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파산이 가당키나 하냐, 이놈들아! (2)
"앓느니 죽지! 앓느니 죽어!"
백매관으로 돌아가는 청명의 얼굴은 완전히 썩어 있었다.
제대로 되어 있는 게 하나도 없다.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을 간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백 년까진 무리였던 모양이다. 지금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면, 화산이라는 이름값을 빼면 삼류 문파보다 나을 게 없다.
'나을 게 없는 게 아니라 삼류 문파의 전형이지.'
돈 없고, 애들 상태 안 좋고, 거기에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들만의 개똥철학이 가득하다.
이게 삼류지! 삼류가 따로 있나!
다른 건 다 좋다. 그래, 다른 건 다 좋다 이거야!
그런데!
"이십사수매화검법은 어디다 팔아먹은 거야! 이 망할 놈들!"
전수가 잘못될 수는 있다. 비급만으로 무학을 익힌다는 것은 생각보다 굉장히 힘든 일이니까.
비급만으로 무학을 익히다가 주화입마에 걸린다거나, 비급의 의도와 다른 해석으로 나아가서 되레 무학이 퇴보한다든가 하는 일은 강호에서는 꽤나 비일비재한 일이다.
하지만 아예 무학이 사라지다니. 이럴 수가 있나!
아무리 윗세대가 전멸했다지만! 비급이 남아 있고 역사가 남아 있는데 그걸 어디다 팔아먹은 게 아닌 다음에야 이게 말이나 되냐 이 말이다!
"끄으으으응!"
청명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거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해?"
총체적인 난국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사형. 이런데도 내가 화산을 살려야 합니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자 사형이 빙긋 웃는 것 같다.
- 까라면 까, 인마.
"에라이!"
바닥에서 흙을 한 줌 쥐고 하늘로 던져 버린 청명이 씩씩거리며 백매관으로 향했다.
"아이고. 허리야."
마보를 너무 해서인지 허리가 다 아프다.
망할. 잡담 좀 했다고 수련이 끝나도록 마보를 시켜 대다니. 그가 아직 전생의 몸으로 살아 있었으면, 발짓 하나에 화산 아래서부터 화산 정상까지를 왕복해야 했을 놈들이!
하기야, 너무 무른 것보다는 낫지만.
'슬슬 마음이 좀 급해지네.'
청명이 입맛을 다셨다.
일단은 화산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파악해 보고, 어디서부터 고쳐 나갈지 고민해 볼 작정이었지만, 화산을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앞길이 구만 리에 첩첩산중이다.
차라리 청명이 과거 자신의 육체와 신분을 그대로 가진 채 지금 이 시대로 넘어왔다면 일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그냥 다짜고짜 장문인의 머리통을 내려치고 뒤집어엎어 버리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지금 청명의 신분은 삼대제자의 말석이다. 그것도 거지 출신의. 게다가 무학은 보잘것없는 수준에 불과하다.
이런 위치에서 화산을 바꿔 나갈 수 있을까?
"후우우우우."
생각만 해도 한숨부터 나온다.
물론 시간을 들여 천천히 바꾼다면, 어떻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청명이 그리 느긋한 성격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 돌아가는 꼴을 계속 보고 있다가는 화산이 바뀌기 전에 그가 화병으로 앓아누울 판이다.
'무당이고, 청성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발전하고 있을 건데.'
대체적으로 무파들은 '종사'라 불리는 개파조사의 무학을 재현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하지만 청명의 생각은 달랐다.
세상은 결국 발전하기 마련이다. 아무리 조사들이 천재 중의 천재였다고는 하나, 수많은 범재가 천재의 업적을 잇고 연구하다 보면 결국에는 천재의 경지를 뛰어넘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자면, 세월이 흐름에 따라 결국 무학은 발전하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소림의 비전무학이라 불리는 역근경이라고 해서 육조 혜능이 처음 창안한 역근경이 그대로 전수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후인들이 새로운 해석을 내고, 모자란 점을 보완하며 지금 이 시간에도 발전하고 있다.
그래, 발전…….
"남들은 이 시간에 발전하고 있는데, 발전은커녕 있는 것도 까먹고 있다니."
그러니 어찌 속이 뒤집어지지 않겠는가?
청명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일단은…….
꼬르르륵.
"……."
청명이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쯧."
거지로 살아온 기간이 길어서 그런지 이놈의 몸뚱어리는 한시가 멀다 하고 밥 타령이다.
'그러고 보면 저녁을 먹지 못했구나.'
다른 놈들을 다 수련을 마치고 밥을 먹으러 갔는데 청명은 벌을 받느라 먹지 못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벌에는 금식만 한 게 없다. 수련을 마치고 허기진 몸에 곡기를 밀어 넣지 못하는 것만큼 짜증 나는 일은 흔치 않으니까.
청명은 주린 배를 부여잡고 백매관 안으로 들어섰다. 일단은 오늘 일을 조금 정리해야…….
"저기 온다."
안으로 들어간 청명은 자신을 향한 열렬한 환대에 살짝 눈을 치켜떴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거대한 거실에 몇십 명의 삼대제자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야, 신입!"
청명의 시선이 힘없이 그들을 향한다.
"구면이지?"
아걸이라 불리던 녀석이었다. 얼굴에 더덕더덕 붙은 심통을 보니, 좋은 의도로 기다리고 있던 것 같지는 않았다.
한숨을 푹 내쉰 청명이 아걸을 보며 입을 열었다.
"왜, 아걸?"
아걸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이 자식이 미쳤나! 조걸(趙傑) 사형이라 불러라!"
"사형이라……."
청명의 고개가 천장으로 향한다. 오래된 목조건물의 낡은 천장을 보고 있으니 괜스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 내가 이제는 이 조막만 한 것들을 사형이라 불러야 할 처지구나.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억울하면 일찍 왔어야지.
"네에, 네에. 조걸 사형. 그래서 무슨 일이십니까?"
"새로 왔으면 신고식을 해야지."
"예?"
"걱정하지 마. 심하게는 안 할 테니까. 보아하니 말라비틀어진 게, 세게 때리면 죽을까 봐 겁난다."
사방에서 웃음에 터졌다. 다들 좋아하는 모양새가 이런 일들을 여러 번 해 본 모양이다.
뭐, 이해한다.
단체생활이라는 게 그런 거지. 나름의 신고식을 통해서 유대감도 강화하고 서로 안면도 익히고. 지금 주변에서 낄낄대고 있는 녀석들도 거의 다 이 신고식을 거쳤을 것이다.
'질이 좀 나빠 보이기는 하지만.'
신고식이 불만인 게 아니라 이놈들의 태도가 좀 거슬린다. 나름 도관에 적을 둔 놈들이 시정잡배처럼 낄낄대다니.
물론 청명이 화산에 처음 입문했을 때도 조금 경박한 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놈들처럼 굴지는 않았다.
응? 꼰대가 하는 말이라고?
어쩌라고! 내 나이가 팔순인데!
"신고식이라."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이 녀석들의 요구를 맞춰 주고, 녹아드는 게 중요하겠지.
배알 꼴리지만 뭘 어쩌겠는가? 이게 다 화산을 살리기 위한 방법 중 하난데.
"그래. 뭘 하면 됩니까?"
조걸이 피식 웃었다.
"대사형."
"그래."
"대사형이 하시겠습니까?"
대사형?
청명이 고개를 돌려 대사형이라 불린 녀석을 보았다. 다른 녀석들보다 한 뼘은 큰 것이, 확실히 나이가 많아 보인다.
저 녀석이 삼대제자 중 장문이라는 거군.
"네가 알아서 하거라."
"네, 그럼."
청명의 머리에서 순식간에 서열 정리가 끝났다.
'저 녀석이 장문이지만, 실세는 조걸이로군.'
예전의 그의 배분 때도 그랬다. 장문사형이 장문인으로서의 명분을 가지긴 했으나, 실제로 문제가 있을 때 해결하는 건 청명이었으니까. 장문의 자리와 실세는 동일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잘 굴려서…….
"벗어."
"……네?"
청명의 고개가 모로 꺾였다.
뭘 잘못 들었나?
"벗으라고."
"……."
청명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백매관을 채우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다들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명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조걸에게 향했다.
"……내가 아무래도 잘못 이해한 것 같은데……. 아니, 같은데요."
청명이 억지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흥분하지 말자.
화내지 말자.
이 새파란 것들에게 화내면 똑같은 놈 되는 거다.
"버, 벗어요?"
"응."
조걸이 사악하게 웃었다.
"원래 남자들끼리는 그러면서 친해지는 거지. 자, 홀랑 벗어 봐. 벗고 춤추고, 좀 얻어맞다 보면 사형들에 대한 애정이 새록새록 솟아날 테니까."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귀까지 닿을 정도로 치솟았다.
"믄저."
"응?"
"흐느만 무꼬 스픈데여."
아, 발음이 제대로 안 나온다.
헛기침을 해 입 근육을 푼 청명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운검 사숙조께서는?"
"관주님은 저녁에는 수련을 하신다. 그러니까 관주님이 도와주실 거란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지금 여기는 우리밖에 없어."
"그렇군요."
청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설사 관주님이 계시다고 해도 오늘만 무사할 뿐이지. 이제 너는 앞으로 여기서 살아야 하는데,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지. 나는 이제 앞으로 여기서 살아야 하지.
고맙다.
내가 생각을 좀 잘못 했네.
"그럼 여기에 사숙조들은 없다는 말이죠?"
"이 새끼가 자꾸 입 터네. 안 되겠다. 너 일단 좀 맞고 시작하자. 안 그래도 너 마음에 안 들었어."
조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청명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일단 좀 맞다 보면 사형들에 대한 존경심이 생겨날 거다. 내가 너를 싫어해서 이러는 게 아니야. 삐뚤어진 사제를 바른길로 인도하기 위해 사랑의 매를 드는 거지. 알겠어?"
"사형."
"뭐? 할 말 남았어?"
"목에 힘줘요."
"응?"
그 순간 청명의 주먹이 조걸의 아래턱을 그대로 올려쳤다.
쾅!
뭔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조걸의 몸이 그대로 천장으로 솟구쳤다.
쿠직!
그러고는 낡은 천장을 뚫고 들어간다.
대롱대롱.
목 위가 아주 천장에 박혀 버린 조걸의 몸이 가만히 흔들린다.
가만히. 아주 가만히.
그 광경을 본 삼대제자들의 눈이 툭 튀어나왔다.
"……."
"……."
천장에 박혀 버린 조걸을 일별한 청명이 그대로 몸을 돌려서 문으로 다가갔다.
"어, 어디 가……."
덜컹!
걸쇠를 들어 문을 잠근 청명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사람이 살다 보면 말이지."
"……."
"이것저것 고민이 될 때가 있어. 그중에서 가장 사람을 골치 아프게 하는 고민은, 대체 뭐부터 해야 할지에 대한 거지. 그런데……."
우드득. 우드득.
청명의 고개가 좌우로 꺾인다.
"너희 덕분에 생각이 무척이나 간명해졌어. 그래, 주변부터 정리하는 게 먼저지."
청명이 다리를 들어 옆에 있는 의자를 내리밟았다. 나무로 만든 의자가 산산조각이 난다. 청명은 그중 가장 멀쩡한 의자 다리를 움켜잡았다.
"후우우우."
그리고 이를 빠득빠득 갈면서 말했다.
"내가 그래도 나름 도관에서 먹고 자란 몸이라 윗사람을 대하는 예의는 있거든?"
그 말에 아이들의 눈에 희망이 피어났다.
윗사람…….
"사숙조님들께서 들으시면 심란할 테니까. 절대 비명 지르지 마라. 비명 지르는 새끼는 두 배로 팰 테니까."
아…….
우린 윗사람이 아니었구나.
그럼 그렇지.
"일단 맞고 시작하자. 사형 새끼들아!"
청명이 귀신이 되어 삼대제자들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