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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0화 (9/1,567)

10화. 세상에, 화산이 망하네. (5)

"아이는?"

"처소에 보내 환복시켰습니다. 바로 입관식만 진행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운암의 시선이 발치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본 현종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탐탁지 않은 모양이구나."

"탐탁지 않다기보다는……."

조금 머뭇거리던 운암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제가 장문인의 깊은 의중을 모두 알 수는 없으나. 왜 굳이 저 아이를 받아들이신 건지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지금 화산은 한 사람의 입이라도 줄여야 할 때입니다."

"그래. 그러하지."

"다른 아이들처럼 재물을 가져온 것도 아니고, 무학에 대한 특별한 재능이 보이지도 않습니다."

"으음."

"무엇보다 선기(善氣)가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도문과는 맞지 않는 아이로 보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저 아이를 화산의 적에 올리시려 하는 것이옵니까?"

운암의 지적에 현종은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그러하더냐?"

"……장문인."

운암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때때로 현종은 이리 의뭉스러울 때가 있다.

'알 수가 없구나.'

십 년을 훨씬 넘는 기간 동안 현종을 보좌해 왔지만, 여전히 그의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운암이었다. 그가 넘보기에 현종은 너무도 깊은 사람이다.

"운암아."

"예, 장문인."

"인연이라는 것은 때로는 예기치 않게 찾아오기 마련이다."

현종이 빙그레 웃었다.

"어쩌면 그 아이가 화산의 빛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 아이는 화산의 빛이 되기에는 너무 어립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현종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화산의 현 상태는 그야말로 풍전등화라고 할 수 있다. 힘겹게 버티고는 있지만 당장 망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운암이 청명을 들이는 것을 껄끄러워하는 데에는 이러한 이유도 있었다.

당장 내일 망할지도 모르는 문파에 적을 두었다가 거리로 내몰리게 되면 그 상실감이 얼마나 클 것인가?

"상황이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다."

현종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운암아. 매화는 눈 속에서도 피기 마련이란다. 혹독한 추위 속에 피어난 매화는 그 어떤 매화보다 그윽한 향을 풍기기 마련이지."

"……."

"겨울이 왔다고 씨를 심지 않는다면 눈 속에서 매화가 피어날 가능성마저 사라지지 않겠느냐."

"……예."

"그래. 나가 보거라."

운암은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현종과 대화를 하고 나올 때마다 그는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현종과 대화를 하고 나왔음에도 가슴이 시원해지기는커녕 되레 답답해지는 느낌이었다. 현종의 말에 어린 현기(玄機)는 여전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마음이 어지러운 것은 화산이 지금 처해 있는 상황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화산은 자력으로는 구제가 불가능했다.

현종이 평생에 걸쳐 노력했지만, 상황은 나빠지기만 했다. 이대로 간다면 올해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화산이 완전히 멸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절로 가슴이 갑갑해지고 한숨이 새어 나왔다.

'화산은 어디로 가는가?'

운암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 * *

청명은 멍하니 고개를 내려 자신이 입은 옷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무복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 가슴에 다섯 송이의 매화를 새겨 넣은 무복을 보고 있으니 묘한 감회가 든다. 마치 전신이 간질간질한 것 같은 느낌이…….

"아니, 진짜 간지러운 거네, 이거."

옷의 재질이 워낙 나빠서 살에 닿을 때마다 쿡쿡 찌르는 느낌이 든다. 이곳으로 오기까지 넝마를 입어 보지 않았더라면 적응할 수 없어 굉장히 불편했을 것이다. 거지로 산 한 달이 이런 면에선 도움이 되었다.

"쯧."

청명이 눈을 찌푸렸다.

"가지가지 한다."

과거 화산이 무당이나 소림처럼 돈이 넘쳐나는 문파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구파일방으로서 막대한 재물을 긁어모았었다.

물론 도사가 재물에 탐을 내는 것만큼 웃긴 일도 없다는 장문사형의 지론으로 그 돈을 마음껏 써 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제자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것을 먹일 정도로는 충분했다.

그런데 옷 꼬락서니 하고는…….

"그런데 이놈들은 그 돈을 다 어떻게 한 거야?"

금고에 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을 텐데!

아니, 금고에 있는 돈이야 그렇다 치고. 회음에 화산이 가지고 있는 주루와 영업장만 해도 몇 갠데, 그 돈은 다 어디다 팔아먹었기에 애들에게 이런 거적때기를 입힌단 말인가.

무공이야 제대로 전수하지 못했으니 개판이 날 수 있다고 쳐도, 있던 돈까지 날려 먹은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구석이 없구만."

아서라. 생각을 계속할수록 머리만 아프다.

기대하면 실망만 커지는 법.

"여하튼 입문은 했네."

입문은 했다. 입문은.

천하의 매화검존이 화산의 막내로 입문하는 최악의 불상사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어쨌건 입문한 게 어딘가?

청명이 원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화산에 들어오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이제부터 풀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지만,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아니겠는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고 한들 차근차근 풀어 나가면 못 할 것이 없다. 세상 대부분의 일은 사람을 죽어라고 굴리고 또 굴리면 풀리기 마련인데…….

"근데 여긴 대체 어디야?"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지금 청명이 들어와 있는 전각은 과거에 객청으로 쓰던 곳이다. 그런데 그동안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과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숙소처럼 변해 버렸다.

청명의 기억대로라면 화산에는 이런 숙소의 개념이 없다. 새로 입문한 이들은 즉시 스승과 사제지연을 맺고 스승의 처소에서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럼 여긴 대체 뭐하는 덴가?

'사제지연을 맺기 전에 잠시 머무르는 곳이라 보기에도 이상하고.'

그런 곳치고는 기본적인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건 사람이 살라고 만들어 놓은 곳이다.

'여기 나만 있나?'

청명이 슬그머니 방 밖으로 나왔다.

좁은 복도를 중심으로 좌우로 방이 쫘르륵 늘어서 있었다. 과거 객청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청명은 옆방의 문을 열어 보았다. 방 안에 옷가지와 여러 가지 생활 도구들이 보인다.

'여기에 누가 살고 있다는 건데.'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굳이 이런 객청에 사는 사람이…….

"누구야?"

청명이 고개를 돌렸다.

'헐.'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다니! 이런 실수를.

'아. 나 지금 무공 없지?'

화산으로 오면서도 오로지 그놈의 육합공만 죽어라고 익혔다. 덕분에 몸은 더할 나위 없이 튼튼해지는 중이고, 바닥에 쌓은 기초는 광활한 대지가 되어 가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지금 당장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손톱만큼 모인 내공이 전부였다.

존재한다와 존재하지 않는다의 그 미묘한 선에 걸쳐 있는 내공량으로는 과거의 청명과 같은 감각을 유지할 수 없다.

"이 새끼가 누군데 남의 방을 훔쳐보고 있어. 도둑놈이냐?"

입이 좀 험하네.

청명의 또래로 보이는 아이였다. 아이가 소리를 지르자 계단으로 몇몇의 애들이 우르르 올라온다.

"뭐야?"

"조걸! 왜 그래?"

조걸이라 불린 아이가 청명을 가리키며 삿대질을 한다.

"이 새끼가 내 방을 훔쳐보고 있었어."

"얜 누구야?"

"새로 들어온 놈 같은데?"

청명의 시선이 복도의 천장으로 향했다.

'왜 살아나 가지고.'

이런 험한 꼴을 보는가.

새파란 어린놈들이 삿대질을 해 대는 꼴을 보는 것도 속이 뒤집어질 일인데, 보아하니 이놈들은 청자 배들 같았다. 배분으로 따지자면 청명이 이놈들의 고조할애비뻘이다.

물론 모르니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도문에 적을 뒀다는 놈들이 동네 왈패가 겁박하듯 입을 놀리는 걸 어찌 이해해야 하는가? 대체 어디부터 어떻게 이놈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하는가를 고민하던 때였다.

"웬 소란이냐!"

"헉!"

"운검 사숙조!"

아래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아이들이 좌우로 물러난다. 계단으로 한 사내가 올라오더니 눈을 찌푸렸다.

꼬장꼬장함이 그 얼굴과 몸짓에 묻어난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엄정함이 절로 느껴졌다.

운검이라 불린 이가 검(劍)이라는 도호(道呼)에 걸맞게 날카로운 눈으로 모두를 한번 훑어보았다.

"한창 수련을 해야 할 시간에 왜 관에 돌아와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누가 게으름을 피워도 된다고 했느냐?"

"그, 그게 아니라…… 무복이 더러워져 갈아입을 무복을 가지러 왔습니다."

"어디서 변명이냐!"

"죄송합니다."

아이들이 기겁을 하여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 와중에도 청명을 힐끔거리는 건 포기하지 못했다.

"너는?"

"청명이라 합니다."

"네가 오늘부터 새로 백매관에 들어온 아이구나."

"백매관(白梅館)이요?"

"여기가 백매관이다. 화산 삼대제자들이 거하는 합숙소지. 듣지 못하였느냐?"

"……합숙소요?"

사내가 눈을 찌푸렸다.

"사문의 존장이 질문을 하면 되묻기 전에 대답부터 하는 것이 예의인 것을 모르더냐?"

"아, 네. 죄송합니다."

존장. 존장이라.

……젠장.

새삼 마음이 허허로워졌다. 그가 화산을 종횡할 당시에 화산에 입문도 하지 않았던 애들을 이제 존장으로 모셔야 한다.

'이게 무소유구나.'

진정한 도인이 되려면 직위와 체면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더니. 평생 참오 하고도 오르지 못한 경지를 이리 강제적으로 겪게 될 줄이야.

등선 하겠네. 진짜.

"너도 따라 나오너라."

"예?"

"늦든 빠르든 수련은 해야 한다. 하루 정도 빨라진다고 다를 건 없겠지. 하릴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수행인이 할 일은 아니다."

그 말에는 청명도 공감했다.

이 끔찍한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는 청명도 하루라도 빨리 강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련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과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문제는 이들이 그에게 가르치려는 것은 청명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기초 무학이란 점이다.

'내가 너를 가르쳐야 할 판인데.'

"내려오너라."

사내가 먼저 가 버리자 아이들이 우르르 사내를 따라간다. 그중 한 아이가 슬쩍 눈치를 보더니 청명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조걸이라 불린 녀석이었다.

"너 밤에 보자."

"……."

"버르장머리를 고쳐 줄 테니까."

"……그래, 그래."

"도망가면 더 맞을 줄 알아."

"오냐, 오냐."

"이게 진짜!"

"뭐 하느냐!"

운검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아이가 기겁을 하여 소리쳤다.

"지, 지금 갑니다. 사숙조!"

앞으로 달려가는 아이를 보며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예뻐해 줘야지."

그래도 귀여운 사문의 후인들인데.

물론 청명이 아이들을 예뻐하는 방식은 다른 이들과 조금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뭐.

"그건 지들 사정이고."

피식 웃은 청명이 아래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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