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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화 (30/1,567)

1화. 이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야? (1)

꿈을 꾸었다.

아니, 이게 꿈인지, 기억인지, 그저 주마등에 불과한지 청명은 알지 못했다. 죽은 건지, 죽어 가는 중인지, 죽지 않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은 그저 과거.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

처음 화산에 입문하던 그의 모습.

사형제들과 함께 수련하던 풍경.

그리고 딱딱하기 짝이 없는 도문의 규범에 적응하지 못하고 밖으로 나도는 그의 모습이었다.

- 너는 무인(武人)이기 이전에 도인(道人)이다. 도가 없는 힘은 그저 폭력에 불과하다는 걸 모른다는 말이더냐?

뻔한 잔소리.

지겨웠다.

그렇기에 그는 화산의 제자이되 화산의 가르침을 온전히 따르지 못했다. 타고난 재능이 워낙에 뛰어나 매화검존이라는 과분한 별호를 얻기는 했지만, 그는 화산의 이단아였다.

왜 몰랐을까?

가르침이 뜻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설령 그 모든 것이 고리타분하게 느껴진다 하더라도……. 자신의 모든 것은 화산에서 나왔음을. 자신이 이토록이나 화산을 경애하고 있었음을.

너무 늦은 깨달음이고 너무 늦은 후회였다.

가르침을 조금만 더 중히 여겼다면, 그래서 조금 더 강해질 수 있었다면 이 끔찍한 결말을 바꿀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 후회하느냐?

청명은 은은하게 울려오는 목소리를 가만히 받아들였다.

이건 사형의 목소리다.

장문사형. 그의 아버지이자 형이었고, 가족이었으며, 그의 목표였던 이.

따르고자 했으나 끝내 따르지 못하여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이.

예. 후회합니다.

저는 후회합니다. 사형.

- 후회할 것 없다.

사형의 목소리에 은은한 온기가 어려 있다.

- 그래 봤자 화산 아니더냐.

……사형.

- 하나.

사형의 웃음이 들리는 것 같다.

한없이 따뜻하고, 한없이 자애로운.

- 그래도 화산이니라.'

따악!

그래도 화…….

따악?

응? 따악?

"끄아아아아아악!"

머리에 끔찍한 격통이 느껴진다.

아프다. 눈물 나게 아프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고통이지? 팔다리가 잘려 나갈 때도 이렇게 끔찍하게 아프지는 않았는데?

"처, 천마?"

이 새끼 안 죽었나?

ㅤㅊㅕㅇ명은 본능적으로 양손을 들어 머리를 가렸다. 이 새끼가 아직 안 죽은 거라면 어떻게든 다시 숨통을 끊어 놔야…….

"처어어언마아아아?"

하지만 돌아온 것은 천마의 웅혼한 목소리가 아니라 누가 들어도 띠껍고 배배 꼬인 목소리였다.

"응?"

눈을 뜨자 낯선 얼굴이 보인다.

'거지?'

거지. 그것도 개방의 거지다. 허리춤에 보이는 매듭으로 봐서는 이제 겨우 일결개(一結?). 좋은 말로 하면 이제 개방에 입문한 말단 거지고, 나쁜 말로 하면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다.

심술보가 뒤룩뒤룩한 얼굴의 거지가 청명을 보면서 씩씩대고 있었다.

'웬 거지야?'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청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거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반응을 본 거지의 얼굴이 짜증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정말 심술궂게도 생겼다.

"천마는 얼어 죽을 천마! 이 새끼가 아주 잠꼬대를 하고 자빠졌네. 이 거지 새끼야! 다른 놈들은 다 구걸하러 갔는데, 너는 무슨 통뼈라고 처자빠져 자고 있냐? 한 번만 더 게으름 피우는 꼴을 보이면 혼쭐을 내 주겠다고 말했을 텐데? 본 화자(花子)의 말이 우습더냐?"

거지가 손에 든 타구봉을 빙빙 돌렸다.

잠깐만.

'그러니까 저게 지금…… 날 위협하는 건가?'

"허?"

헛웃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상황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이건 굳이 상황에 맞춰 해석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청명이 누구인가?

천하의 그 많고 많은 검수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이가 바로 청명이다. 천하인들은 그의 검을 화산 무학의 정수라 찬양했고, 매화검존이라는 드높은 별호로 칭송했다.

게다가 말이 천하삼대검수지, 다른 삼대검수 중 둘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 천마마저도 마지막 순간 그의 검을 천하제일이라 인정하지 않았던가?

설사 개방 방주가 오더라도 그의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들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위협?

위혀어어어업?

"허? 허어? 너 지금 웃었냐?"

거지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이보게. 화자."

"이보게?"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된 모양인데, 일단 그거 내려놓게."

"허. 허허허허. 허허허허허허."

거지가 정말 어이없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며 청명도 눈을 찌푸렸다.

감히 자신 앞에서 일결개 따위가 저런 반응을 보이다니.

그 순간 거지가 다짜고짜 타구봉으로 청명의 머리를 후려쳐 왔다.

'허.'

어이가 없다.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따위 짓거리를 한단 말인가? 아무래도 오늘 이 거지 놈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아야 할 것 같다.

일단 이 느려 터진 몽둥이를 막고!

청명이 느긋하게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일단은 저 몽둥이를 움켜잡아 실력의 격차를 제대로…….

……어?

어?

'느려?'

내 팔이 왜 이리 느리지?

몽둥이는 날아오고 있는데, 청명의 손은 아직 몽둥이에 닿지 못했다.

아니, 분명 마음먹는 순간 이미 저 몽둥이를 잡고 있어야 하는데? 아, 혹시 부상이 아직 덜 나은 건가?

그렇다면 최선을 다…….

어? 뭐야?

청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야 한가운데로 그의 머리통을 향해 날아오는 몽둥이가 보인다. 그리고 그 시야의 끄트머리에 작은 손 하나가 나타났다. 굼벵이 같은 속도로 몽둥이를 향해 움직이는 작은 손.

너무도 작고 또…….

짧아?

어?

이게 짧으면 안 되는데? 이게 짧으면 이걸 못 막…….

거지가 휘두른 몽둥이가 청명의 팔을 스쳐 지난 뒤 정수리에 안착했다.

쿠우우우우웅!

머릿속에서 천둥소리가 울린다.

풀썩.

세상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은 청명의 몸이 깔끔하게 뒤로 넘어갔다.

움찔. 움찔.

바닥에 널브러진 청명의 몸이 경련을 일으킨다.

상황이 어찌 흘러가는지,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따위의 잡생각이 머릿속에서 깔끔하게 사라진다. 남은 것은 오로지 천지가 개벽하는 것 같은 고통뿐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아!"

청명이 머리를 부여잡고 뒹굴었다.

천마에게 팔이 뜯겨 나갔을 때도 이렇게 아프지는 않았다!

"이 새끼!"

청명의 머리를 후려친 거지는 이제 아예 손에 침을 탁 뱉고는 본격적으로 그를 두드려 패기 시작했다.

"상황 파악? 상황 파아악? 오냐! 내가 오늘 확실하게 상황 파악을 시켜 주마! 이 새끼가 미치려면 곱게 미칠 것이지! 더위를 처먹었나! 더위에는 매가 약이다 이놈아!"

몽둥이가 현란하게 청명의 몸을 작신작신 후려 팬다.

"악! 아악! 악! 이 거지가 미쳤나! 당장 그만두지 못……. 아악!"

"죽어! 죽어!"

"아, 아프다고! 악!"

정신없이 쏟아지는 매질에 청명의 외침이 조금씩 변해 가기 시작했다.

퍽! 퍼억! 퍽!

"이 거지새끼!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 내 오늘 살계를 열어……."

"열어라! 제발 좀 열어라, 인마!"

"악! 아아악! 이거 왜 안 막아져! 아악!"

퍼억! 퍼어억! 퍼억!

"거……. 적당히……. 아니, 아악! 악!"

후려침에 거침이 없다.

"……살려……."

퍽! 퍼억! 퍼억!

"사, 살려 줘어어어어어어어!"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삶이 결코 순탄치 않음을 암시하는 듯, 시작부터 복날 개처럼 얻어맞는 청명이었다.

* * *

"……아. 자존심 상해."

청명이 코에 쑤셔 박았던 천을 잡아 뺐다.

"아, 아야야."

코에 시큰한 통증이 느껴진다. 뻘겋게 물든 더러운 천을 보는 순간 청명의 얼굴은 더없는 허탈함으로 물들었다.

코피라니!

심지어 내상 때문에 피가 역류해 나오는 코피도 아니고 두들겨 맞아서 흘리는 코피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코피만이 아니었다. 전신에 성한 곳이 하나도 없다.

시퍼렇게 멍이 든 눈두덩이야 말할 것도 없고, 뼈마디 하나까지 온전한 곳이 없는 느낌이었다.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이렇게 녹신녹신해지도록 매질을 당해 본 적이 있던가?

엄격한 규율을 자랑하는 화산에서 온갖 사고를 치면서도 이렇게 맞아 본 적이 없는데, 그 첫 경험(?)을 저잣거리 거지를 통해 하게 될 줄이야.

"망할 거지 놈……."

타구봉을 휘두르는 거지의 손길에선 전문가의 냄새가 났다. 몸 구석구석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후려 패는 그 매질은 거의 예술의 경지였다.

그 몽둥이질의 대상이 자신만 아니었더라도 박수를 쳐 주었을 테지만…….

"이 개방 거지새끼들. 내가 씨를 말려 버리겠다."

지금은 단순히 분노할 뿐이다.

치밀어 오르는 열과 짜증을 이기지 못한 청명이 드러누워 바동거렸다. 하지만 바동거려 봤자 몸만 아플 뿐이다.

"아니, 그보다……."

청명은 얼른 벌떡 일어나 냇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고개를 앞으로 빼꼼 내밀었다.

수면에 처음 보는 어린 얼굴이 비친다. 청명이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어린놈도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청명이 한숨을 쉬자 어린놈도 한숨을 쉬었다.

"……이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야?"

왜 수면에 어린놈의 얼굴이 보이는가?

아니, 뭐 얼굴이야 좋다. 얼굴이 바뀐 건 납득할 수 있다. 여하튼 얼굴은 어릴수록 좋은 법이 아닌가? 동안이라기에 과하게 어려졌지만, 늙은 것보다는 어린 게 낫다.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얼굴이 예전 청명의 것보다 잘생겼다. 그러니 그건 딱히 불만이 없다.

불만이 터지는 부분은 몸도 함께 어려졌다는 점이다.

'짧아.'

팔다리가 원래 그의 것보다 짧다. 태생적으로 체형이 짧은 게 아니라, 아직 성장이 덜 된 아이의 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몸뚱어리는 자라면서 피죽도 못 얻어먹었는지, 앙상한 뼈밖에 남아 있지 않다. 지금도 기운이 없고 배가 고파서 손 하나 들어 올리기 힘들다.

아. 그건 맞아서 그렇구나.

여하튼!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내가 살아 있다는 건데."

내가라는 말은 적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리 봐도 지금 그의 모습은 매화검존 청명의 모습은 아니니까. 여든에 가까웠던 노인이 어린아이의 몸이 되어 버렸다.

매화검존 청명이 살아 있는 게 아니라, 매화검존 청명이 거지 아이의 몸에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기억을 온전히 가진 채 말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이게 그 불교에서 말하는 환생이라는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화산에 입문할 게 아니라 소림에 입문할걸.

갑작스레 깊어지는 불심(?)을 밀어내며 애써 외면한 청명이 손을 들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야!"

격하게 손을 움직이자 전신이 욱신거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열이 받는다.

"말도 안 된다고 난리 쳐 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을 테고."

꿈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다.

천마가 환술을 부린 게 아닌가, 의심도 해 보았지만, 이런 생생한 환술을 부릴 수 있다면 천마는 이미 천하를 지배했을 것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청명이 해야 할 일이 뭔지는 너무도 극명하다.

"……일단은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을 해 봐야겠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청명은 아까 빠져나왔던 거지 굴 쪽으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아니, 달려가려고 했다.

"끄으으윽."

몇 걸음도 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옴팡지게도 때렸네, 이 거지새끼."

청명의 눈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상황이 어떤 상황이든 내가 개방은 반드시 족친다."

죽었다 살아났다고 해서 그 더러운 성격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내 다시 일어서선 뒤뚱거리며 거지 굴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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