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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화 (12/1,567)

13화. 파산이 가당키나 하냐, 이놈들아! (3)

"사형."

"예! 사제님!"

"세게 좀 주물러."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깨를 주무르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 이름이 뭐라고?"

"윤종입니다!"

"네가 대사형이야?"

"예! 그렇습니다!"

청명의 고개가 살짝 뒤로 돌아갔다.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윤종의 얼굴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대사형이니 내가 대접을 해 주는 거야."

"감사합니다!"

"주물러."

"예!"

윤종 대사형이 열심히 어깨를 주무르고 안마하기 시작하자 청명이 혀를 차며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줄을 지어 바닥에 대가리를 박고 있는 사형들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이……."

청명이 입을 열자 모두가 움찔한다. 바닥에 머리를 박은 놈들이 움찔거리는 모습이 참 진기한 장관이었다.

"……얌전히 살려고 하면 도와줘야 할 거 아냐. 안 그러냐? 사형들?"

"그렇습니다!"

"저희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청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청명이 누구던가?

무려 천하삼대검수다. 그것도 천하삼대검수의 수위로 인정받는 자이자, 천마를 제외하면 비공식적인 천하제일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꼬맹이들을 상대하는 데는 내력도 필요 없다.

제아무리 내력이 미약하다고는 하나, 이런 꼬맹이들 따위는 서른 명이 아니라 삼천 명이 몰려와도 청명을 감당할 수 없다.

"신고식까지는 내가 이해한다 이거야. 그런데 신고식도 사람답게 해야지. 도관에서 할 짓이 있고 하지 않을 짓이 있는 법이야. 도사가 되겠다는 것들이 그렇게 저열하게 놀아서야 되겠어?"

다들 대답 없이 끙끙댔다.

'뭐가 이렇게 꼰대스럽지?'

'사숙조한테 욕먹는 기분인데.'

동년배와 대화하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청명이 그런 사형제들을 보며 혀를 찼다.

'내가 이런 것들이랑 드잡이를 해야 하다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다.

"기상."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들이 벼락같이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화산이 망해 간다지만, 화산에서 가장 청정해야 할 애새끼들이 이런 꼴이라니."

청명이 혀를 찼다.

"정신 상태부터 다시 잡아야겠어!"

"……."

아이들이 슬금슬금 눈빛을 교환했다.

'아니, 뭐 저런 게 기어 들어왔어.'

'저 새끼 패자고 한 놈 누구야. 뒈진다, 진짜.'

'망했다. 이제 같이 살아야 하는데.'

말 그대로 초상집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였다.

그럴 만도 하다.

사부와 함께 사는 형식이라면 도망갈 곳이라도 있겠지만, 삼대제자들은 백매관에 어울려 살아야 한다. 토끼들이 모여 살던 곳에 범이, 그것도 성격이 나쁜 범이 들어와 살겠다는데 편히 잠을 잘 수 있는 토끼가 어디에 있겠는가?

"쯧."

청명이 눈을 한번 부라리고는 입을 열었다.

"우선."

"네!"

"여기서 내가 화산 내의 상황에 가장 정통하다 하는 사형, 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명백히 한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

자신에게 쏠리는 사형제들의 시선을 보며 조걸이 눈을 부릅떴다.

"손."

"……."

"소오온!"

조걸의 손이 힘없이 위로 올라간다.

'두고 보자! 이 새끼들!'

그래도 동고동락한 세월이 얼만데 사형제를 팔아먹다니! 양심도 없는 것들!

조걸이 이를 빠득빠득 갈며 마지못해 앞으로 나섰다.

고개를 뻣뻣하게 든 그가 청명을 내려다본다. 들려 있는 턱과 내리까는 시선을 본 청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조걸 사형."

"……예."

"사형이 아무리 사형이라지만 거 고개가 너무 뻣뻣한 거 아니요?"

"그, 그게 아니라."

조걸이 허둥지둥 손을 들어 뒷목을 주물렀다.

"아까 처박히면서 어디가 잘못됐는지 목이 안 굽혀집니다."

"……."

"……."

청명이 작게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으로 따라 들어와."

"……네."

"다른 사형들도 오늘은 일단 방에 가서 쉬어. 뭘 해도 내일부터 할 테니까."

"예."

"사형은 따라오고."

청명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위로 올라가자 조걸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그 뒤를 따랐다.

둘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남은 삼대제자들이 우르르 윤종에게로 몰려들었다.

"대사형!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보이느냐?"

"……아뇨."

윤종이 밤탱이가 된 눈을 어루만졌다. 서글픈 것은, 지금은 이리 밤탱이가 된 눈도 내일이면 멀쩡해질 거라는 사실이었다.

'티라도 나면 사숙조들이 해결해 줄 텐데.'

쪼르르 가서 꼰지르는 짓은 자존심상 도저히 할 수가 없는데, 티를 내려고 해도 그가 익힌 내력은 알아서 몸을 치료하고 수복한다. 다들 내일 아침이면 언제 맞았냐는 듯 멀쩡한 몸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걸 생각하고 이만큼만 때렸다는 거겠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무서운 놈이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잘 때 한번 덮쳐 봅니까?"

"……니가 할래?"

"……."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조금 전 맹수처럼 날뛰던 청명의 모습이 떠올랐다.

'안 돼. 이건 안 돼.'

'잘못하면 죽는다.'

윤종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을 까뒤집고 의자 다리를 내리치던 청명의 모습을 생각하니 절로 마른침이 넘어간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말을 꺼냈다.

"조걸 사제는 왜 끌려간 겁니까?"

"……."

"……."

* * *

"편히 앉아."

"……서 있겠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앉아. 안 때릴 거니까."

"그게 아니라."

조걸이 살짝 어물쩍대다가 입을 열었다.

"천장에 처박히면서 어디가 잘못됐는지 허리가 안 굽혀집니다. 서 있는 게 편합니다."

"……."

청명이 헛기침을 했다.

"그럼 그러든가."

"저는 왜 부르셨는지……."

"말 편하게 하자, 사형."

"……예?"

"사형이 사제한테 존댓말을 쓰는 게 좀 이상하지. 편히 말해."

"예."

"편히 말하라니까?"

"예."

"……."

청명이 입맛을 다셨다.

뭐, 살다 보면 괜찮아지겠지.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그런데 왜 부르셨는지."

"아.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이야. 일단 최대한 아는 대로 자세히 대답을 해 주면 좋겠어."

"예."

청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예."

"여기에 있는 아이들은 대부분 상인 가문의 자제라고?"

"네, 그렇습니다."

"흐음."

청명이 손가락으로 볼을 톡톡 두드렸다.

'상인이라.'

예전에도 화산에 입문하려는 상인 가문의 자제는 많았다. 하지만 화산은 될 수 있으면 상인 가문의 사람을 제자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상인이 천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

자세만 되어 있다면 거지도 받아들이는 화산이 상인이라 해서 천하다 여기지는 않는다. 문제는 상가의 자제들이 대체로 화산의 제자가 되려 오는 것이 아니라 무학을 익히러 온다는 점이다.

그게 무슨 차이가 있냐고?

상인 가문이 아닌 다른 입문자들의 경우에는, 화산에 뼈를 묻겠다는 심정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입문을 하고 수련을 해 도호를 받고, 결국에는 화산의 중진이 되어 화산을 이끌어 나간다.

하지만 상가에서 온 이들은 속가 제자로 남아 허락되는 무학만을 익히고는 장성하여 다시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간다.

속세에서도 화산의 제자라는 신분을 잊지 않고 사문과 협력을 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본산에 남아 있는 제자들에 비할 수는 없다. 속가 제자로 세상에 내려간 제자들이 금전적으로 큰 도움이 되는 측면은 있으나, 화산을 이끌고 지켜 나가는 것은 결국 본산의 제자들이니까.

'대부분이 다 상가라는 건…….'

그나마 수가 많아 보였던 삼대제자들도 장성하고 나면 다들 화산을 빠져나갈 이들이라는 뜻이다.

'빛 좋은 개살구네.'

화딱지가 치밀어 올랐지만, 장문인의 생각도 이해가 갔다. 아무리 빠져나갈 이들이고 속가라고는 하지만, 당장 제자가 없는 것보다는 속가라도 채워 넣는 쪽이 낫다. 제자가 줄어들다 보면 정말 화산의 대가 끊어지고 말 테니까.

"그런데 사형들은 여기 왜 온 거야?"

"무슨 말씀이신지?"

"상가라면 나름 정보가 있었을 테고, 그럼 화산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텐데. 뭐 하러 여기까지 왔어?"

"아, 그게……."

조걸이 머리를 긁었다.

"사실 저희 가문에서도 원래 저를 화산으로 보내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희 가문의 자금력으로 입문할 수 있는 문파가 많지 않았습니다. 화산이 몰락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세상에 수많은 속가들을 두고 있습니다. 강호에서는 몰라도 상가에서는 그 인맥이 큰 힘이 됩니다."

"흐음."

조걸의 말대로라면 이곳에 와 있는 상가의 자제들도 그리 별 볼 일 없는 이들이라는 뜻이다. 나쁜 뜻이 아니다. 상인은 결국 가진 돈으로 그 가치가 결정 난다.

이들이 돈이 많았다면 몰락해 가는 화산에 입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 많은 돈을 주고 명문으로 갔겠지.

'그럼 삼대제자들 가문에서 빼먹을 돈도 없다는 뜻이네. 이미 입문할 때 적절하게 돈을 받아 챙겼을 거고, 그걸 받았는데도 살림살이가 개판이라는 말이니까.'

골이 다 지끈거렸다.

예전 장문 사형이 연말만 되면 장부를 붙들고 머리를 싸매던 생각이 났다. 그때는 사형에게 도인이 되어서 금전에 너무 집착한다고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장부로 죽빵을 얻어맞아도 될 발언이다.

사람이 먹고살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도인이라고 해서 이슬만 먹고 사는 건 아니니까.

"흠. 그러면……."

"예."

"다들 적당히 무공을 익히다가 하산해서 가문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보통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기강이 이리 개판이로군."

적당히 간판만 걸치러 온 곳에 애정이 있을 리 없다. 그러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신고식을 하고, 사형제들끼리 똘똘 뭉쳐 파락호 짓을 하는 거겠지.

"일단 알았어. 나가 봐, 사형."

"그럼……."

"아, 그리고."

"네?"

"여기 일과가 언제부터 시작이지?"

"진시 초(오전 7시) 기상입니다."

"애들 내일 묘시 초(오전 5시)까지 전부 준비해서 앞에 모이라고 해."

"예?"

"묘시 초."

"……예."

"그리고 사형들 시켜서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것들 준비해 놔."

"내일 아침에 모여야 하는데 그새 뭘 준비하라구요?"

"싫어?"

"싫을 리가 있겠습니까. 맡겨만 주십시오."

"크으. 적극적인 자세 좋아."

"……."

잠시 후, 청명의 지시를 들은 조걸은 미묘한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그리고 서글프게도 그의 방은 청명의 방 바로 옆이라 멀리 도망갈 수도 없었다.

멀어지는 조걸의 발소리를 들은 청명이 침상에 벌렁 드러누웠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

이 말을 처음 한 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참 속 편한 사람이다.

자그마치 천 리를 가는데 언제 한 걸음 한 걸음 떼고 있나. 더구나 청명이 가야 할 길은 겨우 천 리가 아니었다. 구만 리를 가고도 한참 더 가야 할 만큼 멀고도 험한 길이다.

'그래도 한 걸음부터겠지.'

그리고 그 한 걸음은 이놈들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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