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비가
대 화산파 13대 제자.
천하삼대검수(天下三代劍手).
매화검존(梅花劍尊) 청명(靑明).
천하를 혼란에 빠뜨린 고금제일마 천마(天魔)의 목을 치고 십만대산의 정상에서 영면.
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아이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다.
그런데…….
뭐? 화산이 망해?
이게 뭔 개소리야!?
망했으면 살려야 하는 게 인지상정.
“망해? 내가 있는데? 누구 맘대로!”
언제고 매화는 지기 마련.
하지만 시린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매화는 다시 만산에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그런데 화산이 다시 살기 전에 내가 먼저 뒈지겠다! 망해도 적당히 망해야지, 이놈들아!”
쫄딱 망해 버린 화산파를 살리기 위한 매화검존 청명의 고군분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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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
"이……."
이가 부러질 듯 맞물린다.
움켜쥔 주먹에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검붉은 피가 흘러나온다.
경련하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다.
머리를 새하얗게 만들어 버릴 것 같은 분노가 그를 덮쳤다.
붉다.
모든 것이 붉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검붉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고작 하루 전까지 녹음으로 푸르르던 이 산봉우리는 불과 하루 만에 인간의 피로 뒤덮여 그 색이 바뀌어 버렸다.
죽음.
이제 이곳에 남은 것은 죽음뿐이었다.
무엇을 위해 이 많은 피가 흘러야 했단 말인가?
청명이 손을 들어 자신의 어깨에 쑤셔 박힌 검 날을 움켜잡았다. 부러진 매화검의 날이 뽑혀 나온다.
그의 몸 역시 정상은 아니다.
왼쪽 팔은 뜯겨나가 소맷자락만 펄럭이고 있었고, 두 다리중 하나도 반쯤 잘려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그의 배에 뚫린, 아이 머리만 한 커다란 구멍이었다.
하지만 청명은 조금의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심적 고통에 비하면 육신의 고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장문사형."
그의 눈에 처참한 시체가 되어 버린 화산장문 청문(靑問)의 모습이 들어왔다.
무엇이 그리 억울했을까?
무엇이 그리 억울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걸까?
장문인뿐만이 아니다.
"사제……."
허리가 두 동강이 난 채 죽은 청공(靑空)의 모습이 그의 눈에 아프게 틀어박힌다.
"사질들."
모두가 죽었다.
함께 이 산을 오르며, 강호를 수호하고 화산의 이름을 천하에 떨치리라 맹세했던 사형제들은 모두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났다.
그들을 따라 이 산에 오른 사질들도 모두.
청명이 이를 악물었다.
고귀한 희생이다. 더없이 위대하고 협의(俠義) 넘치는 죽음이다.
하지만 이 죽음을 누가 감히 칭송할 수 있다는 말인가?
누가 감히!
청명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더할 나위 없이 거대한 증오를 담아 이 모든 사태를 만들어 낸 원흉을 노려보았다.
하늘이 내린 악마.
천하를 피로 물들인 악귀의 집단, 마교의 교주.
세상이 천마(天摩)라 부르는 이를.
이 끔찍한 지옥도 속에서도 천마는 더없이 평온해 보였다. 시산혈해 속에 가만히 가부좌를 틀고 있는 그의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그를 증오한다고 자부하는 청명에게마저 기이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아니, 평온이란 말은 지금의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전신에 십여 개의 검이 박히고, 두 개의 창이 배를 뚫고 있는 자에게 평온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
저 마귀를 저 꼴로 만들기 위해 모두가 목숨을 바쳤다.
구파일방을 비롯한 이십여 개의 문파, 정예 중의 정예들만으로 구성된 최후의 결사대(決死隊). 그 모두와 천마의 격돌은 결국 공멸(共滅)이라는 결말을 낳았다.
만족할까?
이곳에서 죽어 간 이들은 과연 이 결과에 만족하고 눈을 감을 수 있을까?
그럴 리 없다.
설령 그들이 만족하고 기뻐한다고 해도 청명만은 그럴 수 없었다. 그저 전신을 불사를 것같이 끓어오르는 증오와 분노를 다스리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 순간.
천마가 가만히 눈을 떴다.
투명하게 비어 있는 그의 눈동자가 청명을 응시한다.
그리고 그의 입이 천천히 열린다.
"……화산."
그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것은 화산이라는 두 글자였다.
화산.
청명의 가슴에 화인처럼 박힌 그 두 글자가 저 마귀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아쉽구나. 화산의 제자여. 이곳에서 살아 돌아갈 수 있다면 나를 죽였다는 영광을 일평생 누릴 텐데."
"……주둥아리 닥쳐."
"너는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수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다고는 하나, 너의 검은 결국 나에게 닿았다. 나는 천마의 이름으로 너의 검이, 화산의 검이 천하제일임을 인정한다."
"닥치라고!"
저 저주받은 입에 화산이라는 이름을 올리는 것조차 증오스럽다.
"아쉽구나."
천마는 죽어 가고 있다.
제아무리 그 무위가 하늘에 닿은 고금제일의 마인(魔人)이라고는 하나, 단전이 꿰뚫리고 오장육부가 모두 잘려 나가서야 살아남을 수 없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지금 천마의 모습은 그 생명이 끊기기 전의 마지막 몸부림에 불과하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죽어 가는 이의 모습이 저토록 여유로운 것은?
천마는 그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不可解)의 존재였다.
"내게 하루의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진정 천마(天魔)라는 이름에 걸맞은 존재가 되었을 것을. 하지만 이것 역시 내게 주어진 운명이겠지."
청명은 어깨에서 뽑아낸 검 날을 힘껏 움켜잡았다. 날카롭게 벼려진 날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이 길고 끔찍했던 전쟁의 종결을 향해, 천마를 향해 청명은 절뚝거리며 다가갔다.
다가오는 청명을 보면서도 천마의 눈은 여전히 무색투명했다.
"기억해라. 화산의 제자여. 이것은 끝이 아니다. 마(魔)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진정으로 마도천하가 열릴 것이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마도……."
파아아앙!
검이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이 고요한 산 정상에 울려 퍼졌다.
툭.
잘려 나간 천마의 목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청명은 여전히 투명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천마의 머리를 짓밟아 버렸다.
"이……."
전쟁은 끝났다.
세상은 이 전쟁을 결사대의 승리로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청명은 알고 있다. 이곳에 승리 따위는 없다. 아무도, 그 누구도 승리하지 못했다.
마침내 다리에 힘이 풀린 청명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 그에게도 찾아오고 있었다.
청명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토록 많은 피가 흐르고, 이토록 많은 이들이 죽어 갔음에도 하늘은 여전히 무심할 만큼 푸르렀다.
'화산은 이제 어찌 되는가?'
천마를 죽이기 위해 대산(大山)에 오른 모든 이들이 죽었다. 남은 이들이 있다 한들, 그들조차 이 괴멸에 가까운 피해에 신음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문파도 화산만큼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장문사형……. 내가 말했잖소."
협의에 모든 것을 바치지 말라 그리 말했잖습니까.
화산의 모든 청자 배가 이곳에서 뼈를 묻었다.
그리고 청자 배를 따른 백자 배도 모두 죽었다.
남은 것은 전력이 되지 않는 아이들뿐.
그리고…….
후회. 후회뿐이었다.
의미가 있었을까?
화산이 이곳에서 흘린 피가 과연 의미가 있었을까?
"저는 모르겠습니다. 장문사형……."
청명의 몸이 천천히 옆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그의 눈에 붉은 피로 물든 백색의 무복들과, 그 무복에 새겨진 다섯 잎의 매화가 들어온다.
그저 무인의 죽음.
지켜보는 이 하나 없는 곳에서 눈을 감는 쓸쓸한 최후. 평생 쥐어 온 매화검 하나를 묘비로 삼아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화산의 죽음이다.
"……그래도 나보단 낫구려."
울어 줄 이라도 있으니까.
청명이 그들을 위해 이리 울어 주고 있으니까.
흐려져 가는 청명의 시선이 장문인의 모습을 좇았다.
'미안하오. 장문사형.'
조금 더 무에 정진했다면 하나라도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스승과 사형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문파 밖으로 나도는 멍청한 삶을 살지 않았더라면.
매화검존(梅花劍尊)이라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허명이 아니라, 진정으로 화산의 검을 얻었더라면 결과는 조금 달랐을까?
부질없다.
또한 부질없다.
남는 것은 그저 후회뿐.
그리고 사문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언제고 매화는 지기 마련이지.'
또한 시린 겨울이 찾아오고 나면, 다시 피어난다.
'화산이여.'
청명의 의식이 점점 멀어졌다.
대 화산파 13대 제자.
천하삼대검수(天下三代劍手).
매화검존(梅花劍尊) 청명(靑明).
천하를 혼란에 빠뜨린 고금제일마(古今第一魔) 천마(天魔)의 목을 치고 십만대산의 정상에서 영면.
세상에 그가 남긴 몇 줄 안 되는 글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