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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2화 (31/1,567)

2화. 이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야? (2)

'아무래도 미친 것 같은데.'

구칠(口七)은 청명을 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맞아서 정신이 나간 건가?'

좀 심하게 맞기는 했다.

왕초가 평소에도 사람을 좀 과하게 패는 면이 있기는 했지만, 오늘은 정말 작정한 듯 패 댔으니까. 복날에 개를 잡아도 그렇게 패지는 않을 것이다.

평소 같으면 어떻게든 왕초를 말리려 했을 이들도, 그 기세에 눌려 차마 말릴 생각도 못 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사람이라면 지금쯤이면 골골대고 있어야 정상인데…….

"그러니까 내가 거지라는 말이지?"

'몸은 멀쩡한 대신 머리가 맛이 가 버렸나?'

거지가 자기가 거지냐고 묻고 있다.

이런 거지 같은 경우가 또 있을까?

확실히 이놈이 오늘 좀 이상하다. 아니, 많이 이상하다.

평소에도 뺀질대는 감이 있어서 언제 한 번은 호되게 경을 칠 거라고 생각했다. 오늘 특별히 운이 없어서 걸린 것뿐, 평소에도 농땡이를 부리는 건 비슷했다. 오늘이 아니었다 해도 언젠가는 한번 대차게 얻어맞았을 것이다.

자기가 먹을 것을 자기 손으로 동냥하지 못하면 굶어 죽거나 맞아 죽는 게 거지 굴의 철칙이었으니까.

개든 사람이든 얻어맞고 나면 한동안은 정신을 차린다. 그게 정상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지금 구칠의 눈앞에 있었다.

"진짜 내가 이런 데서 사는 거지라고? 그럴 리가 없는데."

"……눈 없냐?"

"응?"

"니가 뭘 입고 있는지만 봐도 본인의 정체성을 파악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이는데."

청명이 고개를 내렸다. 온갖 천을 다 갖다 붙여 기운 누더기가 눈에 들어온다. 몸에 걸치고 있으니 옷이라고 하지, 버려져 있으면 옷인 줄도 모를 넝마였다.

보통 사람이면 이쯤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가겠지만 청명은 포기를 몰랐다.

"이름은 딱히 없고?"

구칠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거지가 이름이 어디 있어. 대충 짓고 부르는 거지. 너는 초삼(草三)이야."

"……딱 거지 이름 같네."

봐라. 상태가 영 좋지 않다.

"하필이면 거지라니. 이런 거지 같은 일이 있나."

"……."

"나이는 대충 열대여섯?"

"거지가 나이를 어떻게 알아?"

"그도 그러네."

이상한 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말투부터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다 달라졌다. 머리를 심하게 얻어맞아서 생긴 변화라고 납득하기에도 과할 정도다. 게다가 지금 아무것도 모른다는 투로 물어오지 않는가?

"그럼 지금이 몇 년이냐?"

"……살다살다 날짜 세는 거지를 다 보네. 나보고 해를 세는 거지가 되라는 거야?"

"진짜 거지 같네."

구칠이 손을 들어 눈두덩을 비볐다. 항상 피곤하고 배고픈 게 거지의 삶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평소보다 배로 피곤한 느낌이다.

"그럼 하나 묻겠는데."

"……지금까지도 묻고 있었으면서."

"너 천마 아냐?"

구칠이 눈을 일그러뜨렸다.

"아까도 천마가 어쩌고 하더니, 갑자기 천마는 왜 그렇게 찾아 대?"

"대답부터 해 봐라."

"알지. 천마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백 년 전에 죽은 대마두잖아."

"뭐?"

"대마두……."

그 순간 초삼이 구칠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와락 움켜잡았다.

"천마가 죽은 지 백 년이 지났다고? 백 년? 지금 백 년이라고 했냐? 백녀어어어언?"

"……."

아무래도 정말 맛이 간 모양이다.

"그렇다니까."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겠지."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해서 나오는 게 뭐가 있냐! 피죽도 없는 놈이."

눈을 부라리던 청명은 입을 벙긋거리다가 이내 경악한 얼굴로 구칠의 멱살을 잡은 손을 놓았다. 그러더니 돌연 머리를 벅벅 긁어 대기 시작했다.

'확실히 미쳤어.'

저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다. 넋이 나간 것도 같고, 맛이 간 것도 같다. 사람의 얼굴이 저렇게 다양한 '당황'을 표현할 수 있다는 걸 구칠은 처음 알게 되었다.

"백 년이라고?"

"다시 말해 줄까?"

"……돌겠네."

청명이 허탈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파란 하늘이라도 보이면 마음이 조금 위로가 될까 싶었지만 보이는 거라고는 시커먼 움막의 천장밖에는 없었다. 마치 지금 청명의 심정처럼 우중충하기만 하다.

"백 년이 지났다는 말이지?"

이제 슬슬 짜증이 난 구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구관조도 아니고 왜 자꾸 했던 말을 다시 하고 있어! 백 년이 지났다니까! 중원무림 결사대가 십만대산의 정상에서 천마랑 크게 맞붙고 결국엔 목을 땄던, 그 뭐냐……. 그래! 대산혈사(大山血事)가 지금으로부터 대충 백 년 전이라고!"

"……알아들었어."

그래서 미치겠다.

청명은 허망한 얼굴로 구칠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거지면 모르겠는데.'

조금 전 신나게 청명을 타작했던 놈은 개방의 일결개였다. 그 말인즉슨 눈앞에 있는 이 녀석도 개방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놈이라는 뜻이다.

보통 십만 개방도라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개방이 무슨 천하제일의 대부호도 아니고, 십만에 달하는 문도를 모두 먹이고 재울 수는 없다. 거지방파 주제에 알짜라고 소문이 난 개방이지만 자금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 십만개방도 중 대부분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구칠 같은 그냥 거지였다. 개방은 이런 거지들에게 무결개(無結?), 즉 매듭 없는 거지라는 이름을 주고 적당히 문도 취급을 한다.

저자에 굴러다니는 거지들도 웬만한 양민보다는 무림의 정보에 빠삭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웬만큼 신빙성이 있다고 봐야 한다. 당시 각 문파에서 모인 결사대가 대산에 올랐다는 사실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더 볼 것도 없다.

"허. 미친. 백 년이라니."

강산이 다섯 번은 변할 세월이다.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그가 다른 이의 몸을 빌려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한데…….

'이왕이면 좀 죽은 다음에 바로 태어나게 해 주면 안 되나?'

백 년이 흘러 버렸으면 그를 알고 있던 이들은 다 죽었을 것이다. 물론 굳이 백 년이 지나지 않았더라도 웬만큼 그와 교분을 나눈 이들은 대산에서 다 죽었지만, 그래도 이건 경우가 다르지 않은가?

아무리 청명이 무인이라고 해도 같은 무인들끼리만 교분을 나누었을 리는 없다. 그가 알던 이들 중에는 상인도 있고 양민도 있었다. 하지만 백 년이 지나 버린 이상 그들이 살아 있을 확률은 없다고 봐야 한다.

세상에 홀로 떨어진 느낌이다.

'뭔 상황이 꼬여도 이렇게 꼬이나. 이러면 화산도…….'

"어? 잠깐만 화산!"

청명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빽 지르자 구칠이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이젠 딱히 놀랍지도 않다.

"화산! 화산은 어떻게 됐냐?"

"뭔 소리냐?"

"화산은 어떻게 됐냐고!"

"화산?"

"그래!"

"화산이 뭔데?"

"……응?"

청명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화산을 몰라? 개방 거지가?

"자, 장난치지 말고. 화산파가 지금 어떤 상황이냐고."

"화산파?"

구칠이 고개를 갸웃했다.

모른다고?

몰라?

화산파를?

"구, 구파일방 중 하나인 화산파를 모른다고? 야, 이……."

"구파일방? 뭔 개소리야. 구파일방에는 화산파란 데가 없어."

"……없어?"

"소림. 무당. 종남. 점창, 공동, 청성, 아미, 해남, 곤륜. 개방. 이렇게 열 문파잖아."

"해, 해남? 그 섬 촌놈 새끼들이 구파일방을 차고 들어왔다고? 아, 아니 잠깐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화산이 구파에서 빠졌어?"

구칠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의원을 불러야 하나.'

아무래도 무슨 수를 쓰기는 써야 할 모양이다. 맛이 가도 단단히 갔다.

"화산, 화산이 구파일방에서 빠졌다고? 아니, 그럴 수는 있다고 치자! 그런데 화산파를 몰라?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은 간다는데! 개방 거지새끼가 화산파를 모른다고?"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을 거지새끼라고 부를 정도의 패기라면 어디 가서 굶어 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맞아 죽을 수는 있어도 말이다.

청명은 이제 아예 구칠에게 와락 달려들어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말이 되냐? 이게 말이나 되냐고?"

구칠의 머리가 힘없이 탈탈 털렸다.

"정말 몰라, 화산? 화산파를 모른다고? 화산을?"

"……화산."

"그래! 화산!"

구칠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섬서에 그런 문파가 있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청명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래! 섬서 맞다! 섬서의 화산파."

"내가 알기로 거기 망했는데?"

"……뭐라고?"

숨이 턱 막힌다.

"구파일방에 화산파가 있었다는 건 잘 모르겠지만, 굉장한 명문이었던 화 어쩌고 하는 문파가 정마대전으로 쫄딱 망했다는 이야기는 주워들은 적 있는 것 같아. 정확하겐 모르겠다. 자세히 알고 싶으면 윗분들한테……."

이게 뭔 개소리야? 화산이 망해?

화산이? 화산이 망했다고?

"이 거지가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구칠이 살짝 습기가 차오르는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는 것 다 말해 줘도 돌아오는 건 욕뿐이다.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랬는데.

"아니! 난 못 믿겠다!"

청명이 구칠을 확 밀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내가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밖으로 뛰쳐나가는 청명을 보며 구칠이 소리를 질렀다.

"야! 저녁까지 제대로 동냥 안 해 놓으면 왕초가 너 패 죽인다고 했어! 쓸데없이 시간 낭비 하지 말고 일이나 해!"

하지만 청명은 구칠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나가 버렸다.

"……저 새끼가 오늘 진짜 왜 저러지."

갑작스레 변한 청명을 이해할 수 없었던 구칠이 고개를 갸웃했다.

* * *

"……허."

전 재산을 날린 상인의 얼굴이 이럴까?

저잣거리 한구석에 주저앉은 청명의 얼굴에는 허탈함이 어려 있었다.

처음에는 무결개가 알아 봐야 뭘 알겠느냐는 생각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제는 대산혈사라고 부른다는 그 전투에서 화산의 일대제자와 이대제자가 전멸했으니 문파의 세가 기울 수도 있다.

그 와중에 구파일방에서 밀려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하고 또 해 봐도 천하를 오시하던 화산이 불과 백 년 만에 거지도 모르는 문파가 될 수가 있나!

거지도 모르는 문파라니 어감 한번 뭣 같네…….

여하튼 이 거지가 모르는 것일 뿐, 다른 이들은 화산을 알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결과는 같았다.

- 화산? 그 섬서에 있는 산을 말하는 건가?

- 화산파? 화산에도 무파가 있어?

- 나는 그런 문파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 이 거지새끼가 어디 사람 소매를 잡아. 뒈지고 싶냐?

아. 마지막은 빼고.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이게 말이나 되나?"

화산이 어떤 문파인가?

천하에 수많은 검문(劍門)이 있다지만, 화산보다 유명한 검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검문이라고 자부하기는 조금 애매하지만, 무당, 남궁세가와 더불어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세 문파 중 하나라는 데는 누구도 이견을 달 수 없었다.

그런데 몰라?

"허……."

그나마 가장 긍정적인 반응이 이거였다.

- 화산파?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예전에 유명했던 검문 아닌가? 듣자 하니 천마에게 당해서 쫄딱 망했다고 하던데? 아직 남아 있나?

쫄딱 망해? 그 화산이?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차라리 황궁에 불이 나서 황제가 속곳 바람으로 도망쳐 나왔다는 게 더 현실성 있겠다.

화산이 망하다니! 화산이!

눈앞에 장문사형의 마지막 모습이 아른거렸다.

항상 온화한 얼굴로 허허 웃던 장문사형은, 형용하기 힘든 기괴한 얼굴로 쓰러져 있었다.

'차라리 내가 다시 살아나서 다행이다.'

장문사형이 살아나 이 기막힌 소식을 들었다면 지금쯤 피를 토하고 도로 절명했을 것이다.

"아니, 아니야!"

청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

아무리 세가 기울었다고는 하나 몇백 년의 명맥을 이어 왔던 화산이다. 청명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화산으로 간다!"

가서! 확인한다!

청명의 눈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평온하디평온한 강호에 평지풍파를 일으킬 거대한 사건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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