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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4화 (3/1,567)

4화. 이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야? (4)

"육합공(六合功)."

육합이란 합일(合一)을 의미한다.

하늘과 땅. 그리고 동서남북의 사방을 모두 일컬어 육합.

육합은 곧 세상이고, 세상이 곧 육합이다.

"크으."

거창하고 대단하게 들리는 말이다.

그래서 이 육합공이 어떤 무학이냐고?

'저잣거리 난전에서 닷 푼에 팔아 치우는 무학이지.'

비급 치고 싼 게 아니라, 서책 치고도 싸다. 종이 값이나 겨우 건질 값을 받고 파는, 세상에서 가장 저렴한 무공이다. 속된 말로 하면 싸구려다.

저잣거리의 파락호들이 자신들도 강호인이 되겠답시고 무학을 익힐 때, 서점에서 가장 먼저 사는 책이 바로 이 육합공이다. 도관이나 무관의 엄격한 규율을 지키기 싫은 놈들이 독학으로 고수가 되겠답시고 익히는 무학이란 뜻이다.

과거 청명이 강호에서 활동할 때만 해도 육합공, 육합권, 삼재검이 저잣거리 삼대무학이라 불렸으니 오죽하겠는가?

청명이 삼대검수로 불릴 쯤에는 그 저잣거리 기본 무학이 태극권으로 바뀐 모양이었지만, 뭐 그거야 그치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그런데 왜 이런 싸구려 무학을 익히냐고?

'싸구려가 아니니까.'

육합공은 화산의 입문 무학이다. 화산에 입산한 이들은 모두가 육합공으로 무학을 시작한다.

육합공이 저잣거리를 나돌게 된 이유는, 한 화산의 조사께서 양생(養生)이란 도관만의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미명하에 과감하게 민중에 공개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육합공은 익히는 것만으로는 사람을 강하게 만들지 못한다. 그저 조금 건강해지는 효과를 낳을 뿐이다.

원하는 효과를 보지 못한 이들은 육합공이 형편없는 무학이라고 멸시했고, 화산에서 핵심을 빼고 공개했다고 욕을 해 댔다.

결국 화산에 갓 입관한 이들이 처음 배우는 무학이 육합공이라는 것을 알고는 항의를 할 정도로 나쁘게 인식된 무학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청명은 알고 있다.

육합은 절대 나쁜 무공이 아니다. 육합이 세간의 인식처럼 쓰레기 같은 무공이었다면 감히 수백 년 동안 화산의 기초 무학의 자리를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은 그 쓰임새가 있기 마련이지."

육합공은 내력을 기하급수적으로 올려 주지 못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내공을 모으는 효율만 따진다면 웬만한 문파 기본공의 십 분지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육합에는 그 단점을 무시할 만큼 끝내주는 효능이 있다.

바로 익히는 이의 육체를 완벽하게 정화해 준다는 것.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말 그대로 기초공이라는 거지."

기초.

기초공사.

육합은 단전과 육체를 닦아 내어 완전하게 만드는 데는 최고의 무학이다. 하지만 남들은 축기를 할 때, 단전만 닦고 있으니 그 효능이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다른 이들은 뛰고 나는데 바닥만 기고 있으면 어떻게 된다고?

'난리가 나지.'

결국 화산조차 육합공을 깊게 파고드는 것을 포기했다. 전통과 역사가 있으니 적당히 입문공으로 익히게만 하고, 대충 운기를 할 줄 알게 된다 싶으면 재빨리 소청기공(小淸氣功)으로 넘어갔다.

전생의 청명 역시 효과도 없는 육합공 따위에 매달리지 않았다. 그 시간에 좀 더 나은 심법을 익히는 게 백 배는 이득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백 배는 손해였지. 빌어먹을!"

전생에서 그가 가장 후회한 일이 이것이다.

조급하게 다른 심법으로 빨리 넘어가지 않고 육합공을 완공(完功)한 후에 다른 무학을 시작했다면 적어도 배 이상은 강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탑을 쌓은 이후에는 기초 공사를 다시 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런 그에게 그 천추의 한을 풀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이번에는 절대 조급해하지 않는다. 세심하게 공을 들여 완성할 것이다. 쌓아 올릴 탑이 더욱더 거대하고 아름답도록.

"후웁."

가부좌를 튼 청명이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육합공의 구결을 떠올렸다.

마음이 이는 순간 기가 움직인다.

호흡을 통해 외기(外氣)가 그의 육체로 빨려 들어온다. 기초공에 입문하는 이들은 이 외기를 처음 느끼는 데만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을 소비하기 마련이지만 청명에게는 그런 과정이 필요 없었다.

빨려 들어온 기운이 육합공의 인도에 따라 천천히 그의 몸을 타고 돌다가 아랫배 언저리에 안착한다.

'지금부터다.'

물론 청명은 그저 육합공을 익히는 수준에 머루를 생각이 없었다. 조사들이 안배해 놓은 길을 그대로 따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이미 한번 길을 걸어 본 이는 같은 길을 그대로 똑같이 걷는 것에 만족할 수 없는 법이다.

'좀 더 정순하게.'

정신을 집중하여 모인 기운들에 섞여 있는 불순물들을 걸러 낸다.

거대한 옷감에서 한 올 한 올의 실을 모두 보고 미세하게 어긋나 있는 실들을 걸러 내는 느낌으로, 완벽하게 정순하지 못한 기운들을 걸러 내고 또 걸러 낸다.

처음은 완벽하게.

모이는 기운의 크기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불순한 일 갑자의 내공이 아니라 완벽한 한 톨의 기운이다.

기운이 깎여 나간다. 좁쌀만 한 기운이 더 작게, 더욱 작게 깎여 나갔다. 한나절이 넘는 시간이 지나고 나자 남은 것은 정말 미세하기 짝이 없는 한 톨의 기운뿐이었다.

그 기운이 아랫배에 안착하며 단전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작은 공간을 만들어 낸다.

번쩍.

청명이 눈을 떴다.

"후우우우우우."

얼굴이 땀범벅이다. 그가 걸친 누더기도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땀과 불순물들로 젖어 더러워져 있었다. 원래도 더러웠지만 더 더러워졌다는 뜻이다.

"이렇게 집중해서 운공을 해 본 건 또 처음이네."

하지만 힘들다기보다는 오히려 상쾌했다. 그리고 그 결과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가만히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단전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형태지만, 어쨌거나 완벽한 토대를 위한 첫걸음에 성공했다.

지금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

강호의 역사를 모두 뒤져 봐도, 첫 운공에 성공한 이들 중에서 청명보다 미약한 단전을 만든 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청명은 알고 있다.

이 작은 단전이 그를 또 다른 세상으로 이끌 것임을 말이다. 이 작지만 완전한 기운이 눈덩이처럼 구르고 굴러, 이내 세상 누구도 막지 못할 거대한 산사태를 만들어 낼 것이다.

그래. 마치…….

'천마 그놈처럼.'

청명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천마를 생각하니 전신에 한기가 드는 느낌이다.

'인간이 아니었지.'

압도적.

아니, 그런 말로도 미처 다 표현할 수 없는 존재였다.

천하를 오시하는 문파의 정예들을 모조리 끌어모아 만든 결사대. 그 결사대가 마교 전체를 노린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천마 하나에게 달려들었다.

결과는 양패구상.

과장 조금 보태면 천마 홀로 강호 전체와 대등하게 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이번엔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하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해낸다면 말이다.

청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자 그러……."

휘청.

반쯤 섰던 청명의 몸이 힘없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어……."

뭐지? 운공을 너무 과하게 해서 빈혈이 왔나?

"끄응차!"

팔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킨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팔이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으응?"

파들파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키는 팔이 눈에 들어온다. 앙상하기가 겨울철 나뭇가지 같은 팔이 달달 떨리는 광경이 애처롭기 짝이 없다.

"왜, 왜 이래 이거?"

아닌데? 운공을 했으면 몸에 힘이 넘…….

"자, 잠깐."

청명이 시선이 바닥과 맞닿아 있는 자신의 아랫배로 향했다.

천하에서 가장 정순한 기운이 정말 개미 눈곱만큼 모여 있다.

개미 눈곱…….

기운의 정순함이야 매화검존이었던 청명마저도 희희낙락하게 만들 만큼 끝내줬지만……. 그 양은 아이가 시원하게 주먹 한 번 내지르면 소진될 만큼 기적적으로 작았다.

그 말인즉슨?

"아니, 빌어먹을! 이러면 지금 당장 몸을 쓰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잖아!"

청명이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을 굴렀다.

생각을 하고 만들었어야지! 생각을 하고! 머리는 생각을 하라고 달려 있는 건데, 왜 생각을 안 하나! 왜!

귓가로 장문사형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제발 생각을 하고 좀 살아라! 생각을! 왜 너는 일단 일을 저질러 놓고 생각을 하느냐! 왜! 머리통을 두건걸이로 쓰지 말고 생각을 하라고!

그 고매한 도사님의 입에서 머리통과 두건걸이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었던 청명의 급한 성격이 다시 한번 사고를 친 느낌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크게 만들 것을!

"이 몸으로 화산까지 가야 한다고?"

무한부터 화산까지는 거리가 얼마나 되더라? 그러니까 대충…….

"이, 이천 리?"

눈이 돌아간다.

이천 리?

무공을 익히지 못한 보통 사람은 하루에 백 리를 가는 것도 힘겨워한다. 그런데 이 피죽도 못 먹은 어린아이의 몸으로 이천 리를 가야 한다고? 무려 이천 리를?

"끄읍!"

청명이 두 손으로 얼굴을 마구 비볐다.

"에이. 썩을 놈의 인생!"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미 만들어 버린 것을.

사실 알았다고 해도 특별히 더 큰 단전을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당장 편하기 위해 지름길로 가 버리는 게 훗날에 어떤 장애물이 되어 그를 가로막는지 절절하게 실감했으니까.

현재를 위해 미래를 포기하는 짓은 이제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라는 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니 문제지.

"끄으으응."

청명이 비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생 뭐 있나."

결국 이 모든 것은 청명이 감내해야 할 고난에 불과했다.

고난이 영웅을 만드는 법!

"근성으로 못 할 게 없다!"

청명이 이를 악물고 다시 관도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철푸덕!

"끄으……."

다리가 풀린 청명이 그 자리에 엎어졌다.

'근성으로도 안 되는 게 있네.'

이 나이에 새삼스러운 깨달음이라니.

세상에는 불가항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된 청명이었다.

다리가 아픈 건 참을 수 있다. 몸이 지르는 비명도 어떻게든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배고파 뒤지겠네.'

배를 긁어 대는 허기만은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가 없었다.

과거의 그는 본인이 나름 허기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수련을 한다는 것은 때때로 엄격한 자기 절제를 필요로 한다.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은 외부의 기를 받아들이는 행위기는 하지만, 자연히 불순한 것들도 받아들이게 되는 법이다.

그렇기에 수행을 하는 이들은 화식(火食)을 엄격히 금한다. 고된 수련 와중에는 아주 곡기를 끊는 일까지 있었다. 청명 역시 도가인 화산의 제자였고, 허기에는 나름 면역이 있는 사람이다.

아니, 그런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청명은 몰랐다.

없어서 못 하는 것과 있어도 안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인지!

먹을 게 있어도 참는 것과 먹을 게 없어서 굶는 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극한의 허기는 인내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배 속에서 마두 놈들이 칼질을 하는 느낌이었다.

지독한 근성으로 어찌어찌 관도를 벗어나 성내로 들어오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이 이상은 뭘 할 기운이 없었다. 저잣거리까지는 거의 기어오다시피 했으니까.

'다시 태어나 처음으로 겪는 죽음의 위기가 굶어 죽는 거라니.'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청명이 누구인가?

천하삼대……. 아, 지겨우니 됐고. 배고파 뒈지겠네.

그 '뒈지겠네'가 단순한 수식어가 아닌 실제적 위협이 되었다는 것을 느끼며 청명이 신음을 내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이러다가 굶어 죽게 생겼다.

산짐승이라도 잡아 보려고 했지만, 그 종팔인가 뭔가 하는 거지 놈이 얼마나 몸을 잘근잘근 두드려 놨는지 제대로 뛰고 움직이는 것도 불가능했다.

아니, 그 전에 무한에서 출발할 때부터 이 몸뚱어리는 굶어 죽기 일보직전이었다. 어쩌면 벌써 한 번 굶어 죽은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두 번째로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해 있다.

'어떻게 하지?'

먹을 걸 구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돈을 벌려면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 몸으로는 일을 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럼 대체…….

그 순간이었다.

짤그랑.

어디선가 들려온 쇳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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