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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화 (10/1,567)

11화. 파산이 가당키나 하냐, 이놈들아! (1)

"한데."

"음?"

운검이 고개를 내려 그의 옆에서 걷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꽤나 맹랑한 녀석이군.'

새로운 환경에 놓인 이는 응당 경계심을 가지기 마련이다.

어린 나이에 화산이란 생소한 곳에 들어왔으면 잔뜩 겁을 먹는 게 정상이건만, 이 녀석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다.

터덜터덜 걷는 걸음걸이에는 긴장이 아니라 귀찮음이 묻어난다.

운검이 묘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때 청명이 불쑥 물었다.

"백매관이라는 곳은 언제 생긴 건가요?"

"그건 왜 궁금하더냐?"

"보통 무파에서는 사제관계를 맺어 가르친다고 들었거든요."

"흐음."

"그런데 다들 저런 곳에 모여 있으니 조금 이상해서요."

운검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아픈 곳을 찌르는군.'

전통적으로는 화산 역시 사제관계를 통한 전수를 원칙으로 삼았다. 새로 입문한 아이는 윗 배분의 스승과 맺어지고, 스승은 화산의 율법을 엄수하며 제자를 가르친다.

그런 일련의 사제관계들이 모여 화산이라는 거대한 문파를 만들어 냈다.

이런 사제의 법칙이 깨진 것은 다름 아닌 화산의 몰락 때문이다.

"이상할 것 없다. 그게 더 효율적이라 생각했을 뿐이니까."

"그럼 사숙조께서도 백매관에 묵으시나요?"

"……아니."

청명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에 운검이 눈을 찌푸린다.

'이상한 녀석이군.'

이런 대답에서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청명은 지금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대체 무엇을 납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기본적으로 화산에 처음 입문한 이들은 모두가 백매관으로 보내진다. 다시 말하자면 백매관주의 역할을 맡고 있는 운검은 화산의 새 제자들을 가장 먼저 파악하는 이라는 뜻이다.

적지 않은 아이들을 봐 왔지만, 이 아이에게서는 그동안의 아이들과 다른 것이 느껴진다. 뭐라 해야 할까?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이답지 않은 여유로움?

'재미있는 녀석이 들어왔군.'

운검이 천천히 청명을 탐색하는 동안 청명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망갔네.'

대충 상황이 짐작이 간다.

화산을 전체적으로 돌아보면 사람이 터무니없이 적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다. 그가 십만대산으로 돌진하던 당시에 남아 있던 삼대제자의 수를 생각해 보면 어마어마할 정도로 수가 빠졌다.

그 수만 유지되었더라도 화산이 이렇게 텅텅 비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 많은 놈들이 싸그리 다 화산을 나갔다는 거지.'

단숨에 수가 줄어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가라앉는 배에서는 반드시 탈출하는 사람이 나오는 법. 하나둘 화산을 버리고 떠나다 보면 결국 가르칠 사람이 부족해지기 마련이다.

그나마 제자를 받지 않은 이들이 떠나면 괜찮다. 하지만 나름 화산에 오래 적을 두어 제자까지 기르고 있던 이들이 화산을 등져 버리면 남은 제자들은 갈 데가 없어진다. 다른 스승이 대신 맡아 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러다보니 고육지책으로 이런 체계가 나왔을 것이다. 아이들을 한곳으로 몰아 단체로 가르치다 보면 스승의 수가 줄어드는 것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니까.

"쩝."

청명이 입맛을 다셨다.

'아무려면 어때?'

과거와 달라졌다는 것은 비난할 일이 아니다. 청명은 꽉 막힌 장문사형과는 다르게 실리주의자였다. 전통에 집착하는 것보다 결과를 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백매관을 만들어서 화산을 유지할 방편을 얻었다면 그걸로 좋다. 조금 씁쓸한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백매관을 만들어야 했던 아이들의 가슴은 더 찢어졌겠지.'

그 심정을 짐작할 수 있기에 조금은 우울해지는 청명이었다.

'아냐.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우울해하는 것은 다른 이들로 충분하다. 청명이 할 일은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화산을 다시 과거의 대문파로 만드는 것이었다.

'삼 연무장이로군.'

눈앞에 삼 연무장의 모습이 펼쳐졌다. 커다란 공터의 상단에 높은 단상이 만들어져 있었고, 그 앞을 작은 아이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오?'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보다 삼대제자들의 수가 조금 되는 것 같다. 과거에 비한다면 한 줌이라고 표현해도 과하지 않은 수였지만, 지금 화산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제자는 꽤 많이 받은 모양이다.

"전 검!"

"타아아앗!"

구령과 함께 검이 일제히 앞으로 겨누어진다.

'오?'

청명이 신기하다는 듯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화산은 꽤나 자유분방한 문파다. 속가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그 이유는 도가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제자들에게 도가의 가르침을 강요하는 것 역시 도에 어긋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덕분에 화산에서는 이런 대규모의 수련 장면을 볼 일이 잘 없었다. 소속감은 가지지만 서로의 다름을 존중한다. 그게 청명이 알고 있는 화산이었다.

'신기하네.'

그런 화산에서 백이 넘는 이들이 일제히 같은 검식을 익히는 장면은 확실히 흥미롭다.

청명만 해도 칠성검진(七星劍陣)을 익히기 위해 사형제들과 검을 맞춰 본 경험 외에는 이런 식의 수련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칠성검진이라 해 봐야 겨우 일곱이서 펼치는 검진이 아니던가.

"배검!"

촤아아악!

백여 개의 검이 일제히 뒤집히며 빛을 발한다.

청명이 그 광경을 보며 감탄을 터뜨렸다.

"와아……."

"신기하더냐?"

"……."

운검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피어났다.

"놀랄 것 없다. 열심히 수련한다면 너도 곧 저 아이들처럼 될 수 있을 것이다."

"……눼."

청명의 대답이 살짝 이상하게 나왔지만, 운검은 감탄한 청명이 눈앞의 광경에 시선을 빼앗겨 그런 줄로만 알고 오히려 흐뭇해했다.

물론 청명의 생각은 정반대였지만.

'저거 뭐 하는 거지?'

가면 갈수록 청명의 눈이 좁아진다.

"전 일검!"

도복을 입을 아이들이 일제히 한 발 앞으로 빠르게 뛰쳐나가 전방으로 검을 찌른다. 아이답지 않은 정확한 검초, 그리고 강맹한 검초였다.

"저……."

"응?"

"저거 무슨 검인가요?"

"그게 무슨 말이냐?"

"아……. 검법이."

운검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을 해 주었다.

"지금 네 사형들이 펼치고 있는 검법은 육합검(六合劍)이라 한다."

"유, 육합이요?"

"그렇다. 정확하게는 진육합검(眞六合劍)이라 해야겠지. 화산에 전승되어 오던 육합검을 선사들께서 좀 더 실전적으로 바꾼 검술이다. 모든 화산 무공의 기초가 되는 검이지."

"……."

"익히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정진한다면 반드시 결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너도 저 뒤로 가 함께 서도록 해라. 처음이라 어색하겠지만, 오늘은 분위기를 익힌다고 생각하거라. 자세한 전수는 이 주 내에 이뤄질 것이다."

청명이 혼이 빠진 얼굴로 뒤쪽으로 걸어갔다.

'겁을 먹은 모양이로군.'

그 모습을 보며 운검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요즘 아이들은 패기가 없다니까.'

하기야…….

운검이 슬쩍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어린 녀석이 진검(眞劍)을 들고 수련하는 사형들의 모습을 보고 겁을 집어먹지 않는 게 더 이상하기는 하다. 입문하면서부터 천하제일고수를 운운하는 겁 없는 아이들도 진검을 보는 순간 손끝부터 덜덜 떨리기 마련이니까.

곧 익숙해지겠지만, 아무래도 저 아이에게는 크게 기대를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뒷자리에 선 청명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야. 이 미친놈들.'

실전적?

실저어어언저어어억?

에라, 이 똥물에 빠뜨릴 것들!

입문 무공이 무엇이던가?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나 다름없는 아이들에게 무학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무공이 바로 입문 무공이다. 서당으로 치자면 천자문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학문을 빠르게 가르치겠답시고, 논어를 들고 천자문을 가르치면 어떻게 되겠는가?

잠깐은 앞서 가겠지. 아주 잠깐은. 다른 애들은 알지도 못하는 논어를 읊어 댈 수야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아이들이 논어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건 아이들을 망치는 짓이다.

'아니. 뭐 좋다 이거야.'

그만큼 급하니까 이런 편법을 쓸 수도 있겠지. 논어까지는 너무 나갔다. 지금 저 아이들이 펼치는 육합에 담긴 실전의 묘리가 그만큼 심오한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러려면 가르치는 꼴이라도 그럴싸하든가."

"엥?"

"음?"

생각이 입으로 튀어나왔는지 주변 아이들이 일제히 청명을 돌아본다. 청명이 멍한 눈으로 자신에게 쏠린 시선들을 보다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아이들이 모두 의혹에 찬 눈으로 청명을 보았다.

그때 단상에 선 이대제자가 크게 호통을 친다.

"수련 중에 어디 한눈을 파는 것이냐!"

"헛!"

"죄, 죄송합니다."

"한눈판 놈들 다들 마보(馬步)!"

"끄으으응."

"어휴!"

아이들이 앓는 소리를 하며 마보 자세를 취한다. 검을 양손 위에 올리고 무릎을 굽힌다. 청명이 그 꼴을 보며 혀를 찼다.

그러자 이대제자의 시선이 이번엔 청명에게 꽂힌다.

"너는?"

"예?"

"너는 왜 마보를 하지 않느냐?"

"저는 한눈 안 팔았는데요?"

"……."

"……."

이대제자가 눈을 부라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다.

"계속한다! 배검!"

구령이 계속 떨어졌다.

청명은 단상 위에서 시범을 보이는 이대제자의 모습을 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참 푸르기도 하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화산의 미래를 보는 것만 같다.

'이걸 뭘 어떻게 바꿔야 하지?'

홀로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에게는 깊은 경험이 있고, 앞으로 펼쳐진 긴 미래가 있으니까. 오히려 천하제일인이 되지 못하는 게 더 어렵다.

하지만 화산은 아니다.

돈은 없지. 사람도 없지. 무학은 개판으로 박살이 나 있지. 삼대제자라는 신분으로 화산을 바꾸는 건 지렁이가 용이 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하아……."

그때 그의 귓가에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야."

"……응?"

"너 신입이지?"

"……."

같은 삼대제자끼리 신입이라니. 이노무 문파는 어디까지 망가진 건가?

"그런데?"

"너 이따가 보자. 가만 안 둔다."

청명이 입맛을 다셨다.

"다 좋은데, 하나만 물어보자."

"이게 미쳤나? 주제를 모르고 반말이야?"

"알았으니까. 대답부터 해 봐. 그럼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줄 테니까."

"뭐?"

"여기서 이거 말고 또 뭐 배우냐?"

"이거?"

"그 육합인가 뭔가 하는 거."

"진육합검을 배우고 나서는, 칠현검을 배운다. 그 뒤에는 백매관을 졸업해서 소청검법을 배우게 된다."

"소청?"

"그래. 그 다음에는 화산 무학의 정화라고 할 수 있는 태을미리검(太乙迷離劍)을 배울 수 있게 된다."

"……태을미리검?"

"그래!"

"태을미리?"

청명의 눈썹이 제멋대로 꿈틀대기 시작했다.

아니지.

아니겠지.

설마.

"하, 하나만 더 묻겠는데."

"뭐?"

"이, 이십사수매화검법은 언제 익히는데?"

"……그게 뭔데?"

"이십사수매화검법! 화산의 정화인 이십사수매화검법 말이다!"

대답을 해 주던 아이가 눈을 찌푸렸다.

"뭐라는 거야. 화산에는 그런 검법이 없어."

"……없다고?"

"그래. 생전 처음 들어 본다."

"끄륵."

입에서 괴이한 소리가 흘러 나간다.

"이, 이십사수매화검법이 없어? 그리고 그걸 익혀야 할 놈들이 태, 태을미리검을 익힌다고?"

청명의 눈에 핏발이 섰다.

- 사제. 이 태을미리검은 도가적인 성향이 너무 적고 위력도 약하네. 이쯤 되면 화산 무학에서 완전히 없애 버려도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어찌 생각하는가?

- 도저히 못 써먹을 검법입니다. 과감하게 버리시죠.

- 그래도 선인이 남긴 것이라…….

- 그럼 괜스레 아이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게, 서관에서 빼 버리시는 건 어떻습니까?

- 흐음. 그게 좋겠군. 그렇게 하지.

'사형.'

애들이 태을미리검을 익힌답니다. 사형.

에라, 씨바. 화산 재건은 얼어 죽을. 화산 재건하기 전에 내가 화병으로 쓰러지게 생겼네. 내가!

"누가 또 떠드느냐! 네놈들 당장 이리 앞으로 나와라!"

"아, 씨. 너 이따 보자! 진짜!"

"……."

청명의 이마에 거대한 핏대가 솟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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