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파산이 가당키나 하냐, 이놈들아! (4)
다음 날 새벽.
우우우웅.
청명은 가만히 자신의 몸을 관조했다.
단전.
작고 미약하기 짝이 없었던 단전이 이제는 웬만큼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쌓인 기운들도 어느덧 확연하게 인식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자라났다.
우우우우웅.
흡기를 하는 와중에도 모인 기운들이 공명하며 그의 육체를 정화했다.
맑디맑은 기운.
수십 년을 내력과 함께 살아온 청명으로서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투명하고 맑은 기운이 그의 단전에 모여 있다. 지금 당장은 그 내력의 크기가 크지 않아 큰 위력을 발휘하기 어렵겠지만, 이 맑은 기운들이 쌓이고 쌓인다면 세상 어떤 내력보다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언제."
운기를 끝낸 청명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큰 힘을 발휘하기는 얼어 죽을. 지금 당장 화산이 망하게 생겼구만, 이걸 언제 기다리고 있나?
불쑥불쑥 솟아나는 화딱지를 내리누른 청명이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정리해 보자.'
화산의 문제는 수도 없이 산적해 있다. 문제점을 하나하나 꼽으라면 화산에 있는 모든 종이를 가져와도 다 쓰지 못할 정도다. 하지만 그중 가장 중점적인 문제는 세 가지였다.
"돈이 없고, 무공이 없고, 인재가 없다."
그럼 망한 거지 뭐.
막연히 생각하고 있을 때도 끔찍했는데, 막상 정리를 해 보니 더 격렬하게 속이 뒤집어진다.
그럼 그중에서 가장 큰 문제가 뭔가?
'인재.'
청명의 생각은 간단명료했다.
돈은 벌면 되고, 무공은 그가 가진 것을 주면 된다. 물론
'대체 이 무학을 어디서 구했느냐?'
소리를 듣지 않고 자연스럽게 넘기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겠지만 그건 과정의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인재만은 청명의 힘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화산을 살리겠다고 저잣거리로 튀어 나가 자질이 괜찮은 아이들을 납치해 올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자질이라는 것은 겉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게 된다면 명문거파들이 눈에 불을 켜고 아이들을 뒤지고 다니겠지.
'그러니 일단 있는 놈들을 활용해야 해.'
청명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없는 살림 탓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일단 있는 것부터 제대로 활용하는 게 우선이다.
삼대제자들의 자질이 그리 뛰어나 보이지 않는 건 명백한 사실이지만, 모자라면 채우면 그만이고, 고장 나면 고쳐 쓰면 된다.
"물론 나는 제자가 없었지만."
옛 기억이 떠오른다.
그가 나름 나이가 들어 제자를 받아야 하는 시점이 되자 장문사형이 그에게 물었다.
-청명아.
-예, 장문사형.
-이제 슬슬 너도 제자를 받을 때가 되었구나. 너는 제자를 어떻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뭐 어려울 게 있겠습니까?
-어떻게?
-일단 패면 됩니다. 개도 죽을 만큼 처맞다 보면 물구나무서서 걷는 법이지요. 그래도 사람 새낀데 개보다 못하겠습니까?
-……나중에 이야기하자꾸나.
그리고 장문사형은 그에게 다시는 제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렇게 제자들을 한 번에 많이 받게 될 줄은 몰랐는데."
청명의 입꼬리가 싸아악 말려 올라갔다. 그 미소를 보는 사람이 있었다면, 두말없이 사악한 미소라 평했을 것이다.
* * *
"……졸려 뒈지겠네."
"왜 꼭두새벽부터 모이라 마라 하는 거지?"
"대사형. 이건 좀 심하지 않습니까?"
윤종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냥 조용히 좀 해라. 이 새끼들아.'
화산의 규율은 나름 엄한 편이지만, 이 아이들은 아직 속세의 때를 완전히 벗지 못했다. 고관대작이 사는 명문가는 아니더라도 나름 지역에서는 떵떵거리며 사는 집안의 자제들이다 보니 다들 불편함을 참지 못하고, 인내하는 것에 익숙지 않았다.
그러니 몽둥이찜질 후 불과 반나절 만에 이렇게 불평불만을 터뜨리는 것이다.
윤종이 살짝 고개를 들어 조걸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조걸은 분위기 파악을 했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하긴.
다른 녀석들도 분위기를 아주 파악하지 못한 건 아니다. 그러니 저리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면서도 이 꼭두새벽에 하나도 빠짐없이 집합을 했겠지.
윤종이 떨떠름한 시선으로 백매관을 응시했다.
'어디서 저런 괴물 같은 놈이 온 거지?'
눈에 선하다.
청명이 악귀 같은 모습으로 의자 다리를 휘두르며 서른이 넘는 아이들을 순식간에 처날려 버리던 모습이 말이다.
부르르.
생각하니 몸에 절로 오한이 든다.
"……그런데 쟤는 대체 누구야?"
그 말이 모두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답도 없이 세던데."
"한 대 스쳐 보지도 못했어."
"서른 명은 넘게 있었는데. 사숙조님들이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삼대제자 중에는 비슷하게 흉내 낼 수 있는 사람조차 없다는 거다.
"어제 입문한 애가 그렇다는 건, 역시 다른 데서 무공을 익힌 거 아냐?"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리가 지금까지 놀고먹은 것도 아닌데 이게 말이나 되냐?"
다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나마 나이가 많고 화산에서 가장 오래 생활한 윤종도 지금 사태 파악이 안 되는데, 다른 아이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다시 한번 덮쳐 보면 어떨까?"
"……."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말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가능할까?"
"어젯밤엔 우리가 당황해서 그런 걸 수도 있……."
"그러다 실패하면?"
"……."
싸늘한 가정이었다.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부동자세로 선 조걸이 입만 열어 말을 하고 있었다.
"다 뒈지게 얻어맞고 싶지 않으면 그냥 입 꾹 닫고 시키는 대로 해."
"……조걸 사형."
삼대제자 중에서는 실력이 가장 좋다는 조걸이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미친놈들.'
뭐?
다시 덮쳐?
한 대 처맞고 천장에 꽂혀 봐야 저런 말이 안 나오지. 조걸도 나름 실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예전에 비해서 끗발이 떨어진 화산이라고 하나 조걸은 어느 문파에서나 천재라고 불릴 만한 기재다.
결국 무학이라는 것도 사람이 익히는 것. 충분한 가르침과 훌륭한 무공이 없다 하더라도 웬만한 명문의 제자 정도는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 자신감이 턱주가리에 꽂힌 주먹 한 방에 화산을 넘어 망망대해로 날아갔다.
저건 일반적인 상식으로 재단할 수 있는 놈이 아니다.
"그런데 이건 왜 준비하라고 한 겁니까?"
삼대제자들이 앞에 놓인 이상한 도구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게. 어디다 쓰는 건지."
기다란 목봉과, 사람 머리가 들어가고도 남을 커다랗고 튼튼한 주머니. 그리고.
"모래더미랑 자갈들은 왜 준비하라는 거야? 반짇고리는 또 왜?"
"알 수가 있나."
모두가 구시렁거리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
고요해진다.
주절거리던 입이 일제히 닫히고, 모두의 시선이 문으로 집중된다. 이윽고 청명이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그런데 그 표정에 귀찮음과 짜증이 그대로 묻어난다.
'왜 니가 귀찮아 하냐!'
'귀찮으면 집합을 시키지 말든가!'
털레털레 나와 멈춰 선 청명이 고개를 들어 모두를 한번 쭈욱 둘러봤다.
"다 모였어?"
"예!"
"조용히 해라. 사숙조님들 깨신다."
"……."
뚜둑. 뚜둑.
좌우로 머리를 한 번씩 꺾은 청명이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어쨌든 우리가 앞으로 같이 생활할 사이 아니냐. 일이 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평생 사형제로 같이 지내는 사이가 될 수도 있고."
'죽어도 집에 갈 거다.'
'하산한다. 무슨 수를 써도 하산한다!'
도호를 받고 진신제자로 화산에 뼈를 묻겠다고 결심했던 이들조차 일제히 마음을 돌리게 하는 발언이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니들……."
청명이 씨익 웃었다.
"너무 약해."
"……."
"……."
무공을 익히는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모욕적이고 치욕적인 말이 바로 '약하다'이다. 심지어 적당히 무공을 익히고 돌아가서 상인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이들마저도 이 말만은 참아 내지 못한다.
"끄으응."
하지만 반박의 여지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혼자서 서른이 넘는 이들을 때려눕히면서도 한 대 맞기는커녕 스치지도 않은 사람이 한 말이다. 하늘이 빨갛다고 해도 부정할 수가 없다.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해. 무공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 그런데 너희는 화산에서 무공을 배워 보겠다고 결심하고 온 사람들이잖아. 그럼 이왕이면 강해져야지. 그렇지?"
"……."
"그러니까 오늘부터 새벽마다 나하고 같이 수련한다. 좋지?"
좋을 리가 있냐. 인마!
뻔뻔하게 말을 해 대는 청명을 보며 누군가 손을 들었다.
"말해 봐."
"이거 꼭 해야 되는 거야?"
청명이 뚱한 눈으로 질문한 이를 바라보다가 윤종에게 고개를 돌렸다.
바짝 얼은 윤종이 어물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때 거기에 모두가 있었던 건 아닌지라……."
"아, 그렇지."
안 맞은 놈도 있지.
신고식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도 있다. 말로 전해 듣기는 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사태 파악이 안 되는 이들도 있는 법이다.
"하기 싫은 사람은 들어가도 되냐?"
"그런데 너는 신입 같은데 왜 자꾸 반말 하냐? 아무리 그래도 예의는 지켜야지."
청명이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사람이 예의가 있어야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강해질 생각도 없고 수련도 해 볼 생각이 없다. 손!"
사람이 백이나 모이면 눈치가 없는 한둘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그런 한둘이 손을 들자 슬슬 눈치를 보던 몇몇이 더 손을 들었다.
대략 열댓쯤.
"좋아. 좋아. 무공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 자, 너희는 안으로 들어가자."
"가도 돼?"
"그럼."
윤종과 조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 멍청한 새끼들아. '들어가라'가 아니라 '들어가자'잖아!'
'지옥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네. 태상노군이시여. 저 새끼들을 굽어 살피소서.'
뭣 모르는 아이들이 해맑게 웃으며 백매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청명도 해맑게 웃으며 따라 들어갔다.
탁.
문이 깔끔하게 닫힌다.
"……."
아무도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백매관을 주시했다.
예상과는 달리 비명이나 고함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저거…….'
윤종은 똑똑히 보았다. 커다란 백매관 전각이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끼이이익.
문이 다시 천천히 열린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아이들이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전력으로 질주해 나왔다. 그러더니 원래 서 있던 자리로 벼락같이 돌아가 부동자세로 바짝 힘을 주고 섰다.
"쯧."
고개를 꺾으며 나온 청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수련하기 싫은 사람."
"없습니다!"
"조용히 하라니까. 사숙조님들 깨신다."
"없습니다."
"크으."
청명이 감격했다는 듯 박수를 친다.
"본 교관은 강해지겠다는 여러분의 열망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화산의 미래가 밝다. 그러니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러분을 강하게 만들어 주겠다."
"……."
"시작하자."
저 멀리 해가 밝아 오는 것을 보며 윤종이 질끈 눈을 감았다.
화산의 미래가 밝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미래는 어둡기 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