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이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야? (3)
구칠은 황당함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기괴한 소리를 지르며 움막을 빠져나갔던 청명이 씩씩거리며 돌아오더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한 탓이다.
"나는 화산으로 간다."
"……."
"조금 황당하겠지만, 내 말을 똑바로 들어라."
그래도 황당한 줄은 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이어진 말을 들은 순간 깔끔하게 사라졌다.
"그냥 출발해도 되는데 굳이 돌아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그래도 너에게 나름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알긴 아네.
미친놈이 하는 헛소리를 들어 줄 이유는 없었지만, 이 말도 안 되는 짓거리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청명의 얼굴이 진지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은혜는 두 배로 갚고, 원한은 열 배로 갚는다. 훗날 내가 이 은혜를 갚을 날이 있을 테니, 화산의 청명이라는 이름을 기억해라. 다시 만나는 날 네게 이 은혜를 반드시 갚겠다."
굉장히 멋있는 말이다.
그 말을 하는 게, 눈두덩이 시퍼렇게 멍들고, 입술이 터진 볼품없는 어린 거지가 아니었다면 굉장히 멋있었겠지.
안타깝게도 청명이 늘어놓은 멋진 말에 대한 구칠의 감상은 아주 단순했다.
"……지랄을 한다."
청명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물론 지금은 내 말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지금 이 말을 잘 기억해 두어라. 언젠가 이 말이 너의 운명을 바꿔 줄……."
"왕초가 너 찾더라. 패 죽인다고."
"진짜?"
둘의 눈이 마주쳤다.
"……."
"……."
"크흐흐흠."
세상에는 다양한 병신이 존재한다. 평소 알던 이가 그 대열에 합류했다고 해서 딱히 대단하거나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갑자기 사람이 바뀐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기는 하지만.
"여하튼 그럼 나는 간다!"
"……동냥 해 와라. 아니면 정말 때려죽일 것 같더라."
"간다니까! 여하튼 기억해라! 화산의 청명이다. 이 이름을 기억해 둬!"
청명이 몸을 획 돌리고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움막을 빠져나갔다.
그 광경을 보며 구칠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살다 살다 별일을 다 겪는다.
하기야 저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저러다가 왕초에게 걸리면 이번에는 정말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을 테니까.
"왕초에게는 뭐라고 해야……."
그 순간 움막의 입구를 막고 있던 거적때기가 확 젖혀지더니, 청명이 다시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
왜 또 왔지?
구칠이 묻기도 전에 청명이 먼저 당당하게 물었다.
"야!"
"응?"
"아까 그 거지새끼 이름이 뭐냐?"
"누구?"
"나 때린 놈."
"아……. 왕초? 왕초 이름이 아마 종팔(宗八)일걸?"
"종팔? 이름 한번 거지 같네. 그 새끼한테 전해 둬. 다음에 만나면 가만 안 두겠다고."
……가만 안 두겠지.
왕초가 너를.
"그럼 정말 간다."
청명이 다시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참 불꽃같은 하루라는 생각을 할 무렵 청명이 다시 안으로 들어온다.
"아, 또 왜!"
"야."
"뭐? 왜? 또 뭐!"
"섬서성 화산으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냐?"
"……."
"……."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새끼는 미친 게 확실하다.
* * *
청명은 달리고 또 달렸다.
더럽고 작은 거지를 섬서까지 모셔다 줄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믿을 건 튼튼……. 과거에는 튼튼했었던 것 같은 두 다리와 지치……는 심장뿐이었다.
언제부터 청명이 말이나 마차를 타고 다녔는가?
과거의 그는 단 한 번도 말 따위는 타지 않았다. 느려 터진 말을 타고 이동할 정도로 느긋한 성미가 못 됐다.
그가 전생에 뛰어다닌 거리를 모두 합치면 중원을 열 바퀴는 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일말의 의심도 없이 힘껏 땅을 박차며 달렸다.
그리고 불과 일각이 지나기도 전에 바닥에 드러누웠다.
"허억! 허어억! 허억! 히이이익! 아이고오오오. 죽겠다아아아."
어린애 몸이라는 것을 생각 못 했다.
강철 같던 두 다리는 삐쩍 곯아 뼈만 남아 있는 작대기로 변해 버렸고, 영원히 지치지 않을 것 같던 심장은 예기치 못한 과로에 대해 과격하게 항의하는 중이었다.
뭔 소리냐고?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 나올 것 같다는 소리다.
"아니, 뭔 놈의 몸뚱어리가 이따위야!"
고작 일각 뛰었다고 이 난리라니!
내가 한 시진을 달렸나, 두 시진을 달렸나! 겨우 일각인데 숨이 넘어갈 지경이라니! 몸뚱이의 상태가 얼마나 저질이면 이런 결과가 나오는가?
"끄으응."
찬찬히 몸을 살펴보니 그럴 만도 했다.
천성적인 자질을 논하기 이전에 영양 상태가 너무 좋지 않다. 말 그대로 피죽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한 몸이었다.
이 몸으로 섬서까지 간다?
꿈같은 이야기다. 화산에 도착하기 전에 지쳐 죽을 게 뻔했다.
천하의 매화검존이 여행길에 지쳐서 객사를 한다? 저승으로 가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삼 박 사 일 동안 비웃음을 당할 것이다.
"섬서로 가려면 일단 이 썩어 빠진 몸뚱어리부터 해결해야겠어!"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최고의 수단?
그건 이미 청명이 가지고 있었다.
"후후후후."
청명의 입에서 의미심장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가 없다.
"낄낄낄낄낄."
무공은 모두 날아가고, 몸은 최악이고, 화산은 망했는지 뒤집어졌는지 알 수가 없고, 배가 고파 뒈질 것 같다.
이 거지 같은 상황에 청명을 웃게 하는 유일한 위안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무공을 익히면 된다 이 말이렷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게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다른 이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정상에 오르지 못한 이들이 자신의 삶을 후회한다고? 물론 그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정상에 오른 이에게도 후회는 존재한다.
내가 그때 그걸 했다면!
내가 조금 더 어릴 때, 기초를 더 제대로 닦았다면!
수련하라고 사부님이 귀 잡아당기며 끌고 갈 때, 도망가지 않고 수련하는 시늉이라도 했다면!
사형이 숨겨 놓은 술을 훔쳐 먹다 걸리지 않았…….
아, 마지막은 빼고.
여하튼!
"다시 할 수 있다."
과거 청명은 천하삼대검수라 불리는 지고의 검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무학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강해지고 무학을 보는 눈이 더 깊어진 만큼 자신이 얼마나 비효율적으로 수련을 했고, 얼마나 잘못된 방향으로 성장해 왔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기초.
사부고 사형이고 비급이고 죽어라고 외쳐 대는 그 빌어먹을 기초!
수련을 하던 시절에는 그 망할 기초론자들이 앵무새처럼 외쳐 대는 기초라는 말이 죽도록 지겹고 싫었지만, 스스로 고수가 되어 보니 왜 기초가 중요한지를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기초란 결국 토대다.
높은 탑을 쌓기 위해서는 튼튼한 지반과 단단한 토대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토대를 얼마나 공들여 쌓느냐에 따라 얼마나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느냐가 정해진다.
그런데 어린 시절에는 그걸 알 수가 없다. 아무리 들어도 이해가 안 간다. 그리고 이해를 한다고 해도 이행할 수 없다.
왜?
'사람이니까.'
나는 기초를 닦겠다고 바닥에서 흙을 파고 있는데, 사형제가 옆에서 탑을 벌써 삼 층이나 쌓았다면? 누구라도 조급해지지 않겠는가.
게다가!
"말만 기초를 닦으라고 하지, 막상 기초 닦고 있으면 앞서 나가는 놈들만 아끼고 칭찬했지!"
망할 놈의 성적 지상주의!
물론 이해는 한다. 결국 사부도 사람이고, 사숙도 사람이다.
기초를 닦아야 대성할 수 있다는 건 누구나 알지만, 내 제자가 기초를 닦는다고 허덕이고 있는 와중에 사형제의 제자 놈이 기가 막힌 검식을 선보인다거나 친선 비무대회에 나가서 우승이라도 하는 날엔 기초고 나발이고 눈 돌아가는 법이다.
거기까지는 괜찮다. 거기까지는 사부도 어떻게든 참아 낼 수 있다. 화산은 도인들이 사는 곳이고 도인은 자고로 인내심이 깊으니까.
하지만 그 날 저녁에 사숙들끼리 술이라도 한잔 걸치는 순간, 기초 수련은 반쯤 끝장난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술자리에서 누군가 제자 자랑을 시작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자랑에 취한 이들은 제자를 천하에 다시없을 기재로 포장하기 마련이고, 자랑할 것이 없는 이들은 허벅지를 움켜잡고 버텨야 한다. 그리고 그 짜증과 분노는 다음 날 아침 모조리 자신의 제자에게로 쏟아진다.
- 내 사제의 제자 놈은 벌써 매화를 두 송이나 만든다는데!
- 그 썩을 놈의 제자 놈은 자하강기에 입문했다고 하는구나! 내가 그놈에게 져 본 적이 없는데! 제자 농사는 지게 생겼으니 이게 누구 탓이냐? 이게!
- 노오오오오오력이 부족해! 노오오오오오력이!
그런 판인데 뭔 놈의 기초 수련을 하는가. 당장 실전 초식 하나 더 익히기 바쁘지.
이건 사제관계로 무학이 전승되는 대문파의 고질병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청명은 다르다!
청명은 조급할 필요가 없다. 조급하게 그를 다그칠 스승도 없다. 이미 어떤 길을 걸어야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는지를 보았으니, 알고 있는 길을 따라 착실하게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기초?
남들이 땅을 다지니 바닥을 파니 할 때, 청명은 산을 허물고 보를 메워 평야를 만들어 버릴 작정이었다. 그 드넓고 거대한 평야에 누구도 쌓아 본 적 없는 거대한 탑을 쌓아 올린다!
'처음이 중요하다.'
화산의 무학은 도가공(道家功)이자 정공(正功)이다.
정공은 처음에는 느리고 약하지만, 수련을 거듭할수록 급격한 속도로 강해진다. 사공이나 마공이 익히는 즉시 즉각적인 힘을 준다면, 정공은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에 이르러서는 다른 무학들을 능가하는 깊이를 주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설산에서 눈덩이를 굴리는 것과 비슷한 거지.'
눈 덮인 산의 정상에서 작은 눈덩이를 굴려 보라. 처음에는 손톱만 했던 것이 이내 주먹만 하게 변하고, 구르면 구를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게 된다. 작은 돌멩이 하나가 마지막에는 인력으로는 막을 수 없는 거대한 눈사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지금 청명이 해야 할 일은 눈덩어리의 중심이 될 수 있는 확실한 돌멩이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그리고 결코 돌이 구르다 멈추지 않을 산면을 찾아내야 한다.
"자 그럼."
곧장 가부좌를 틀려던 청명은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관도의 한가운데에서 거사(?)를 치르려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비척비척 일어난 청명은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처음 단전을 만드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외부의 자극을 최대한 피해야 한다.
웬만해서는 그럴 일이 없겠지만, 운공을 하다가 벌에 쏘여 주화입마에 걸린 고수들의 이야기가 농담거리가 되기도 하지 않는가.
'여기면 되겠지.'
커다란 나무의 그늘을 찾아낸 청명이 바닥을 정비하고는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었다.
"자, 뭘 익혀 볼까?"
그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신공절학이 들어 있다. 화산의 모든 무학, 화산의 역사가 그와 함께한다. 그가 아는 내공심법만 해도 십여 가지가 넘는다.
천하를 오시하는 자하강기(紫霞剛氣).
매화검법에 최적화 되어 있다는 매화심법(梅花心法).
가장 날카로운 기운을 자랑하는 칠성진기(七星眞氣).
상승으로 가기 위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태을미리기(太乙迷理氣).
그 외에도 걸출하다는 표현만으론 부족한 수많은 심법들이 그의 머릿속에 있다. 화산의 것으로 한정하지 않는다면 익힐 수 있는 심법의 수는 배는 늘어난다.
하지만 청명은 고민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익혀야 할 심법이 무언지는 너무도 확연하다.
"육합."
청명의 목소리가 더없이 맑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