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이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야? (5)
'짤그랑?'
청명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눈앞에 반짝이는 뭔가가 보인다.
'어?'
그와 동시에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쯧쯧쯧. 아직 어린 것 같은데. 어쩌다가 거지가 됐누."
짤그랑.
짤그랑.
동전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어디서 얻어맞은 것 같은데, 저러다 죽는 거 아닌지 몰라."
"세상이 어지러우니. 쯧쯧쯧. 불쌍하기도 하지."
어?
이게 무슨 상황…….
'아.'
나 거지지? 잠시 잊었다.
남들이 보기에 청명은 거지로 보일 것이다. 아니, 스스로 보기에도 그냥 거지였다. 그것도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어린 거지. 그것도 어디서 뒈지게 얻어맞아서 눈두덩은 시퍼렇게 물들고 피딱지가 그대로 눌어붙어 있는 불쌍한 거지…….
그런 거지가 저잣거리에 철푸덕 엎어져 있다.
"크으. 도무지 도와주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군."
"사람이면 그냥 갈 수가 없어. 사람이면."
팔다리도 덜 자란 어린 거지가 누더기를 입고, 흙먼지가 범벅이 되어 죽어 가고 있다. 말만 죽어 가고 있는 게 아니라, 정말 죽어 가고 있다.
이보다 완벽한 구걸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인지 동전이 짤랑짤랑 날아든다.
"쯧쯧."
"못 보던 거진데, 어쩌다 여기까지 왔누."
세상은 아직 살 만한 모양인가 보다.
난전으로 향하던 이들이 혀를 차며 그에게 동전을 던져 주고 있었다. 그 날아드는 동전을 보는 청명의 눈가에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네. 울어. 가엽기도 하지."
"그걸로 국수라도 사 먹어라."
온정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청명이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이 상황에 감격했기 때문이 아니다.
'대 화산파의 제자인 내가 구걸을 받다니.'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 버렸다는 말인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천하의 명운을 걸고 천마와 싸우러 가던 천하제일의 검수였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천하를 누비며 세상을 논하던 우아한 검객이었다.
그런데 그가 지금 구걸을 받는 처지가 되다니. 상전벽해도 유분수지!
'사람이 자존심이 있지!'
이 돈을 받아 버리면 그는 정말 거지가 된다. 대화산파의 고고한 검수였던 그가 거지라니. 구걸이라니! 이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사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자존심을 버리지 않는 법!
번쩍 고개를 든 청명이 이를 악물고는 소리쳤다!
"감사합니다! 복 받으실 겁니다, 대인!"
자존심은 얼어 죽을.
살고 봐야지.
* * *
"꺼어어억~!"
청명이 불룩 솟아오른 배를 두드렸다. 볼품없이 마른 몸에 배만 볼록하니 올챙이 꼴이 따로 없었다.
"자존~심~이 밥 먹여~주나. 죽은 무사~보다 산 거지가 났지."
몸이 작아서 그런지 효율이 좋다.
난전에서 산 만두 세 개만으로도 배가 터지도록 불러 왔다. 그러고도 아직 소매에 짤랑거리는 동전이 세 닢이나 남아 있었다.
예전이었으면 거리에 떨어져 있어도 줍지 않고 지나갔을 동전이 지금은 세상 다시없는 보물처럼 느껴졌다.
'돈이 이렇게 중할 줄이야.'
매달 결산일만 되면 머리를 부여잡던 사형을 보며, 도사가 재물에 연연한다고 지껄여 댔던 기억이 난다. 할 수만 있다면 당시로 돌아가 그 요망한 주둥아리를 후려갈겨 버리고 싶다.
'배가 처불렀지.'
어디서 돈도 못 벌어 오는 놈이 칼질 좀 한다고 떠들어 대는 꼴이라니. 그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반백수들을 먹여 살리느라 허리가 휘었을 장문사형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다.
여하튼.
"일단 살긴 살았는데."
청명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대책 없이 출발하기는 했다만, 섬서까지 어떻게 가야 할지 감이 서지 않는다.
'이천 리를 쉽게 생각했어.'
청명의 모든 생각은 과거를 기준으로 돌아가고 있다. 몸이 바뀌고 상황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루아침에 새로운 기준에 적응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과거의 그였다면 무한에서 섬서까지 반나절 만에 가고도 시간이 남아서 화산 아래 주막에서 시원하게 한잔 걸쳤겠지만, 지금 그의 몸으로 화산까지 맨몸으로 간다는 건 정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산도적이나 산짐승은 어찌어찌 타파할 수 있다 해도, 허기는 답이 없다.
간단히 갈 수 있을 거라 여겼던 여정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장대한 여정으로 바뀌게 되자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렇다고 느긋하게 구걸이나 해 가며 섬서까지 갈 수도 없고.'
청명이 머리를 마구 긁었다.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내가 뭐 아는 게 있어야 방법을 찾지!"
예전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은 백 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였다. 세상에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무슨 방법을 찾겠는가?
"어이!"
평범한 사람도 섬서까지 가는 데는 두 달이 넘게 걸린다. 이 몸뚱이로 화산까지 가려면 반년이 걸려도 이상하지 않다.
"어이!"
지금 당장이라도 화산이 어찌 되었는지를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청명으로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지금의 그로서는 딱히 떠오르는 게…….
"야, 이 새끼야! 귀가 먹었냐?"
"응?"
청명이 고개를 돌렸다.
'뭐야?'
뭔 소리가 들린다 싶긴 했는데, 그게 설마 자기를 부르는 건 줄은 몰랐다. 굳이 거지에게 말을 걸 사람은 없으니까.
험상궂은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거지가 셋이나 시야에 들어왔다.
'거참 거지 같네.'
이번 삶은 여러모로 거지들과 엮이는 것 같다.
"나?"
"나아? 저도 아니고 나? 이 거지새끼가 미쳤나."
가장 앞에 있는 험상궂은 거지가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어디서 기어들어 온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구 허락받고 여기서 구걸질이냐."
구걸에도 허락이 필요한가?
"아직 어린 것 같으니 목숨은 살려 주마. 손에 든 거랑 소매 안에 든 거 다 꺼내 놓고 꺼져라."
소매 안에 든 거면 남은 동전을 말하는 걸 테고. 손에 든 거면…….
청명의 시선이 자신의 손을 향했다. 반쯤 남은 채로 식은 만두가 들려 있었다.
"……진짜 양심도 없네. 이 거지새끼들."
이걸 뺏어? 이걸? 벼룩의 간을 내먹지!
"이 거지새끼가!"
거지와 거지가 서로 할 욕이라고는 거지새끼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남에게 욕을 하는데 내 얼굴에 침을 뱉는 듯한 매우 거지 같은 상황……. 아 거지 그만 좀 하자!
"잠깐만."
청명이 만두를 옆에 곱게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손을 앞으로 두어 번 뻗어 보고는 앞으로 한 발짝 갔다가 뒤로 한 발짝 물러서는 행동을 몇 차례 반복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거지들이 눈을 부라렸다.
"너 지금 뭐 하는 거냐?"
"아. 잠깐만. 금방 끝나."
위아래로 팔다리를 몇 번 더 뻗어 본 청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은데, 이 정도면 대충 되겠지."
이제 거리감은 익혔다. 팔다리가 짧은 것에도 웬만큼 적응했다.
그러니!
"너희는 무척이나 억울하겠지만, 내가 거지한테 감정이 무척 안 좋다."
"……뭐?"
"뭐 어쩌겠냐? 세상 일이 다 그런 거지. 억울해하지 말고 달게 받아라."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청명이 목을 두어 번 꺾었다.
"아. 참고로 몸뚱이 힘이 약해서 세게 못 때리거든? 그러니 좀 많이 맞아야 할 거다."
"이게 진짜 미……."
그 순간 청명이 앞으로 비호처럼 뛰쳐나가 가장 앞에 있는 거지의 면상을 후려갈겼다.
빠아아아아악!
적절한 디딤발. 완전히 꺾어 젖힌 허리가 부드럽게 회전하며 만들어 낸 힘이 주먹 끝에 완벽하게 실린다. 아이의 주먹이 사람의 얼굴을 후려쳤는데 잘 야문 죽편으로 후려치는 소리가 났다.
털썩.
감당할 수 없는 일격을 그대로 처맞은 거지가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엎어졌다.
그 광경을 보며 청명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내가!"
퍼억!
옆으로 날린 발길질이 다른 거지 하나를 후려갈긴다.
"대 화산파의 매화검존이시다! 이 거지새끼들아아아아아아!"
환생한 후 쌓이고 쌓인 울분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 * *
"……대인."
"누가 거지보고 대인이래."
"대 거지……?"
"뒈질래?"
쪼르륵 머리를 박은 거지들이 낑낑대는 신음을 흘렸다.
'어디서 이런 괴물 같은 놈이 나온 거야?'
'아파 죽겠다.'
청명이 거지들을 제압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차 한 잔 마실 정도에 불과했다. 어린아이가 건장한 어른 셋을 때려눕히는 데 일다경이 걸렸다면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청명의 기준으로는 그것도 매우 비참한 결과였다.
'이러다 화병 걸리겠다.'
이런 놈들을 제압하는 데는 굳이 내공도 필요 없다. 과거 그의 몸이었다면 내공이 없어도 손가락 하나로 떡을 만들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이런 놈들을 제압할 때도 뛰고 박차고 굴러야 했다. 한 대 때려서는 자꾸 일어나기에 눈두덩만 서른여덟 번쯤 때렸더니 곡소리를 내는 중이었다.
'그 종팔인가 조팔인가 하는 놈을 이렇게 팼어야 하는 건데.'
그놈만 떠올리면 치가 떨린다.
팔다리가 짧다는 것만 미리 알았으면! 맞고 버틸 수 있는 체력만 있었으면 복날 개 패듯이 패 버릴 수 있었는데!
화산으로 가는 게 급해서 일단 복수도 하지 않고 떠나오긴 했지만, 언젠가는 그 거지 놈을 쥐 잡듯 잡을 날이 올 것이다.
"기상."
"예!"
거지 셋이 벌떡 일어났다. 꼬질꼬질한 그들의 얼굴을 타고 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렸다. 셋 다 청명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봐도 피죽도 못 먹은 거지새낀데.'
'이게 말이 안 되는데.'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작고 나약하고 가늘다.
겉으로 보기에는 걸어가다 엎어지면 그 길로 황천으로 직행하게 생겼다. 그런데 막상 붙어 보니 귀신이 따로 없다. 그들의 주먹은 저 어린 거지의 옷자락조차 스치지 못했다.
분명 별로 빠른 것 같지도 않고, 힘이 센 것도 아닌데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야."
"예!"
"하명하십시오! 대인! 아니, 대 거지! 아, 아니……."
이해하고 말고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생각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법. 중요한 건 이 어린 거지 놈의 주먹질이 뼛속까지 아프다는 점이다.
청명이 거지들을 쓰윽 돌아보고는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너희 섬서까지 빨리 갈 방법을 알고 있냐?"
거지들이 서로를 돌아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그 자신만만한 웃음을 본 청명이 한 줄기 기대를 품었다.
"하하하. 뻔한 걸 물으시는군요."
"오? 알아?"
"저희가 그런 걸 알면 거지로 살겠습니까. 물어볼 데다 물어보셔야죠."
"……."
떨떠름하게 거지들을 바라보던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놈들이 잘못된 게 아니다. 이제는 하다못해 거지한테 방법을 구하는 자신의 처지가 잘못된 거지.
"됐다. 가 봐."
"감사합니다!"
"만수무강하십시오!"
거지들이 격하게 허리를 꺾어 인사를 하고는 부리나케 몸을 돌려 달아났다. 아니, 달아나려 했다.
"잠깐."
그 순간 청명이 목소리가 그들을 잡았다.
"예?"
"가는 건 좋은데, 손에 든 거랑 주머니에 든 건 꺼내 놓고 가야지."
"……."
"뒤져서 나오면 동전 한 닢에 죽빵 한 대……. 아니, 열 대다. 한 대 때려 봐야 아프지도 않겠지."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거지들은 체념한 얼굴로 주섬주섬 주머니 안의 동전들을 청명에게 가져다 바쳤다.
"어이. 너."
"예?"
"속곳에 든 거 꺼내라. 벗겨 버리기 전에."
"……."
거지가 강도를 당하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현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