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세상에, 화산이 망하네. (2)
청명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아……."
사람이 있다!
되살아난 지 한 달 만에 듣는 희소식이었다. 망해 자빠졌다고 생각한 화산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
끼이이이익!
썩어 버린 육중한 목문(木門)이 귀에 거슬리는 마찰음을 내며 힘겹게 열린다. 그리고 반쯤 열린 문 사이로 검은 도관(道冠)을 정제한 도인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
"아니, 웬 아이가?"
도사다.
청명은 사내의 한마디로 이 사람이 진정한 도인(道人)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왜냐면 지난 한 달 동안 그는 아이라는 말을 거의 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 아니, 뭔 거지새끼가?
- 어린 거지 같은데?
- 거지가 혼자 여행을 하는 거냐?
'그놈의 거지.'
거지는 나이가 많고 적고가 없었다. 어린 거지든 늙은 거지든 사이좋게 거지일 뿐이다. 땟국이 줄줄 흐르는 그의 겉모습을 보고도 '거지'가 아닌 '아이'라고 불러 주는 것만 해도 이 사람은 도인으로 인정받을 자격이 있었다.
사십쯤 되어 보이는 중년의 도사가 연신 고개를 돌려 대며 주위를 살폈다. 그러더니 황당하다는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너 혼자 온 게냐? 대체 너 혼자 여길 어떻게 올라왔느냐?"
"어…… 그게……."
청명이 말을 더듬었다.
'그냥 올라왔는데요?'
근성으로 안 될 게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지금의 상황에 적당한 말은 아니었다.
삐쩍 마른 청명의 몸으로는 무슨 말을 해도 의심을 살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굳이 변명을 할 필요도 없다. 이럴 때 중요한 건 변명을 하는 게 아니라 대화의 주도권을 잡는 것이다.
"그보다, 하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응?"
도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럴 만하다.
성인도 쉬이 올라올 수 없는 곳에서 혼자 있는 아이를 발견한 것만으로도 황당할 텐데, 그 아이가 대뜸 질문을 하겠다고 하니 어찌 황당하지 않을까?
"도장께서는 화산의 도인이십니까?"
"……네가 화산파라는 이름을 어찌 알고?"
"맞습니까?"
"일단은 그렇다."
청명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망하지는 않았구나!'
물론 망하기 일보직전이기는 하겠지. 산문의 꼬락서니만 봐도 대충 각이 나온다. 하지만 아직 망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어쨌든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는 말이니까.'
청명이 결심을 굳혔다.
일단은 어떻게든 화산을…….
"일단 들어오너라."
"네?"
청명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도인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해가 지고 있지 않느냐."
"……어?"
그러고 보니 벌써 주위가 어둑해지고 있었다.
"화산의 밤은 차다. 아직 날이 풀리지도 않았는데, 어설프게 밤을 보내려 하다가는 얼어 죽기 십상이지. 지금부터 산을 내려가는 것도 무리일 테고, 그렇다고 이곳에서 밤을 지새우라고 할 수도 없으니 일단은 들어가자꾸나. 이곳은 지금 외인을 받지 않지만, 그래도 화산의 이름을 알고 찾아온 객에게 밤이슬을 맞힐 수는 없지."
청명이 눈을 굴렸다.
뭐 이렇게 쉽게 넣어 주지?
……하기야 생각해 보면 저들이 청명을 경계할 이유가 없다. 피죽도 못 먹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어린 거지를 경계할 필요가 있겠는가.
"같이 온 이가 없고 따로 계획이 없다면 일단은 들어가자꾸나. 이야기야 그다음에 들어도 되겠지."
청명은 조금 멍해졌다.
뭔가 울컥하는 느낌이다.
천하를 호령하던 검문 화산파의 흔적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검문 이전에 화산을 지탱하던 도문으로의 화산은 아직 그 불이 꺼지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래. 그거면 됐지.'
검으로 천하에 이름을 날리는 게 뭐가 중요한가? 화산은 검문이기 이전에 도문이었다. 도문을 잇고 있다면 화산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럼 폐를 끼치겠습니다."
청명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사내가 웃으며 문을 열었다.
"이리로."
"예. 그전에 저는……."
청명이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소개를 해야 하지?
'모르겠다. 의심하지는 않겠지.'
"저는 청명이라 합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도장의 도호를 여쭈어도 될는지요."
"청명이라. 좋은 이름이로구나. 본도는 운암(雲唵)이라 한다."
'운자 배.'
청명의 눈이 반짝였다.
'벌써 배분이 한 바퀴나 돌았구나. 운자 배라면 저 녀석이 내 증사손(曾師孫)인가?'
화산은 청명현운백(淸明玄雲白)의 배자(輩子)를 따른다. 청자 배부터 백자 배까지 한 바퀴를 돌고 나면 다시 청자 배로 돌아가는 식이다.
저 운암이라는 도사가 화산의 도인이 청명으로부터 벌써 사 대가 지난 것이다.
'그럼 나를 본 적도 없겠군.'
그가 마지막으로 본 화산의 제자들은 현자 배였다. 그때, 현자 배들이 삼대제자였으니 저 운암이라는 도사는 과거의 그를 본 적 없는 이다.
새삼 세월이 이만큼이나 흘렀다는 실감이 났다.
청명이 사형과 함께 화산을 이끌……. 아니, 사형의 속을 썩이며 사형이 화산을 이끄는 데 장애물이 되던 시절에는 화산에 오르지도 못했던 아이가 이제는 화산의 도인이 되어 그를 맞고 있다.
이런 묘한 기분은 그가 아니면 느껴 볼 수 없을 것이다.
청명은 운암의 안내를 받아 산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후우."
깊게 한숨을 내쉰다. 지금의 화산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다는 게 조금은 부담되는 기분이다.
청명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침착하자.'
그들이 화산에 남겨 준 것과, 돌아가는 정황을 감안해 보면 화산이 개판이 나 있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건 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제대로 검도 잡지 못하는 아이들만 남겨 놓은 채, 모조리 전멸해 버린 자신들의 잘못이었다.
즉 냉정하게 말해, 청명은 이 아이들에게 화를 낼 자격이 없다. 오히려 미안해해야 한다.
청명이 이들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화산을 지키겠답시고 고군분투했겠는가? 도적에서 이름을 파 버리고 무당으로 갔겠지. 그게 상식적이지 않은가?
'그래 내가 무슨 자격으로 이 아이들을 탓하겠는가?'
어른이 되어 아이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 주지 못해 놓고, 아이가 성공을 이루지 못했다고 화를 낸다? 그건 후안무치한 짓이었다.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상황을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후우."
깊은 심호흡을 하며 청명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윽고 눈앞에 드넓은 연무장이 펼쳐졌다.
'아아.'
감회가 새로웠다. 과거 청명도 이 드넓은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며 꿈을 키우지 않았던가.
저 새하얀 청강석으로 바닥을 다진…….
"……어?"
청명이 눈을 비볐다.
청강석? 그 하얀 청강……. 아니, 청강석 어디 갔어?
청명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왜 흙바닥이야?'
과거 이 연무장의 바닥은 단단한 청강석으로 채워져 있었다.
사형은 검소해야 할 도문의 바닥이 비싼 청강석으로 다져졌다는 사실을 못마땅해했지만, 아이들이 흙먼지를 마셔 가며 수련을 하는 것 역시 안타까운 일이기에 딱히 제거하겠다고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그 청강석이 왜 싸그리 다 사라졌는가?
당대의 화산 장문이 설마 그 장문사형보다 더 소탈한 건가? 그래서 청강석을 다 제거한 건가?
"후우우웁."
청명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침착하자.'
침착. 또 침착하자. 그따위 청강석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래 봐야 돌덩어리.'
제아무리 그 청강석이 비싼 것이었다고 한들! 장문사형이 도사라는 놈들이 백성들의 한 달 곡식 값보다 비싼 돌을 처밟고 수련을 한다고 역정을 낼 만큼 비싼 것이었다고 한들…….
사람 나고 돌 났지, 돌 나고 사람……. 아. 돌 나고 사람 났을 수도 있겠네.
여하튼!
'돈 급하면 팔아먹을 수도 있지.'
화산이 존속하는 게 중요하지. 그딴 돌덩어리들을 지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게 아니…….
'침착하자.'
"후웁. 후웁."
청명은 최대한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런 돌덩어리들을 팔아 치워서라도 화산의 이름을 지켜 온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그 순간 청명의 눈이 툭 튀어나왔다.
또 이상한 풍경이 눈에 걸린 것이다.
'금천궁 어디 갔어?'
금천궁이 안 보인다.
'아, 안 보인다니 이게 뭔 개소리야?'
금천궁은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니라 건물이다. 어디 발이 달려 도망갈 수 있는 게 아니잖은가?
하지만 아무리 봐도 금천궁이 있던 자리엔 황량한 공터가 덩그러니 펼쳐져 있었다.
"……저."
"음?"
"저, 저기."
청명의 떨리는 손끝이 원래 금천궁이 있어야 했던 공터를 가리켰다.
"배, 배치가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 저기에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었나요?"
"으음. 네 눈에도 그런 게 보이는 모양이구나. 원래 저 공터에는 전각들이 자리하고 있었다더군."
그랬겠지.
그런데 그것들이 다 어디 갔냐고.
"허허. 어린 네가 알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말을 하라고, 인마! 내가 왜 몰라! 내가 너보다 잘 알아!
"그저 영광의 상처라고 해 두마. 도사가 영광이라는 말을 입에 올린다는 게 조금 민망하기는 하지만."
"……영광은 얼어 죽을."
"응?"
"아무것도 아닙니다."
청명이 말을 얼버무렸다.
청강석이 날아가고 전각이 사라진 화산의 모습은 황량함 그 자체였다. 실바람만 불어도 연무장의 흙이 날아올라 누런 모래바람을 만들어 낸다.
이게 화산이냐? 이게?
마교라고 해도 믿겠다, 이 썩을 놈들아.
"끄으으으."
"어디 아프더냐?"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청명이 심호흡을 했다. 들이쉴 때마다 모래바람이 입 안으로 들어와 버석버석한 것이 아주 엿 같고 좋았다.
"조금."
"음?"
"황량한 것 같……습니다."
"그러냐."
운암이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씁쓸해 보이는 그의 모습이 청명의 눈에 아프게 박혀 든다.
'그래……. 그랬겠지.'
뭔가 울컥했다.
생각해 보면 화산이 몰락하면서 가장 고통받았을 건 바로 운암과 같이 화산을 지킨 이들이다. 능력이 있었다면 어찌 사문이 쇠락하도록 내버려 두었을 것이며, 애정이 없었다면 어찌 쇠락하는 사문을 지키고 있었겠는가?
'너희가 가장 고생이 많았겠지.'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청명의 충격이 아무리 크다고 하나, 지금까지 화산을 지켜 온 이들이 겪었을 슬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 엄살 떨 것 없다.
"이리로 오시게나."
"……예."
"객이 왔으면 쉴 곳을 내어 주는 곳이 도리겠으나, 화산은 도문이라 객이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 법일세. 쉬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우선 옥천원에 들어 조사를 배알하시게나."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옥천원은 화산의 개파조사인 학대통(?
大通) 조사가 모셔진 곳이다.
화산에 수많은 전각이 다들 나름의 중요함을 가지고 있지만, 옥천원보다 중요한 곳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명이 화산의 제자라는 자각을 놓지 않았다면 화산에 드는 즉시 옥천원에 들어 조사를 배알하는 것이 순리였다. 직접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 상황에 운암이 이리 먼저 나서 주니 고마워야…… 하는데.
불안하다.
이미 본 것이 너무 많아서인지 옥천원에 드는 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화산 전체가 개판인데 조사전이라고 해서 뭐가 다르겠는가?
'놀라지 말자.'
미리 심호흡을 했다. 그 어떤 상황이 눈에 보이더라도 절대 놀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리 들어가면 된다."
"예."
몇 번이고 마음을 다스린 청명이 옥천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옥천원은 단출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학대통 조사의 초상과 그 앞에 놓인 향로, 그리고 제기들이 다였다.
도가답게 검소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검소하기…….
그래, 검소하기 짝이 없다.
청명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내 그의 몸이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어, 어디……."
금의 황제가 학대통 조사에게 내렸다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촛대도 보이지 않고, 조사께서 등선 전에 손수 쓴 글자로 만든 족자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황금으로 치장한 수실도, 전각을 가득 채우고 있던 그림들도 모조리 사라졌다.
하지만 청명을 정말 놀라게 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여……. 여기."
설마.
아니겠지. 어디로 치워 뒀겠지.
청명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제상 앞을 가리켰다.
"응?"
"여, 여기 꼬, 꽃이 하나 있지 않았습니까?"
"꽃?"
"……네. 꽃!"
"자네가 그걸 어찌 아는가?"
"이, 있었지요? 그 꽃 어떻게 했습니까?"
운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에게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일그러졌다 펴졌다 찌그러졌다 펴지길 반복하는 청명의 얼굴을 보니 일단 대답부터 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있었지. 있긴 있었지. 이상한 흰 금속으로 만들어진 매화."
"예! 그 꽃! 그거 어디 갔습니까?"
"팔았네."
"……예?"
"딱히 쓸모가 없기도 하고, 도관에 어울리지도 않아서 고민하던 차였는데, 산다는 상인이 있어서 좋은 값에 팔아넘겼지."
"파, 팔아……."
"그렇다네. 그런데 자네는……."
청명이 끝내 눈을 뒤집고 뒤로 까무러쳤다.
"이, 이보게! 이보게 정신 차리게!"
"끄윽……."
암향백매화(暗香白梅花).
자하신검과 함께 화산의 이대신물(二大神物).
금처럼 요란하지도 않고, 은처럼 번쩍이지도 않기에 그저 소박하기만 한. 하지만 그 안에 화산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칭해지는 신물.
그걸 이 미친놈들이 팔아치운 것이다.
"파, 팔아먹을 게 따로 있지."
이걸…….
"이걸 팔아먹네, 이 미친놈들……."
화산까지 올라온 피로에 충격이 겹쳐졌다. 청명은 결국 의식의 끈을 놓아 버렸다.
점차 하얗게 흐려지는 눈앞으로 기겁을 하는 장문사형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사형.
화산은 망했소.
그것도 쫄딱 망했소.
사혀어어어엉!
청명은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