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세상에, 화산이 망하네. (4)
"어딜 갔다 오는 겐가?"
"잠시 구경을 좀."
"……구경?"
운암이 미심쩍은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청명은 운암이 무슨 눈으로 보건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짝다리를 짚고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아이가 원래 이런 분위기였나?'
분명 산문에 처음 접어들 때까지는 꽤나 예의 바르고 공손한 아이 같았는데, 지금은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뭐라고 할까?
불량한 기운이 넘친다고 해야 하나?
'하기야.'
행색을 보아하니 거지로 꽤나 오래 살아온 것 같은데, 이 험한 세상에 거지 아이에게 순수함을 바란다는 건 무리였다.
"식사는 하셨는가?"
"배가 고프지 않아서."
이건 진심이었다.
화산의 꼬라지를 보고 있으니, 허기고 뭐고 오욕칠정이 다 사라지는 느낌이다. 도사일 때도 극복하지 못했던 허허로움을 도명도 받지 못한 지금 이렇게 극복해 버리다니. 이런 빌어먹을.
"그렇다면 잠시 따라오게나."
"예?"
"장문인께서 자네를 보고 싶어 하시네."
"아, 네."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겪는 쪽이 낫다.
문을 연 순간 청명의 시야에 고요하게 정좌를 한 노인이 들어왔다. 청명은 조금 떨떠름한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장문인이라 불릴 만은 하지만.'
느껴지는 청아한 도기(道氣).
그 도기만으로도 이 사람이 평생을 도가에 몸을 담아 왔다는 것을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패기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느껴지지 않는군.'
어느 도관의 장문이라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화산이라는 무파의 장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저 청아하다.
"인사드려라."
"……."
청명이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 이렇게 억울할 데가 있나.'
아마 나이로 따져 보자면 청명이 화산 구석에서 장문사형의 눈을 피해 술을 퍼먹고 있을 때, 이 장문인이란 녀석은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는 아이였을 것이다. 그가 죽을 때쯤에야 겨우 검이나 잡을 줄 알았겠지.
그런데 이제는 되레 청명이 인사를 해야 하는 입장이라니.
'억울하면 다시 태어나지 말았어야지.'
어쩌겠는가? 앓느니 죽지.
청명이 공손하게 절을 했다. 그 광경을 보며 화산장문 현종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청명이라 합니다."
"본 도는 현종이라 하네."
간소한 예의였다.
청명이 정좌하자 현종이 입을 열었다.
"객이 왔건만 마땅히 대접할 것이 없네. 현재 이곳의 상황이 그러하니 이해해 주길 바라네."
"아, 네."
"……."
현종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보통 이런 말을 건네면, 돌아오는 대답은
'괘념치 마십시오.'
라든가
'불청객이 어찌 그런 것을 바라겠습니까?'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놈은
'그런 것 기대도 하지 않았으니, 신경 쓰지 마쇼.'
라는 말을 눈짓과 몸짓으로 하고 있었다.
"옥천원에서 재미있는 말을 했다고 하던데."
"예?"
"팔아먹었다?"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정말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태도다. 현종이 눈을 가늘게 뜨며 청명의 안색을 살폈지만, 저 얼굴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 모르는 건가?'
아이가 저리 거짓말에 능숙할 리는 없고.
현종이 고민하는 동안 청명은 내심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 봐야 소용없다. 이놈아.'
청명이 누구던가.
천안통에 올랐다는 평을 듣던 청문을 상대로도 천연덕스럽게 사기를 치던 종자다. 장문사형은 매번 청명을 의심했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청명이 사내에 숨겨 놓은 술과 은신처를 찾아내지 못했다.
추궁을 받아도 태연하게 사기를 치는 청명을 보며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으니 일단 처맞자……. 아니, 이게 아니고 여하튼!
그런 청문조차 청명의 거짓을 간파하지 못했는데 현종이 청명의 표정과 몸짓을 보고 거짓을 알아챌 수는 없었다.
"그런 말을 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워낙 피곤하여 의식을 잃었다는 것밖에는……."
"으음."
논리는 완벽하다. 어린 몸을 이끌고 이 험한 화산을 올랐으니 몸이 한계에 달했을 것이다. 그러니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다만…….
"그리 피곤했으면 말을 하지 그러셨는가."
"도문에 들어왔으면 상제께 예를 올리는 것이 우선이라 하여……."
현종이 묘한 눈으로 운암을 돌아보았다.
운암이 찔끔했다.
현종의 눈이
'애가 여기까지 혼자 올라왔다는데, 피곤해 죽는 애를 굳이 거기까지 끌고 가서 절을 시켰냐? 이놈아?'
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물론 운암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아니 멀쩡했는데!'
분명 저놈은 산문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팔딱팔딱 신선한 생선 같았다. 그런데 피곤하여 쓰러졌다니! 이런 미치고 팔짝 뛸 일이 있나?
운암이 황당한 눈으로 청명을 보았지만, 청명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순진한 얼굴로 딴청만 피웠다.
"크흠."
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는 일이지. 신경 써 주지 못해 미안하다."
"아닙니다."
"그래. 그럼 다른 의문이 생기는데."
"예?"
"이 험한 산을 올라 굳이 여기까지 온 이유가 무엇인가?"
"……."
"그냥 와 봤다는 말은 말게나. 화산은 경험 삼아 오를 수 있는 산이 아닐세. 더구나 그 어린 몸으로 이 산을 오른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을 터."
청명이 고개를 들어 현종을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준비해 뒀다.
"장문인."
"듣고 있네."
"화산에 입문하고 싶습니다."
현종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입문?"
"예."
현종이 가만히 청명과 눈을 마주쳤다. 저 또랑또랑하고 정순한 눈에서는 다른 의도를 읽어 낼 수가 없었다.
"그 말인즉슨, 자네가 일부러 화산을 올랐다는 걸 인정한단 뜻인가?"
"그렇습니다."
"흐음."
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이 끝까지 우연히 들러 보았다 우겼다면 현종은 청명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화산은 그저 들러 볼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화산에 입문이라. 그렇다면 자네는 화산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다는 뜻인가?"
"예."
현종의 눈이 다시금 가늘어졌다.
"입문이라."
청명이 살짝 입술을 축였다.
'논리는 완벽하다.'
청진(靑津) 놈을 써먹으면 된다.
그의 사제인 청진은 그들이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기 전에 마교 놈들에게 쫓기다가 실종됐다. 말이 실종이지 전쟁 중에 죽는 건 실종이 아니라 사망이다.
'청진이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나무꾼이 청공을 발견해서 치료해 주고……. 하지만 부상이 너무 깊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는 못했는데 나무꾼에 대한 고마움으로 화산의 무학을 전수해 주고 제자로 삼았다.'
그리고 청명은 그 나무꾼의 후손이다!
'크으.'
기가 막힌 각본이다.
이 각본의 가장 좋은 점은 청명이 자신의 배분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다.
청진을 구해 준 나무꾼이 아버지라고 하면 청명은 명자 배가 된다. 백 년 전에 청년이었던 이가 아비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면이 있으니 한 배분을 내려 할아버지로 각본을 쓴다고 해도 현자 배가 된다.
즉 장문인과 동급의 배분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배분을 아무리 밀어 내도 생짜 신입으로 입문하는 것보다는 높은 배분을 받게 될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새파란 어린놈들이랑 같은 배분을 받을 수는 없지.'
본래의 배분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우대는 받아야 할 것 아닌가. 앞으로 이 새파란 놈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존장 대접을 해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속이 터질 노릇인데.
'자, 이제 이유를 물어봐라.'
그럼 내가 쓴 각본을 쫘악 풀어 주지. 그 와중에 청진 놈의 독문무학을 조금 풀어 주면 일사천리…….
"허락하겠네."
"네. 당연히 허락……. 네?"
청명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현종을 바라보았다.
그의 예상과는 달리 현종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입문을 원한다면 그렇게 해 주어야겠지."
"……네?"
아니. 잠깐만.
여기가 무슨 동네 애들 다니는 무관도 아니고 입문이 뭐가 이리 쉬워?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애가 와서 입문하겠다 하면 일단은 의심하는 게 정상 아니냐고!
"자, 장문인!"
운암도 같은 생각인지 화들짝 놀라 말했다.
"입문은 받지 않는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렇지! 그렇게 쉽게 받으면 안 되지!
"생각이 바뀌었다."
현종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생각해 보니 우리가 입문을 가릴 처지가 아니더구나. 더구나 화산을 알고 찾아온 아이를 그냥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지."
"하, 하지만……."
"운암아."
"예, 장문인."
"인연은 돌고 돌아 이어진다. 이 아이의 뜻이 무엇이든 화산의 이름을 알고 화산에 들기 위해 찾아온 아이다. 비를 피하겠다고 처마에 든 새는 쫓지 않는 법이고, 겨울에 굴을 찾아온 짐승에게는 먹을 것을 나눠 주는 법이지. 우리가 뭐 그리 아낄 것이 있다고 품에 들어온 이마저 내쫓겠느냐?"
선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발언이었다. 다른 이가 들었다면 감동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명은 선기나 도기와는 삼만 리쯤 떨어진 인간이었다. 저 말을 듣자마자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
'인연은 뭔 놈의 인연이야! 모르는 놈이 찾아왔으면 의심부터 좀 하라고!'
이런 인간이 어떻게 장문인이 됐지? 아니, 이런 인간이니까 장문인이 되었겠지. 장문인이라는 건 그런 자리니까.
"아, 아니 저는……."
청명이 수습에 나섰다.
"그 전에 제가 살아온……."
"괜찮단다."
현종이 고개를 저었다.
"네가 입산하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죄인의 삶을 살았든, 성인의 삶을 살았든, 그건 속세의 일에 불과하다. 화산에 오르고 화산에 귀의하는 순간 과거의 너는 사라지는 것이다."
물론 그렇겠지. 그런데 이게 이러면 안 되는데…….
"아, 아니……."
"괜찮다는데도 그러는구나."
인마! 내가 안 괜찮다고! 사람 말 좀 들어! 말 좀!
현종이 빙그레 웃었다.
"운암아."
"예, 장문인."
"이 아이에게 처소를 내어 주고 입관식 준비를 하거라."
"예. 준비하겠습니다."
"이름이 청명이라 했더냐?"
청명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이름이구나. 아주 좋은 이름이야. 청자 배가 될 아이의 이름이 청명이라. 허허. 이것 역시 인연이겠지. 도명을 따로 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너는 모르겠지만, 너의 이름은 화산에서는 무척 의미가 깊은 이름이다."
현종의 눈이 아련해졌다.
"그 이름에 걸맞은 이가 되어 주려무나."
상황이 여기까지 흘러 버리자 청명도 더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예."
"나가 보거라."
청명이 넋이 나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암 역시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이쪽으로."
"……."
터덜터덜 걸어 밖으로 나온 청명의 눈에 드넓은 화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입문은 했네.'
입문은.
그 순간 운암이 전보다는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근엄하게 말했다.
"아직 입관식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너는 화산의 제자다. 너는 청자 배가 될 것이고, 화산의 삼대제자 중 막내가 될 것이다."
"……막내."
청명의 얼굴이 부르르 떨렸다.
막내?
내가?
이 매화검선 청명이 화산의 막내라고?
"허허허허허허."
웃음을 흘리는 청명을 보며 운암이 흐뭇하게 웃었다.
"좋은가 보구나."
"예. 너무 좋습니다. 허허허허허허허."
그런데 왜 자꾸 눈물이 나지?
……망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