐야 달라질 건 없어.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지!"
망하기 전보다 더 강대하게 되돌려 놓으면 그만이다. 다른 이에게는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청명에게는 가능한 일이다.
조금 어렵지만.
아니, 좀 많이 어렵지만.
난이도로 따지면 천마의 목을 잘라 오는 것보다 더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마음이 급하네.'
수련을 하는 자에게 조급함은 독이다. 빠르게 나아가는 것과 빠르게 나아가려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좀 더 스스로를 관조하면서 서두르지 말고 나아가야 한다.
"자, 일단 마음을 편히 먹고."
일단은 유실된 무서 외에도 무엇이 망가졌는지를 알아봐야겠지. 그러려면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게 제일이다.
"장문인 어디 있어! 당장 나와!"
그래. 일단 장문인에게…….
아니, 이거 내가 한 말이 아닌데?
청명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문?'
저 멀리 보이는 정문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해가 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간에 방문자가?
아니, 그 전에 뭐라고 했더라?
"장문인 나오라고!"
아, 그랬지. 장문…….
"장문인?"
청명이 멍한 얼굴로 귀를 후볐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야?"
장문인 나와?
'아니, 어느 미친놈이?'
감히 누가 화산의 정문에 쳐들어와 저리 건방지게 장문인을 부른단 말인가? 예전의 화산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저리 경망한 말을 꺼내기도 전에 주먹이 그 입에 틀어박혔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문 앞에 있는 놈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자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쿵! 쿵! 쿵!
과격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동시에 겨우 그 모양새만 유지하고 있던 문이 부서질 듯 덜컥거리기 시작했다.
"저, 저, 저?"
쿠우우웅!
정문이 끝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간다. 바닥으로 쓰러진 문이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흙먼지를 피워 내었다.
청명이 멍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문을 부숴?'
화산의 정문을?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들어갑시다!"
문을 부순 십여 명의 사람들이 안으로 박차고 들어온다. 그러더니 일제히 일직선으로 장문인의 거처를 향해 달려간다. 일관된 동작이 한두 번 해 본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운자 배들이 기겁을 하여 달려 나왔다.
"자, 잠시만!"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상대는 막무가내였다.
"비켜! 당장 안 비켜?"
"장문인 나오라고 해!"
"어? 지금 몸에 손댔어?"
청명의 눈이 데구르르 굴렀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문을 부수고 난입한 이들에게서는 무공이라는 게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운자 배들은 감히 그 앞을 막기가 힘들다는 듯이 쩔쩔매고 있었다. 심지어는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배를 툭툭 내밀 때마다 운자 배들이 포탄이라도 맞은 듯이 휙휙 밀렸다.
힘이 없어서 밀리는 게 아니다.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이들과 몸 대 몸으로 부딪히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
청명이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난입한 이들이 운자 배를 밀어 내고 장문인의 처소 앞에 도달했다.
"장문인! 당장 나오시오!"
"도망가지 말고 나오란 말이오!"
"거기 안에 있는 거 다 알고 있소! 오늘은 절대 그냥 돌아가지 않을 테니, 당장 나오시오."
청명은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현실인가?'
이곳이 어딘가?
아무리 몰락했다고는 하나 대 화산파다! 그런데 화산파의, 그것도 장문인의 처소 앞에서 저리 난동을 부리다니.
"끄윽!"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하지만 청명은 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풀 수가 없다.
"뭐 하는 녀석이냐?"
"엥?"
그들을 만류하던 운자 배 중 하나가 격하게 고개를 꺾어 청명을 올려다본다.
"당장 들어가거라! 이 시간에 삼대제자가 왜 이런 곳을 배회하는 것이더냐!"
"……어."
청명이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그러고 보니 그를 제외한 누구도 밖으로 나와 보지 않는다. 이만한 소란이 터졌으니 들은 이들이 많을 텐데도 말이다.
'이거 생각보다 자주 있던 일이었나?'
소란이 터졌다면 고개를 내밀어 보는 게 사람의 본성이다. 그럼에도 짠 듯이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런 일이 있을 때 어찌 대처해야 하는지 행동 강령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얼마 전에 들어온 청명은 알 리가 없지만.
"뭐 하느냐!"
아니 그렇다 치더라도 내가 아니라 일단 저것들을 어떻게 해야 될 거 아니냐, 이놈들아!
"장문인! 당장 나오시오!"
"오늘은 절대 이대로 물러가지 않을 거요! 그리 숨어 있어 봤자 소용없으니 빨리 나오시오!"
"수치를 모르는 거요!"
운자 배가 청명을 타박하건 말건, 처소 앞으로 몰려온 이들은 꽥꽥 소리 질러 대기를 멈추지 않았다.
청명의 뒷목이 뻣뻣해져 온다.
그 순간이었다.
끼이익.
살짝 귀에 거슬리는 소음과 함께 문이 열린다. 그리고 화산 장문인 현종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가 나오자 무리들을 만류하던 운자 배들이 일제히 예를 표한다. 장문인은 살짝 손을 저어 그들을 물리고는 입을 열었다.
"이 늦은 시간이 어인 일들이십니까."
'과연.'
피가 머리끝까지 몰린 상황임에도 청명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후인이라고 한들 그 역시 살아온 세월은 적지 않을 터. 배분이 낮고 태어난 시기가 늦다고 해서 사람으로서의 격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동작 하나하나, 말투 하나하나에서 선기(仙氣)가 흘러나오는 것 같다. 덕분에 청명 역시 흥분이 조금 가라앉는 느낌이다.
그야말로…….
"뻔히 알면서 뭔 헛소리를 하는 거요!"
"일단 내려오시오! 당장!"
"뭘 여유로운 척하고 있어!"
그렇지, 여유로운 척하고 있네…….
아, 아니 이게 아니지!
현종이 살짝 얼굴을 굳힌 채 아래로 내려온다. 그러더니 낮게 한숨을 쉬었다.
"저는 도망가지도 않고, 숨지도 않습니다. 제가 화산을 나가면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 그러니 다들 화를 가라앉히시고……."
"화를 가라앉히긴 개뿔을 가라앉혀!"
청명의 눈이 툭 튀어나왔다.
현종이 저리 선기가 담긴 말을 하고 있음에도 저 미친놈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그럼에도 현종은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되레 쩔쩔매고 있다는 것이다.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마치 저건…….
'어?'
청명의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다.
"장문인!"
일행의 대표 격으로 보이는 이가 삿대질을 해 대며 소리쳤다.
"우리는 충분히 기다려 줬소! 이제 더 이상은 못 기다리오!"
"……."
현종의 얼굴에서 선기가 사라진다.
'저, 저거…….'
설마?
"대체 돈은 언제 갚을 거요! 변제일이 한참 지났소! 우리도 더는 못 참소이다!"
청명이 멍한 눈으로 현종을 바라보았다.
선기가 넘치는 도인에서 빚쟁이로 몰골이 변한 현종이 어정쩡한 자세로 작게 입을 연다.
"시,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시면……."
청명이 뒷목을 부여잡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끄윽.'
빚이 있어?
남은 거라곤 다 쓰러져 가는 전각밖에 없는 문파에 빚이 있다고?
'진짜.'
청명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하늘이 부옇게 흐려졌다.
'가지가지 한다. 미친놈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