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파산이 가당키나 하냐, 이놈들아! (5)
"음?"
몸을 일으킨 운검은 창으로 들어오는 밝은 빛을 보면서 눈을 찌푸렸다.
'이 녀석들이.'
화산의 법도는 꽤나 지엄하다.
과거 사승 관계로 전수가 이어지던 시절, 제자는 반드시 스승보다 일찍 일어나 스승을 깨우고 문안 인사를 드리고, 조반을 차려 바쳐야 했다.
시대가 달라져 이제는 그런 사승 관계가 이어지지 않고 있지만, 백매관에 든 이들은 당번을 정해 백매관주인 운검을 깨우고 문안 인사를 드리는 것이 법도였다.
그런데 오늘은 아무도 문안을 오지 않은 것이다.
"허어. 이놈들이."
한동안 풀어 주었더니 그새 게을러졌구나.
운검이 눈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안을 오지 않았다는 것은 문안을 올 이들만 잠에 빠져 있다는 뜻이 아니었다. 깨어 있는 이가 있었다면, 누군가는 문안조를 깨웠을 터. 백매관의 모든 아이들이 아직 잠에 빠져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새로운 아이가 백매관에 들어왔다는 게 생각이 났다.
"이놈들이 또……."
운검이 눈을 살짝 찌푸렸다.
아이들이 신고식이니 뭐니 하는 괴상한 일을 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스승으로서 그만두게 해야 할 테지만, 단체 생활을 하는 아이들에게는 나름의 유대감도 필요한 법이다.
조걸 그 녀석이야 끝을 모르고 일을 벌이지만, 윤종이 있는 이상 큰 문제가 생기기 전에 적당히 정리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듯 제때 문안조가 오지 않는다는 것은 어제의 환영식이 조금 과격했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운검이 미간을 좁히며 재빠르게 환복을 했다. 도포를 갖춰 입고, 허리에 패검한 그는 바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일단은 따끔하게 혼을 내야겠지.'
운검의 단호한 걸음이 백매관으로 향했다.
백매관이 보이는 순간 바로 일갈을 내질러 잠에 빠진 아이들을 깨워야겠다고 생각하며 모퉁이를 돈 순간이었다.
"가……."
'갈!'
하고 크게 소리를 지르려던 운검이 숨을 훅 들이키고는 차마 내뱉지 못한 채 멈춰 버렸다. 동시에 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다.
'뭐, 뭐야 이거?'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그의 눈앞에 기이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뭐지. 지옥인가?'
잠시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운검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여긴 화산이다! 그러니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도 화산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하지만 어째서 이런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헛것을 보고 있는 것도 아닐 테고?
눈을 마저 비빈 운검이 끔벅거리며 다시 전경을 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어……."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어정쩡한 신음을 내뱉는 운검의 귓가에 절망 어린 신음이 들려온다.
"끄으으윽. 끄윽!"
"아이고……. 나 죽는다. 아이고."
"엄마……. 나 집에 좀 데려가."
운검은 신음을 내뱉는 아이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이게 진정 내가 알던 아이들이 맞는가?
무릇 아이란 그런 것이다. 때로는 그 무지함으로 화를 불러일으킬 때가 있고, 간악함으로 실망을 자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한 아이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훈훈하게 만드는 생동감이 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아이들에게서는 생동감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뭔 애들이 걸레짝이 되어 있어.'
그가 알던 뽀송뽀송(?)한 애들은 다 어디 가고, 거지꼴이 된 아이들만 굴러다니고 있는가.
운검이 경악한 눈으로 사방을 훑어보았다.
"끄으으."
"죽는다……. 진짜 죽어."
나뒹구는 아이들의 면면을 자세히 살핀 운검이 눈을 끔뻑였다.
'내 사손들이 맞는 것 같은데?'
조금……. 아니, 꽤나 많이 상태가 안 좋아지기는 했지만, 저 시커먼 것들은 분명 운검의 사손들이자 백매관에 기거하는 청자 배들이 분명했다.
'대체 뭘 한 거지?'
무슨 일을 하면 어제까지만 해도 뽀송뽀송했던 애들이 하루아침에 상거지 꼴이 된단 말인가?
넝마가 다 된 아이들 주변엔 목검과 주머니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저건 또 뭘까?
운검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 수 있었다. 짐작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면 굳이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다. 이곳에는 그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백이 넘는 입이 있잖은가?
"대,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입을 열기가 무섭게 고개가 획획 움직인다.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던 아이들이 일제히 운검을 바라보았다.
반쯤 죽어 있던 아이들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사숙조!"
"사숙조님!"
"천존이시여!"
마지막에 조금 이상한 말이 들린 것 같았지만, 일단 아이들이 그를 격하게 환영하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었다. 심지어 금방 눈물이라도 쏟을 기세이지 않은가.
아이들을 통제하는 게 임무인 그에게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아니, 흔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저 아이들이 저리 열렬히 환영하는 모습은 난생처음 보는 것 같다.
"크흐흐흑! 사숙조!"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왜!"
"사숙조 보고 싶었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항상 눈치만 보던 아이들이 이리 격하게 환영해 주니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뿌듯해졌다. 알 수 없는 감동이 물밀 듯 밀려온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운검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지.'
지금은 이런 걸로 감동할 때가 아니다.
아이들의 몰골을 보라. 흙과 땀으로 범벅이 된 모습이 전쟁이라도 치른 것 같다. 애처롭게 파들파들 떨리는 팔다리를 보니 운검의 속이 더 뒤집어질 판이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더냐?"
금방이라도 운검을 붙들고 눈물을 쏟을 것 같았던 아이들이 막상 질문이 떨어지니 우물쭈물하며 말이 없었다. 다만 슬쩍슬쩍 뒤쪽을 바라본다.
'눈치를 봐?'
운검의 시선이 아이들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그곳엔, 주저앉아 입을 쩌억 벌리고 있는 조걸이 있었다.
"조걸?"
"……아니. 그 뒤에."
"그 뒤?"
조걸에 고정되었던 시선이 좀 더 뒤로 향한다.
"저, 저 녀석은?"
더 커질 수 없었을 것 같았던 운검의 눈이 기어이 불가능을 이겨 내고 조금 더 확장된다.
'새로 온 녀석?'
이름이 청명이라 했던가? 그런데 저놈이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운검이 고개를 갸웃했다. 청명이 기이한 짓을 하고 있었다. 어깨에 목검을 메고 있는데, 그 목검에 커다란 주머니가 여러 개 주렁주렁 달려 있다.
"저 주머니는 뭐냐?"
"흙주머닙니다."
"……흙주머니를 왜?"
묻기는 했지만 이미 알 것 같았다.
보라.
상거지들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마른 상거지가 제 머리통보다 더 큰 흙주머니를 목검에 주렁주렁 달고는 바들바들 거리며 몸을 굽혔다 편다.
"흐으으으으으으읍."
보고 있는 운검까지 전신에 힘이 들어가고 땀이 나는 느낌이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파들파들 떨면서도 용케 균형을 잡으며 몸을 일으켜 세운다.
뚜욱. 뚜욱.
땀방울이 턱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전신이 땀에 젖다 못해서 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저러다 죽는 것 아닌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돋아난 힘줄과 핏줄, 그리고 지옥의 마귀처럼 일그러진 얼굴을 지켜보고 있자니 운검도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힘들다'라는 말을 표현하기에 저보다 확고한 모습은 세상에 또 없을 것이다. 몸을 쭈욱 편 청명이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몸을 굽힌다.
'그러다 죽어, 인마!'
운검이 너그러운 사람이기 때문은 아니다. 사실 그는 누구보다 엄격한 수련을 지향하는 사람이다. 쇠는 두드릴수록 단단해지고, 사람은 수련할수록 강해진다. 제자들이 힘든 수련을 한다면 말리기는커녕 박수를 칠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운검이 보기에도 지금 청명이 소화하고 있는 수련은 정도를 넘어섰다.
'아니, 그럼 이 녀석들의 몰골이 상거지가 된 이유가……?'
저 수련을 같이 하다가?
"사, 사숙조님! 살려 주십시오."
"이러다 죽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의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 젖다 못해 금방 빤 옷을 말리지도 않고 걸쳐 입은 느낌이다. 저 축축한 물기가 다 땀이라고 생각하자 소름이 돋는다.
'그럼 다들 자고 있었던 게 아니라?'
새벽부터 수련을 하다가 이리 되었다는 말인가?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느냐?"
"묘시 초입니다."
한 시진을 넘게 저러고 있었다는 말인가?
"……왜?"
당연한 의문이었지만, 아무도 그 질문에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그저
'그거 말하면 저희 죽습니다.'
라는 표정을 필사적으로 짓고 있을 뿐이었다.
'설마?'
아니, 아니겠지. 그럴 리가.
그게 말이나 되나?
이곳에 있는 아이들은 화산의 삼대제자다. 아무리 화산이 예전 같지는 않다고 해도 나름 무공을 수련하는 이들이란 말이다. 삼대제자 중에서는 오 년이 넘도록 무학을 익힌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들에 비하면 월등히 셀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녀석들이 저 작은 아이 하나 감당 못 해서 이런 꼴을 당하고 있다는 말인가?
'자, 잠깐만.'
삼대제자 중에서 나름 입지가 높고, 실력이 좋기로 유명한 조걸이 지금 바닥에 쓰러져 숨만 쉬고 있지 않은가?
'윤종은?'
운검의 눈이 빠르게 대제자인 윤종을 찾았다.
"헐……."
윤종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물체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쟤는 왜 저렇게 됐어?'
조걸은 그래도 그나마 사람의 몰골을 유지하고 있건만, 윤종은 이제 거의 사람이라고도 볼 수 없는 꼴을 하고 있었다.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엉덩이만 살짝 든 채, 숨을 몰아쉬는 윤종의 모습을 보니 애잔하다 못해 눈가에 눈물이 고일 것 같다.
"그……."
운검이 입을 열다가 다시 닫았다.
'아니, 훈련을 하는 건 좋지만.'
이제 뭘 했는지는 안다. 청명을 보면 명확하지 않은가. 아이들은 새벽부터 나와서 근력 운동을 한 게 틀림없었다.
화산이 쾌속함과 화려함을 장기로 삼는 검문(劍門)이라고는 하나, 기본적인 근력 운동은 병행한다. 모든 무학의 기본은 육체에서 시작하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대체 무슨 짓을 해야 멀쩡하던 아이들이 단 한 시진 만에 사람 몰골에서 벗어난다는 말인가?'
운검이 손을 들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슬쩍 눈을 돌려 보니 아이들이 다들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운검이라면 이 사태를 해결해 줄 거라는 희망과 믿음이 가득 담겨 있다.
'그 몰골로 그런 눈 하지 마.'
정말로 심각하게 부담스러우니까.
"크흐흐흠."
헛기침을 해 마음을 진정시킨 운검이 청명에게로 눈을 돌렸다. 일단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파악을 해 봐야 한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정하는 것은 그 이후다.
"저 아이를 데려오너라."
백매관주 운검이 '청명'이라는 이름을 뇌리에 단단히 틀어박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이 자신의 평생에 걸쳐 가장 중요한 이름이 될 거라는 사실을 지금의 운검은 미처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