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화산이 박살이 난 게 나 때문이라고? (3)
"일단 두 놈은 건졌고."
처마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청명이 그 자리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그의 옆에는 주먹밥이 놓여 있었다.
'크으. 내가 이렇게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는데.'
지금 그가 식당에 들어가면 사형제들은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할 것이다. 최소한 밥은 편하게 먹게 해 줘야 한다. 그게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청명이 배를 두드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생각보다 요란하게 시작됐어.'
원래는 한동안 죽어지내면서 눈치를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저놈들이 잠자는 호랑이의 코털을 뽑는 정도가 아니라 입 안에 불 꼬챙이를 쑤셔 넣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세상에는 참을 수 있는 것과 참을 수 없는 게 있는 법이니까.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나마 운검이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슬쩍 찔러봤더니 찰떡같이 알아듣고 청명을 밀어준다. 덕분에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렸다.
물론 운검이 다른 방향으로 나갔을 때의 대처법도 다 마련해 두었지만 아무래도 조금 귀찮은 건 사실이니까.
'생각보다 똘똘해.'
똘똘하다.
"……똘똘?"
분명 운검은 청명에게 있어서 사숙조다. 하지만 그의 증사질이기도 하다. 사숙조에게 똘똘하다는 말을 쓰는 것은 불경이지만, 증사질에게 똘똘하다는 말을 쓰는 것은 칭찬이 아닌가?
"끄응. 복잡하네."
웬만큼은 더 지내 봐야 정리가 될 것 같았다. 아직 화산 내에서의 그의 입장이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느낌이다.
그건 그렇고…….
"저 두 놈은 확실히 똘똘하단 말이야."
청명의 시선이 식당으로 들어가는 윤종과 조걸에게로 향했다.
사람이 이만큼 모여 있으면 그중에서는 반드시 두각을 나타내는 이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청명이 보기에 삼대제자 중 핵심이 될 만한 이가 바로 저 두 사람이었다.
"생각도 제대로 박혀 있고."
꽤나 기특하지 않은가. 보통 이만큼 구르면 죽겠다 소리가 입에서 멈추지 않아야 하는데, 불평이 없는 수준이 아니라 의욕을 가진다? 이건 청명으로서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특히나 조걸.
얻어맞은 놈이 원한을 배제하고 냉정하게 상황을 보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 와중에 청명을 따라가면 강해질 수 있다고 확신하는 부분도 대단하다. 남은 돈이 있다면 맡겨 보고 싶을 정도다.
"잘 키우면 쓸 만하겠네."
청명이 피식 웃으며 주먹밥을 베어 물었다.
저놈들도 저놈들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청명이다.
'일단은 몸을 만드는 게 먼저야.'
토대는 대충 쌓았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지만 가장 위험한 구간은 넘겼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제 본격적으로 무학을 익혀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뭘까?
바로 완벽한 육체다.
그 많은 지식을 가지고 어린 몸으로 돌아왔으니 명상이나 논검으로 강해질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천만에.
"무학은 정직한 법이지."
이론은 이론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아무리 드높은 무학을 알고 있다 해도 그 무학을 체화(體化)시키지 못한다면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없는 법이다.
내공 수련과 체화는 머리로 할 수 없다. 반드시 땀을 흘려 몸으로 익혀야 한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근력(筋力).
화산의 검은 쾌속하고 화려하다고?
다시 말하자면 내력이 실린 검을 손목만으로 백팔 방향으로 휘둘러야 하는 게 화산의 검이다. 검이 화려한 거지, 몸뚱이가 화려한 게 아니다.
아름답고 화려한 매화를 피워 내기 위해서는 튼튼한 뿌리가 있어야 하는 법. 무학에 있어서 뿌리는 바로 육체다.
'보고 싶은 것만 봐서는 안 되지.'
세인들은 화산의 화려한 검에 시선을 빼앗긴다. 하지만 그 덕분에 그 화려한 매화를 피워 내는 사람이 죽어라고 검을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은 보지 않는다.
- 아 빌어먹을 검초! 뭐가 이렇게 복잡해? 그냥 찔러 죽이면 안 되나?
- 왜 정면으로 찌르는데 세 번을 꼬아야 하냐고! 손목 부러지겠다고!
물 위를 유유히 유영하는 백조의 다리는 필사적으로 파닥이는 법이다. 화산의 화려한 검초가 백조의 몸이라면 그 검을 휘둘러야 하는 육체는 백조의 다리였다.
그러니 단련하고 또 단련해야 한다.
저 아이들이 그가 하는 수련의 사분지 일만 소화해도 삼 년쯤 뒤에는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육체를 가진 후기지수로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쯤이면 화산은 천하제일 화려한 검을 쓰는 문파가 아니라 소림 귀싸대기 때리는 강력한 문파가 될지도 모른다.
청명이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제는 병아리들이 아니라 그 윗대인데.'
병아리들이야 그가 주무르면 금방 체계가 잡힐 테지만, 윗배분은 그가 굴릴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러니 스스로 강해질 수 있게 만들어야 하는데…….
운검을 생각하니 한숨이 나온다.
'자질은 나쁘지 않은데.'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를 보면 그동안 운검이 얼마나 열심히 노력해 왔는지를 느낄 수 있다.
제대로 된 검을 전수받지 못한 사람이 그만한 수준에 오른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더 늦기 전에 제대로 된 검술을 익힐 수 있게 해 준다면 분명 좋은 검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주지.'
청명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게 난감하다.
떡하니 던져 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랬다가는 난리가 날 것이다. 도무지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다. 그러니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자연스럽게 넘겨줘야 하는데. 이걸…….
"끄응."
청명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딱히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머리를 굴리며 살아온 삶이 아니다 보니, 이럴 때는 영 해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일단은 다시 가 볼까?"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일단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정확하게 실전된 무학이 무엇인지. 그리고 남아 있는 무학들은 제대로 전수가 되고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 * *
조걸은 눈앞에서 다리를 꼬고 앉은 청명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생각을 좀 잘못 한 것 같은데?'
강해지는 것? 수련?
다 좋지. 다 좋아.
그런데 그러려면 이놈과 계속 이렇게 같이 살아야 한다.
'이걸 버틸 수 있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러니까……."
"예."
"반말해, 사형."
"……응."
"그러니까 이게 다라는 거지?"
"예."
"반말하라니까."
"응."
청명이 조걸이 적어 온 것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진짜 이것밖에 없어?"
"그렇다니까……요."
"반말……. 아니, 맘대로 해라."
적응되면 알아서 반말하겠지.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먹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종이를 보며 청명이 머리를 움켜잡았다.
"그러니까 지금 무서관(無書館)에 있는 무학이 이게 전부라 이거지?"
조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 미치겠네."
"……."
청명이 의자에 늘어졌다. 조걸은 언제나 그랬듯 그가 이러는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얘는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갑자기 무서관에 가서 있는 무서의 제목을 모조리 적어 오라고 하더니, 막상 적어 온 목록을 보면서는 콧김을 뿜어내고 있다.
"이게 다라고?"
그러고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한다.
'아무리 봐도 제정신은 아니야.'
사숙이 그랬다. 강해지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고.
하지만 이놈은 버려도 너무 많은 걸 버린 게 아닐까? 최소한의 인간다움은 유지해야 할 것 같은데…….
"사형."
"응?"
"이거 말고는 없어? 사형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한계가 있을 거 아냐?"
"읽는 건 허용이 안 되는데, 보는 건 괜찮아. 그게 전부야."
"……아니."
청명의 시선이 다시금 목록을 훑는다.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어디다 날려 먹고 태을미리검 같은 반편이를 익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상황을 어느 정도는 짐작했다. 그런데 이건 심해도 너무 심하다.
"아니, 뭔 태반이 날아가?"
그것도 중요한 검술들만 쏙쏙 뽑아서.
누가 일부러 화산을 망치려 들지 않고서야 이게 가능한 일이겠는가?
"그럼 지금 일대제자들은 태을미리검이랑 복호청양검(伏虎靑陽劍)을 주력으로 익힌다는 거야?"
"그렇게 알고 있어."
"……나 원 참."
청명이 머리를 벅벅 긁는다.
'이거 생각보다 상황이 더 심각한데.'
이걸로는 안 된다.
물론 무학보다 사람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지 않은가? 적은 잘 벼려진 진검을 들고 달려드는데 이쪽엔 나뭇가지를 쥐여 주며 싸우라고 하면, 나뭇가지 넘겨주기도 전에 싸대기부터 처맞는 법이다.
최소한은 해야 한다. 최소한은.
하지만 청명의 기준에 태을미리검과 복호청양검은 그 최소에 미치지 못하는 검이었다.
'하다못해 칠매검이라도 있었으면.'
화산이 이 꼴은 아니었을 텐데. 생각할수록 열이 받는다.
청명이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잠재우고 있는데, 문득 조걸이 입을 열었다.
"내가 듣기로는……."
"응?"
묻지도 않았는데 뭔가 술술 나온다.
"예전 마교가 쳐들어왔을 때, 서관에 불이 났대."
"……서관에 불이 나? 아, 아니 그보다 마교가 쳐들어왔다고?"
마교가 화산에 왜 쳐들어와? 천마 죽고 지리멸렬된 거 아니었나?
조걸은 대답에 앞서 다른 질문을 던졌다.
"너 매화검존 알아?"
"알지."
아주 잘 알지. 나보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아주 잘 알지.
"사숙들이 말씀하시기로 그 매화검존이 천마를 죽이는 데 일조를 했데."
"……일조를 해?"
내가 그 새끼 목을 벴는데, 뭐? 일조를 해?
청명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목숨까지 버리면서 이뤄 낸 업적을 이런 식으로 폄하하다니!
"그런데 뭐. 모를 일이지."
"뭘 몰라, 인마! 매화검존이 천마 목을 벴는데!"
"응? 누가 그래?"
"누가 그러냐니! 그거 다……."
어?
청명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틀어졌다.
'자, 잠깐만.'
"아니라고도 확실히 말할 수 없는 게, 그때 대산에 오른 이들은 다들 죽었거든. 그래서 천마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몰라."
"……."
그렇지. 다 죽었지. 청명이 마지막으로 살아남아 천마의 목을 벴으니까.
그러니 본 사람이 없지……. 맞지. 본 사람이 없지.
그러네.
청명은 깨달았다.
'아니, 그러면…….'
화산의 명예를 위해서 목숨까지 버리면서 천마를 쓰러뜨렸는데, 그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뜻 아닌가?
아니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
"여하튼 그때 대산에서 천마가 쓰러지고, 남은 마교의 잔당들이 미쳐서 중원으로 밀고 내려왔대.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도 끝끝내 화산까지 올라와서 다 불 지르고 난리를 쳤다는데?"
"……."
청명의 전신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청명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 조걸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도통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하더라고. 화산에 딱히 원한이 있지도 않을 텐데."
"어……. 음, 그게……."
왜 그랬는지 모르는구나. 나는 알 것 같은데.
"허허."
그러니까 이 말을 종합해 보면.
화산이 박살이 난 게.
'나 때문이야?'
응?
나 때문이라고?
"허허허허허."
"갑자기 왜 웃어?"
"허허허허허허허허허."
아우 인생 진짜.
허허. 허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