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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8화 (7/1,567)

8화. 세상에, 화산이 망하네. (3)

당금 화산의 장문인인 현종(玄從)진인이 묘한 얼굴로 운암을 바라보았다.

"이곳까지 홀로 올라왔다는 말이더냐?"

"예."

"그리고는 옥천원에서 정신을 잃었다고?"

"예. 행색이 남루하기 짝이 없는 걸 보니 잘 먹지도 못하였을 듯한데, 정말 홀로 화산에 올랐다면 탈진하는 것도 당연하다 생각됩니다."

"그렇겠지."

현종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화산의 험준함은 성인 남자도 버거워한다. 어린아이의 몸으로 홀로 이곳에 올랐다면 그 피로함이 말로 못 할 지경일 것이다.

"그래서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설매청(雪梅廳)에 옮겨 두었습니다. 혹시 몰라 운진(雲眞)을 불러 진맥을 보았습니다만, 기운이 쇠한 것 외에 큰 문제는 없다고 합니다."

"다행이구나."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사정이 있었건 간에 화산에 든 이라면 화산의 손님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이가 화산 안에서 탈이 나는 것은 그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아이가 홀로 화산에 오르다니 기이한 일이구나. 무슨 사연이 있지는 않다더냐?"

"옥천원에 참배를 시킨 뒤, 천천히 물어볼 생각이었습니다만, 정신을 잃어 사정을 묻지 못했습니다."

"그렇구나."

"한데……."

"음?"

운암이 조금 눈을 찌푸리고는 조금 전의 사정을 설명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현종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걸 팔아먹네?"

"예."

"그 아이가 그런 말을 남겼다는 말이더냐?"

"그랬습니다. 그냥 넘길까도 했으나, 아무래도 기이하여."

"흐음."

현종진인이 가만히 수염을 쓸어내렸다.

"물론 제가 잘못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장문인. 이상한 것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기도 전에 그 아이가 제게 화산의 도인이냐고 먼저 물었습니다. 이곳이 화산이라는 걸 알고 왔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설마 무슨 꿍꿍이라도……."

현종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걱정되느냐?"

"그런 게 아니오라……."

"이곳이 화산이라는 걸 아는 게 뭐가 이상하다는 말이더냐? 한때는 천하에 이름을 알리던 도문이다. 기억하는 이가 있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지."

"예."

"그리고 하산한 이의 후손일 수도 있지 않느냐."

"아……."

운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세가 기울면서 수많은 이들이 화산을 떠났다. 끝까지 화산과 운명을 같이하겠다고 남은 이들은 오히려 소수에 속했다. 그런 이들의 후예라면 이곳에 화산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훔쳐 먹을 것이 있을 때나 걱정해야 하는 것이다. 화산에 뭐가 남았다고 꿍꿍이를 꾸미겠느냐?"

"……장문인."

운암의 얼굴에 작게 처연함이 깃들었다. 하지만 현종은 그런 운암의 표정을 보지 않고 자조적으로 뇌까렸다.

"팔아먹었다라."

현종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랬지. 어쩌면 정말 하산한 이의 후손일지도 모르겠구나. 과거의 옥천원이 어땠는지를 안다는 뜻이니까. 아이에게 민망하구나."

"……장문인."

"되었다. 팔아먹은 게 사실이니 창피할 것도 없다."

운암이 마른침을 삼켰다.

'뒷말은 안 하는 게 낫겠지.'

아이가 한 말이 단순히 '팔아먹었다'가 아니라

'이걸 팔아먹네, 미친놈들.'

이었다는 사실을 장문인이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하기는 했지만, 이 말은 차마 전할 수가 없었다.

"알겠다. 그 아이가 깨어나는 대로 내게 데려오거라."

"예. 장문인."

현종은 골똘히 생각에 빠져들었다.

'팔아먹었다라.'

상처에 소금이 뿌려진 기분이다.

'조사들께서는 나를 용서하지 않으시겠지.'

제아무리 화산을 살리기 위한 방편이라고는 하나, 화산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옥천원의 제기들을 팔아치웠으니 그가 무슨 낯으로 조사들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겠는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일이건만…….

현종의 얼굴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내 대에서 화산의 이름이 끝나지 않아야 할 텐데.'

다시 천하를 호령하겠다는 꿈은 꾸지도 않는다. 그저 화산이 그의 대에 망하는 꼴만 보지 않으면 여한이 없다.

하지만 그 작은 소망마저도 날이 갈수록 힘겨워지고 있었다.

슬그머니 현종의 눈치를 살피던 운암이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읍했다.

"가 보겠습니다."

"음."

허락을 구하고 밖으로 나가려던 운암은 문득 다시 고개를 돌려 현종에게 물었다.

"저…… 장문인."

"음?"

"혹여 그 아이가 입문(入門)을 원한다면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입문이라……."

화산은 지금 입문자를 받지 않고 있다. 하지만 과거의 인연을 가진 이라면 조금 달라질 수도 있었다.

"입문은 받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여 운암을 배웅하던 현종이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잠깐."

"예, 장문인."

"그 아이의 이름이 뭐라 하더냐?"

"청명. 청명이라 하였습니다."

"……청명이라."

현종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알겠다. 나가 보거라."

"예. 그럼."

운암이 완전히 자리를 뜨고 나자 현종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청명이라……."

이럴 때 화산을 찾아온 아이의 이름이 과거 검존의 도호와 같다.

"기이하구나."

확실히 기이한 일이었다.

"그분만 살아 계셨어도."

천하삼대검수로 이름 높았던 매화검존 청명만 혈사에서 살아남았다면 화산이 운명은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의미 없는 가정이지만 못내 미련을 버릴 수 없는 현종이었다.

"……무량수불."

홀로 남은 현종의 도호만이 쓸쓸하게 전각을 채웠다.

* * *

"빌어먹을 놈들."

청명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팔아먹을 게 없어서 신물을 팔아먹어? 신물을?"

속에서 열불이 치솟아 올랐다.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팔아먹을 수 있는 게 있고, 팔아먹을 수 없는 게 있다.

아무리 암향백매화가 허접한 장식품처럼 보인다고는 하나, 그리고 어린 녀석들에게 백매화의 진정한 가치를 설명해 줘야 할 이들이 싸그리 다 죽어 버렸다고는 하나…… 그래도 그렇지!

화산이 망하는 한이 있어도 팔아…….

"아니, 망하는 것보다는 낫지."

조사께서 지금의 청명을 보았다면 호통을 쳤을 것이다. 그깟 신외지물이 무엇이라고 집착한단 말인가? 아무리 의미가 있는 물건이라고는 하나, 도인은 물건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안다. 그건 아는데!

"끄으으응."

청명이 신음을 흘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탁 트인 전경이 눈에 들어오자 속이 좀 풀리는 느낌이었다.

과거 그는 답답한 일이 있을 때마다 이리 연화봉에 올라 화산의 전경을 바라보고는 했다. 검처럼 삐죽삐죽 솟은 봉우리들과 끝없이 펼쳐진 산맥들을 보고 있으면 호연지기가 절로 솟아올랐었다.

그런데 지금은…….

"끄으으으응."

호연지기는 개뿔이. 속만 뒤집어진다.

아래로 얼핏얼핏 화산의 전각들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속이 썩어 나는 기분이었다.

"문도는 줄었고."

정확하게는 줄었다기보다 그냥 망한 수준이다.

"돈 되는 건 다 팔아먹은 데다가."

옥천원이 그 꼴이면 다른 데는 안 봐도 뻔하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가서야 손댈 수 있는 곳이 옥천원이다.

옥천원의 처참한 꼬락서니를 보고 나니 다른 곳이 왜 그리 낡고 허물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보수할 돈이 없었겠지. 오죽 돈이 급했으면 연무장의 청석까지 뽑아 팔겠는가.

"……그래. 다른 건 다 좋다 이거야! 내가 다 이해한다고!"

그런데!

무공은 왜 그 꼬라지냐고!

청명이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깎아지른 절벽에서 구른다는 게 제정신 박힌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은 아니겠지만, 지금 청명에게는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절벽에서 굴러 떨어져 죽기 전에 속이 타서 죽을 판이다.

"나이도 지긋한 놈이……. 삼대제자만도 못해?"

운암에 대한 이야기다.

본래라면 청명은 운암의 무공 수위를 짐작할 수 없어야 한다. 아무리 과거의 삶에서 청명이 천하삼대검수로 불릴 정도의 지고한 경지를 쌓았다고는 하나, 지금 그는 백면서생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청명은 운암의 무공 수위를 아주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청명이 워낙 강했었기에?

천만에.

지금 운암의 무력이 너무 낮아서다. 청명이 활동하던 당시로 돌아간다면 운암은 아마 도호조차 받지 못했을 것이다. 무학이 아니라 도법을 연구하는 학도가 되었거나.

적어도 이대제자는 되어 보이는 나이에 삼대제자만도 못한 무위라니.

"……이걸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해?"

어디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차라리 바닥에서 시작하는 게 나을 지경이다. 그렇다면 이것저것 신경 쓰지 않고 청명이 하고 싶은 대로 질러 버리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이곳은 화산이 아닌가?

'차라리 내가 그 청명이라고 말해 볼까?'

욕만 먹겠지.

얻어맞고 쫓겨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청명도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설사 믿는다고 치자. 그래, 저들이 한없이 이성적이라 청명이 푸는 이야기와 무공에 대한 지식을 이해해서 그를 과거의 그 청명이라 이해했다고 치자.

그것 역시 좋은 일은 아니다.

'나는 지금 내 지식을 지킬 힘이 없다.'

청명은 굴러다니는 보물과도 같았다. 가지고 있는 지식은 한 문파를 부흥시키고도 남을 정도인데 스스로를 지킬 힘은 없다.

청명은 알고 있다.

그의 사형은 더없는 도인이었지만, 화산의 모든 도인들이 하나같이 선하고 깨끗한 건 아니었다. 당장 청명만 해도 선함과는 중원 한 바퀴 정도의 거리가 있잖은가.

저들 중 누군가가 나쁜 마음을 먹고 청명을 제압하기라도 한다면?

가진 것을 싹 털리고 어딘가에 묻히는 걸로 한 많은 두 번째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그건 안 되지.'

그렇다는 건…….

"그럼 내가 청명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으면서 이 화산을 부흥시켜야 한다는 건데."

적어도 그가 스스로를 지킬 만한 무위를 되찾을 때까지는 숨겨야 한다.

"……차라리 마교랑 다시 싸우는 게 쉽지."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난이도였다.

무학을 전수해야 화산을 살리든 말든 할 텐데, 무학을 알고 있다는 걸 들키면 안 된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어디에 있는가?

성질 같아서는 다 때려치우고 싶지만…….

청명이 무거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반쯤 구름에 가려진 화산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고 치고 다니지 말걸."

그는 화산에 빚이 있다.

그가 천하삼대검수니 어쩌니 하며 뻐기고 다닐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가 화산이 그에게 준 것들 덕분이다.

하지만 그는 화산에 돌려준 것이 없다. 천마를 쓰러뜨렸다는 명예 하나만을 주었을 뿐. 덕분에 화산은 몰락했고, 망하기 직전까지 와 버렸다.

이러니 어찌 화산을 외면하겠는가?

인간의 도리 상 그럴 수는 없었다.

"아이구, 사형……."

청명이 고개를 들었다. 푸르르기만 한 하늘에서 장문사형이 그를 보며 웃고 있는 것 같다.

- 그래도 화산이니라.

"……끄응."

청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저승에 갔을 때 사형에게 맞아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이 무너지는 화산을 사람 구실 하게는 만들어야 한다.

"빌어먹을, 세상에 안 되는 게 어디 있냐?"

애초에 화산에서 무학을 익힐 때, 그가 화산제일 고수가 될 거라 생각한 이가 누가 있었는가? 다들 말썽이나 피우지 않으면 다행이라 여겼지!

그 매몰찬 눈길들을 이겨 내고 화산제일인이 된 청명이다! 불가능에 도전하는 건 청명의 특기라 할 수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가 천하제일문파 한번 만들어 본다!"

청명의 눈이 불타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화산에 있던 모든 이들은 알 수 없는 한기에 몸을 떨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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