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극의일로(極意一路) (6)
215화 극의일로(極意一路) (6)
갈유월의 입에서 달큰한 숨이 쏟아져 나왔고, 그건 내 몸을 채웠다. 난 이게 접문이라는 생각도 없었다. 갈유월의 몸에 있는 태원지기가 날 채우고 있었다.
사백 번의 회귀를 겪으며 비워졌던 내 영혼이 다시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난 무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뎌짐마저 다 깎여나가서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면, 난 완전한 초인(超人)이 됐을 것이다. 그건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었다.
난 슬쩍 눈을 떠서 내 왼손을 바라봤다. 왼손에 혼원지기가 어렸다. 짙은 회색의 혼원지기는 점점 옅어졌다. 그건 심지어 다양한 색깔로 변했다. 그걸 보자마자 내 마음 안에 뭉쳐있던 감정들이 폭발했다.
그제야 나는 갈유월을 바라봤다. 내 앞에 눈을 감고 있는 갈유월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달았다. 왜 지금껏 이걸 모르고 있었을까.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저 고통뿐이었던 전생. 난 그곳에서 희망을 버렸고,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사랑이라는 감정도 마음 깊숙한 곳 박아놓고 걸어 잠갔던 거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난 삶의 이유를 되찾은 거다. 회색뿐인 내 인생에 색깔이 돌아온 것이다.
“읍, 읍.”
갈유월이 숨이 막힌다는 듯 내 팔뚝을 쳤다. 그러고 보니 내가 다른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난 바로 풀어줬다. 우리는 황급히 떨어졌다.
난 갈유월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건 갈유월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오랜 침묵 끝에, 난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저기···.”
하지만 공교롭게도 갈유월도 그때 말을 막 꺼내려던 찰나였다. 난 바로 말을 틀었다.
“먼저 해.”
“먼저 해!”
이번에도 갈유월과 내 말이 겹쳤다. 나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제 난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뭔지 정확히 알았다.
“그럼 내가 먼저···”
“그럼 내가 먼저···”
또 다시 말이 겹친다. 때 아닌 촌극에 서로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이런 감정들이 내게는 낯설었지만, 싫지 않았다. 본디 내가 가지고 있던 감정들이다. 난 원래 겁날 때 겁을 내고, 행복할 때 웃고ㅡ전생에선 행복한 적이 거의 없었지만ㅡ, 슬플 때는 울었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전생의 뒤틀린 경험이 나를 냉정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지금까지, 근 이십년 간 반응하지 않고 스쳐지나갔던 경험들. 그 장면들이 내 머릿속에 한 번에 스쳐지나갔다.
난 아마 앞에 갈유월이 없었다면 울었을 것 같다. 스무 해간 밀려있던 감정의 파도는 나를 휩쓸었다. 감정의 파도는 나를 덮치고, 냉정함으로 포장되어 있던 무던함을 쓸어간다.
그리고 나를 어루만진다.
천천히.
부드럽게···.
그곳에는 갈유월과 같이 지냈던 시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감정이 살아난 지금에서 다시 보니까 그녀가 날 좋아하는 게 명백했다. 뭔가, 그것들을 몰아서 보니까 미안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여전히 과거로 갈 수는 있었다. 그러나 난 더 이상 가지 않을 것이었다. 추억은 엉성히 나열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유기적이었다. 혹시나 이상한 걸 건드려서 내 현실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갈유월.”
난 갈유월을 내려다봤다. 갈유월은 여전히 날 올려다보면서도 얼굴이 붉었다.
“···난 나를 잘 알아. 난 나한테 호의를 보여주는 사람한테는 폐를 끼친 적이 없고, 내게 적의를 드러낸 사람을 용서한 적도 없지. 왜냐하면 그게 제일 쉽게 사는 방법이잖아. 그래서 난 누구한테 도움은 됐을지언정 민폐는 안 됐을 거야. 그건 내가 자부해.”
“맞아. 가끔 좀 독단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혼자 한 적도 있었지만 말이야. 그게 좋은 의도인 걸 모른다는 게 아니야. 어떻게 보면, 그런 것들이 쌓여서 내가 좋아하는 네가 된 거니까.”
“크흠.”
난 헛기침을 했다. 이제 갈유월은 그냥 내게 마음을 완전히 드러내기로 한 모양이다.
여전히 부끄러움을 참고 있지만 그걸 드러내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눈빛이다. 하긴 갈유월은 자존심이 많이 강한 편이었다.
“어쨌든. 그래서 내가 아까 네 고백을 거절한 거야. 난 지금 아직 할 일이 끝나지 않았어. 만약 내가 네 고백을 받았는데, 할 일 때문에 네게 소홀하게 된다면 그건 민폐라고 생각해.”
“아니···”
갈유월의 안색이 다시 어두워졌다.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난 그걸 허락할 수 없었다.
“들어봐. 난 지금까지 내가 할 법한 선택만 했어. 그러니까 말이야. 내 안에서는 어떤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따라서 움직였단 말이야. 그 기준은 이성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겠지. 그렇지?”
난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게 아니었다. 갈유월이 대답하기도 전에 난 말을 바로 이어나갔다.
“근데 내가 처음으로, 내 기준에서 어긋난 선택지를 고르고 싶어졌어. 바로 너 때문에 말이야.”
사실 지금은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내가 지금 갈유월에게 엄청나게 끌리고 있다는 것이다.
난 그것이 그녀가 가진 순수한 태원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인간이 자연을 거슬러도 인간은 자연의 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갈유월은 내게 그런 말을 하는 듯했다.
물론 내가 태원지기 때문에만 끌리는 건 아니었다. 지금 나는 날 초조해하며 올려다보는 갈유월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얼핏 사납게 보일 수 있는 눈매도, 오똑하게 솟은 코도, 하얀 피부 덕에 더욱 붉어 보이는 입술도, 이마를 다소곳이 가린 앞머리도 전부 말이다.
감정이 억눌려있던 순간, 난 언제라고 말할 수 없지만 갈유월에게 전부터 반해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지키지 못할 수도 있지만, 돌아온다고 약속하고 싶어. 너한테 말이야. 그러니까 기다려줬으면 해.”
갈유월은 그제야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 챈 것 같았다. 갈유월은 고개를 푹 숙이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까와는 명백히 다른 울음이었다. 난 그 눈물 위에 내 말을 얹어 놨다.
“나도 널 좋아해. 갈유월.”
그녀가 눈물을 다 닦은 다음 언제고 볼 수 있도록 말이다.
*
믿을 수 없다. 금목환이 날 안아주고 있었다. 온 몸에 전율이 이는 것만 같았다. 내가 방금 뭘 들은 걸까. 저 목석같은 금목환이 좋아한다고 했다.
“지, 진짜야···?”
난 그의 가슴팍에서 머리를 비비며 위를 올려다봤다. 언제 봐도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이었다. 금목환은 정말 낯선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표정, 감정이 저렇게 풍부하게 담긴 걸 본 적은 처음이었다. 분명 금목환은 나를 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날 안심시키려는 미소.
“어떻게 이런 걸로 거짓말을 치겠어.”
나는 그 달콤한 말에 취할 뻔했지만, 갑자기 내 꼬라지가 생각나고 말았다. 난 바로 금목환의 어깨를 팍 밀어서 떨쳐낸 다음 뒤를 돌았다.
“왜 그래?”
금목환이 물었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거울, 거울이 필요했다. 한유림과 싸운 후폭풍이 심했다. 골절 때문에 부어오른 곳도 많았다. 경맥을 일시 차단해서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보기 흉하다는 게 문제였다.
“자, 잠깐만.”
일단 급한대로 옷의 깔끔한 부분으로 얼굴을 닦았다. 내 손은 섬세한 초식을 펼치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내 손짓은 곧 금목환에게 막히고 말았다. 당연하지만 내게 금목환을 떨쳐낼 수 없는 무력은 없었다. 여기서 그럴 때도 아니었고.
금목환은 내 손목을 잡은 다음 날 돌렸다. 난 고개를 숙이려 했지만 금목환은 내 턱을 받쳐 내려가지 못하게 했다.
“괜찮아.”
금목환은 역시 똑똑했다. 뒤를 돈 것만으로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 똑똑한 건, 이런 나를 안심시켜주는 최고의 방법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고요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던 금목환은 내 입술을 맞췄다. 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지만, 마치 내 몸이 알고 있다는 듯이 움직였다. 입이 벌려지고 혀가 뒤섞였다.
그래도 두 번째 하는 거라고 첫 번째보단 서로가 능숙했다. 내가 처음 들어갔을 때, 사실 금목환과 내 이빨이 부딪쳤었다. 이제는 그런 민망한 실수 같은 건 없었다.
“···으음, 음.”
나는 금목환을 끌어당겼고, 금목환도 나를 끌어당겼다. 서로가 서로를 원한다는 걸 확인할 때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화약이 터지는 듯했다.
아마 금목환도 같은 기분일까.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목환아!”
그 말에, 나도 금목환도 서로 번개같이 입을 뗐다. 하지만 보인 건 어쩔 수 없었다. 문전에서는 금수린이 경악한 모습으로 나와 금목환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심지어 뒤에는 금월상, 금화청, 한유림도 모두 있었다. 금월상과 금화청은 재밌다는 눈빛이었고, 한유림은 살짝 씁쓸한 눈빛, 금수린은 그야말로 대경실색한 눈빛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만약 금목환과 이어진다면 금수린을 형님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형님의 수혈을 짚은 올케가 된 거다.
“···큼. 그만 쳐다보지?”
금목환은 내 손을 잡고 뒤로 돌렸다. 난 금목환의 손에 이끌려 그의 뒤로 걸어갔다. 그의 등이 황금세가 사람들의 날카로운 시선에서 막아줬다.
금목환이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에 황금세가 사람들은 또 놀란 것 같았다. 그는 명백히 민망함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금목환을 바꾼 걸까. 아니, 금목환은 계속 본인을 바꾸고 싶었을 거다. 난 마중물을 살짝 부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매일이 오늘 같았으면 좋겠다 싶었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오늘이 특별한 날이 아니게 되는 거니까.
이 하루는 지금 지나가고 있는 하루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해야 하는 건···
그냥 즐기면 되는 것뿐이었다.
*
난 가족들에게 갈유월과 입을 맞춘 것에 대해서 반 시진을 해명해야 했다. 내가 해명을 하는 도중에도, 가족들은 간간이 놀라움을 터뜨렸다. 내가 말하면서 손짓을 하는 거나, 내가 말하면서 표정을 드러내는 거나 다 그들에겐 생소해보이는 것이었다.
“아무튼 내가 갈유월이 좋으므로,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가주령이야.”
“와. 여기에 가주령까지 쓴다고?”
금월상이 탄식했다. 당연하지만 세가 사람들에게 가주령은 절대적이다.
그리고 난 가주령을 한 번도 내린 적이 없었다. 웬만하면 가족들의 행동을 강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강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뭐, 얼굴이겠지. 남자놈들이 다 똑같아.”
금화청의 말에 금수린이 불퉁하게 대답했다. 저렇게 나한테 불퉁한 누나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니, 갈 소저가 예쁜 건 맞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일까?”
“스읍.”
내가 숨을 들이켰다. 더 이상 말하면 가주령을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건 내 마지막 경고였다. 형제들은 내 판단에 불만을 가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난 간신히 가족들을 쫓아냈다. 갈유월은 안가의 방구석에 넣어 놨다. 누구도 갈유월의 방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엄명까지 해놓았으니 들어갈 일은 없을 거였다.
이번 갈유월과 숨을 교환했을 때, 난 느낀 게 많았다. 자연과 인간. 자연을 거스를 수 있는 초인.
극도로 강한 인간은 초인이 되듯이, 극도로 자연과 동화된 인간도 비슷했다. 그래, 내가 갈유월에게서 느꼈던 건 천마의 기운과 비슷했다. 천마는 나와 반대로 자연과 동화된 인간이었던 거다.
선악도 없고, 감정도 없고, 초월한 신적인 존재. 초인 내지는 자연과 동화된 사람. 그것이 바로 화경이었다. 서로 가는 길이 반대여도, 극의에 이르면 한 길로 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난 지금의 가족과 있는, 갈유월과 함께한 행복을 남기며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게 중원 전체를 위한 일이라고 해도, 내가 싫었다.
그렇다면 인간인 채로 천마를 이겨야 한다는 건데. 천마의 강함으로 생각하면 퍽 지난한 일이 될 게 분명했다.
그래도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중원칠종신기.”
일단 그것부터 모두 찾아야 했다.